“피고인에겐 거짓말을 할 기회가 끝없이 주어졌어요. 지켜보는 내내 사지가 녹아내리고 얼굴이 짓이겨지는 것 같았어요.”
A씨는 왜 자신의 피해를 증명하는 과정에서 ‘정신적 구타’를 당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A씨는 평소처럼 수면제를 먹고 자던 중 당시 교제 중이던 남성에게 피해를 입었고, 그를 준강간치상 혐의로 고소했습니다. 이어진 재판 과정에서 A씨는 용기를 내 방청석에서 재판을 지켜봤고, 증인 신분으로 두 차례 신문에 응했습니다.
분명 자신의 피해에 대한 재판이지만, 피해자가 접근할 수 있는 정보는 많지 않았습니다. 피해자는 법원에 신청해 허락을 받을 경우에만 열람·등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인데요.
문제는 그러면서 피해자가 중요한 흐름을 놓치고 피고인의 허위 주장을 반박할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A씨는 자신을 제외한 ‘형사재판의 당사자’들 사이 어떠한 주장과 자료가 오갔는지 모르는 상태로 2시간짜리 증인신문을 두 차례 받았습니다.
‘○○여대 나왔죠?’, ‘낙태(임신중지)에 대해 여자가 결정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한 적 있죠?’ 등과 같이 사건과 무관한 질문부터, ‘평소 (성관계할 때) ○○자세를 좋아했다면서요?’ 등의 물음이 그에게 날아들었습니다. 사실은 강간이 아니라 피해자가 원한 성관계였다고 주장하기 위한 피고인 측의 ‘설계’가 담겨 있었습니다. 재판부는 이러한 질문을 실제로 막지는 못했고요.
또 A씨의 상처를 본 산부인과 의사는 ‘○○라는 기구를 쓴 것 같다’는 의무기록을 남겼는데, 이를 두고 피고인 측은 “피해자가 자위기구를 사용하다 다쳤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 기구는 남성이 사용하는 종류이고, 의사가 해당 의무기록을 남겼던 것도 피고인에 의한 상해로 추정된다는 의미였습니다. 피해자는 증인신문을 받을 때 그 기구가 무엇인지 몰라 대응하지 못했고 이 기구의 정체는 재판 과정에서 바로잡히지 못했습니다. 피고인은 최종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A씨가 재판 결과를 납득하지 못하는 건 단지 피고인이 무죄를 받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자신이 사건의 피해자인데, 재판과 판결 과정에 목소리를 낼 여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피해자와 피해자의 변호인에게도 재판에서 발언할 기회가 주어졌더라면, 재판부에 직접 상고 의견을 전달할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피해자 B씨의 느낌도 비슷합니다. 그는 “참고인 및 증인의 진술이 피고인에 의해 오염됐다는 정황이 명백하게 있었고, 검사님을 통해 자료를 제출했는데도 반영이 안 됐다”고 호소했습니다. 이 역시 피고인이 무죄를 선고받은 사건이었는데요.
구체적으로 보면 B씨는 직장동료였던 남성에게 준유사강간치상 피해를 입었다는 취지로 그를 고소했습니다. 준강간죄가 성립되려면 사건 당시 피해자가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에 있었어야 합니다.
판결문을 보면 사건 전후 피해자를 목격한 업주와 종업원들은 ‘피해자가 술이 깬 것 같은 느낌이었다’, ‘취한 것 같으면서도 안 취한 것 같았다’고 진술했습니다. 이는 ‘객관적 제3자 진술’로 판결에 인용돼 피고인이 무죄를 받는 주요 판단근거로 작용했습니다.
그런데 B씨가 경찰 조사를 받으며 뭔가 이상해서 해당 식당을 찾아가보니, 이미 피고인(당시에는 피의자)이 경찰보다 먼저 다녀간 상태였습니다. B씨는 피고인이 ‘강제추행으로 억울하게 신고당했다’며 도움을 요청했음을 확인했고요. 피고인은 한 가게 주인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고, 경찰이 갔을 땐 이미 폐쇄회로(CC)TV 영상이 대부분 삭제된 상태기도 했습니다.
B씨가 만난 업주와 종업원들은 “남자분이 와서 억울하게 신고당했다고 하니 아무 일 없었다고 진술할 수밖에 없었다”는 취지로 말했습니다. 이러한 증인들의 말은 피해자가 확보한 증인 진술서 내용과 달랐습니다. ‘피해자가 취하지 않아 보였다’는 내용으로 진술한 사람이 정작 B씨에게는 “(그 때) 많이 취했었다. 기억 못 하시죠?”라는 말을 했습니다.
B씨는 이를 비롯해 피고인의 모순을 설명하는 의견서를 재판부에 제출했으나 “읽지 않은 것 같다”고 느낍니다. 판결문에 반영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B씨는 “그때 내게 말할 기회를 줬더라면”이라고 계속 아쉬워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법적 절차는 ‘피해자의 말하기’로 시작합니다. 정작 절차가 시작된 후 피해자의 말하기를 보장하지 않는 현행 제도는 분명 역설적입니다. 이러한 소외 속에서 피해자는 국가가 약속했던 정의가 무엇이냐 묻고 있습니다.
🔶 위 사례들과 달리 가해자가 법적 처벌을 받은 경우에도 피해자는 개운하지 않습니다. 상해, 폭행 등으로 전 남자친구를 고소한 피해자 김가온씨(가명)는 '나는 5년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을 한다고 했어요. 가해자가 선고받은 형량을 역산한 것입니다. 그것도 완전하진 않습니다. 형기의 3분의 1을 채우고 가석방되는 경우, 피해자에게 자동으로 통지되지 않기 때문인데요. 아직까지는 신청주의에 기반해 '피해자의 신청이 있을 때' 가해자의 출소 등과 관련한 사실을 통지하도록 돼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