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 1장에는 요선생님이 만화를 처음 읽고 그리게 된 이야기가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요선생님이 가장 좋아하고 영향을 받은 작품이라면 역시 『베르사유의 장미』. 빅토리아풍, 대혼돈을 앞둔 귀족과 혁명 시대의 유럽 이야기를 참 많이 그리셨습니다. 본인이 말하기로도 틈만 나면 아주 그냥 베르바라 소재를 작품에 끼워 넣었다고도 하고요. ‘덕질’로 좋아했던 작품이라면 『슬램덩크』 같고요. 이건 유명합니다. 그후 요선생님이 그린 모든 캐릭터는 권준호와 정대만을 약간씩은 닮아 있으니. 그 중간지대, 덕질로도 작품적으로도 영향을 받은 게 의외로 소설 『은하영웅전설』인 것 같습니다. 전 독자이자 편집자로서 한 창작자가 어떤 작품과 작가에서 영향을 받았는지 보이는 게, 혹은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게 무척 즐거운데요. 들개이빨 작가님은 어떠세요? 창작자로서 영향을 받는 작품, 질투나서 못 보겠는 작품, 혹은 그런 것 상관없이 백 퍼센트 즐길 수 있는 작품이 분리되시나요?
들개: 어릴 적 읽은 『기생수』 『드래곤볼』 『총몽』 같은 만화와 김혜린, 황미나, 김동화, 김수정, 천계영 선생님의 만화들은 독자로서 백 퍼센트 푹 빠져 읽은 만화들입니다. 주로 출판만화와 애니메이션이 대부분인데, 특히 저에겐 만화가 ‘책’이라는 매체에 담기면 교과서와 같은 권위가 생기는 듯합니다. 그리고 교과서는 질투의 대상이 아니죠. 이런 만화들이 제 창작에 영향을 주었다곤 생각하지만 직접적으로 어디서 어떻게 영향을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보시는 독자분들이 더 정확히 캐치하실 것 같습니다. 질투가 나서 못 보겠다 싶은 작품은 그만큼 재미가 있다는 이야기니까 끝까지 볼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웹툰은 왠지 정신적으로 피로해서 잘 못 보는 편입니다.
편: 아, 웹툰작가님들 중에 의외로 웹툰 많이 안 보고, 못 본다는 분들 꽤 많습니다.
들개: 제겐 일이 되어버린 것 같아요. 남의 업장을 구경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엄지로 스크롤 내리는 것도 힘이 듭니다. 손가락을 한 번 쓸어내리는 것에 비해 들어오는 정보는 너무 적어요. 아, 최근에 질투와 가장 가까운 감정이 들었던 작품이 한 가지 있는데 와야마 야마 작가님의 작품들입니다. 그의 개그 주머니를 뺏어오고 싶었습니다.
편: 요시나가 후미 하면 역시 ‘아저씨’입니다. 『서양골동양과자점』을 연재할 때도 편집자와 회유 끝에 30대로 연령을 낮춰 그렸다 하시고, 『어제 뭐 먹었어?』 때는 ‘이제는 진짜 누가 뭐래도 마흔 넘은 아저씨뿐이다’라는 심정이었다고 하죠. 들개이빨 작가님도 결국은 ‘자기 이야기’에서 시작되어야 만화를 그릴 수 있다고 하셨던 인터뷰가 기억이 나요. 나랑 멀어질수록 몰입도 안 되고 재미도 없어졌다고요. 어떠세요? 요선생님처럼 취향이 확실하고, 자기 취향을 계속 밀고 나가며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창작자가요. ‘작가의 욕망이 투명하게 보인다’ ‘뇌절한다’ ‘똑같은 것만 그린다’라는 말이 약간은 폄하처럼 쓰인다 생각하거든요.
들개: 저도 오랜 시간 그 점을 걱정했고 제 욕망을 꿰뚫어보는 듯한 반응을 볼 때면 굉장히 창피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다릅니다. 어차피 모든 창작물은 작가의 욕망의 산물이니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욕망이 투명히 보인다, 뇌절한다. 이런 부정적인 평이 한 창작자에게 반복된다면 그건 똑같은 것을 그리더라도 재미있고 신선하게 그려내는 연출력을 개선해야 할 문제라고 봅니다. ‘작품에 내 욕망을 실었다.’ 그 자체는 고민할 문제가 아닙니다. ‘요시나가 하면 아저씨’처럼 작가의 욕망을 대중들에게 각인시키는 게 더 바람직한 창작자의 자세이자 성공적인 사례라 생각합니다. 주목받기 힘든 콘텐츠 범람 시대에, ‘뇌절’이란 말은 훈장 아닐까요?
편: 한 창작자가 오랜 시간 다수의 창작물을 시장에 내놓았다는 뜻이고, 독자들이 그것들의 흐름과 경향성을 파악할 정도로 주목을 받아왔다는 이야기와 같으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내가 그리고 싶은 걸 그린다’고 하는 요선생님도 크게 고민하는 것 중 하나가 엔터테인먼트적 요소, 즉 오락성과 상업성입니다. 자기 만화가 대중적 재미를 갖고 있을까, BL의 문법에 따른 재미를 갖고 있을까 하는 고민요. 데뷔 초에는 특히 눈치를 보는 것 같았어요. 독자뿐 아니라 편집자의 눈치까지도요. 작가님은 어떠세요? 본인 만화에 별 다섯 개 만점에 한 개만 주시는 것을 보고 많이 고민하실 거라 예감은 듭니다만.
들개: 저는 그 부분이 인터뷰집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였습니다. 내 만화가 대중성이 있을까, 연재처가 받아줄까. 이런 고민은 저처럼 자기 확신이 부족한 창작자나 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당연한 일이었어요. 상업성을 우선하는 작가는 더 큰 대중적 재미를 위해 고민하고, 소위 작가주의적인 창작자들은 이걸 받아줄 연재처가 있을지, 얼마만큼 오락성을 가미해 타협해야 할지를 고민합니다. 결국 세상에 내놓아지는 모든 작품은 ‘남의 눈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치만 여기서 요선생님과 제 공통점이 또 나오죠. “고민은 엄청 하지만 결국 내 맘대로 한다.”
편: 요선생님도 인터뷰집 후반부에 말하니까요. 나는 내가 그리고 싶은 것, 내가 보고 싶은 것만 그릴 수 있다고요.
들개: 물론 대중성과 작품성이 양립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제 개인적 취향도 굉장히 메이저하고요. 저도 남들이 재밌다고 하는 거 웬만하면 다 재밌게 봅니다. 적어도 저에게 있어서는 ‘내 욕망에 최대한 충실하게 작품을 만든다’는 것이 가장 대중성과 가까워지는 전략이었습니다. 만약 제 작품에 대중적인 재미가 없다면, 그건 제가 그리고 싶은 것을 충분히 솔직하게 그리지 못했기 때문일 겁니다.
편: 이렇게 자신이 그리고 싶은 걸 그린다고 말한 요선생님이지만 의외로 분명하게 싫어한다고 밝힌 본인 작품이 있다고 해서 놀랐어요. 『1교시는 활기찬 민법』은 연재 때도 지금도 좋아하지 않고 너무 아쉬운 점이 많다고 합니다. 『1교시는 활기찬 민법』을 꽤 좋아하는 독자로선 좀 놀랐습니다. 보통 작가님들은 가장 아끼는 작품에 대한 질문을 받을 텐데 『1교시는 활기찬 민법』처럼 너무 아쉽거나, 성에 안 찬 에피소드가 있나요?
들개: 저도 『1교시는 활기찬 민법』은 법대 강의실 풍경이나, 학생들의 빈부격차와 성적에 의해 진로가 갈릴 때의 미묘함, 돈과 권력을 겸비한 상류층 자제의 고뇌 등을 담백하게 잘 그려내 무척 즐겁게 보았습니다. 그런데 또 싫어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아요. 상대적으로 애정도가 낮거나 아쉬워지는 작품들은 대체로 작가 본인의 실제 모습이 직접적으로 반영된 현대 일상물이었어요. 자신의 실제 경험과 추억 같은 게 제대로 소화가 되지 못한 상태에서 만화 작업에 들어가 아쉬움과 부끄러움이 더 커지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편: 작가님들이 그런 이야기 많이 하시더라고요. 본인이 재밌게 본 작품이나 경험담에서 작품의 시작이 될 때도 있는데, 그건 내가 그것을 창작에 쓸 수 있을 만큼 소화가 되거나 거리감이 생겨야 가능하다고요.
들개: 저는 요선생님과 미묘하게 다른 지점에서 아쉬움과 부끄러움을 느끼는데, 『부내죽』의 홍점순이 등장하는 모든 장면이 그렇습니다. 장르물에 대한 이해도 완전하지 않았고, 그러한 인간상에 대한 이해력과 관찰력이 모두 미숙했습니다. 웃기지도 않았습니다… 보통은 할말이 다 떨어진 상태에서 작품을 그리면 이렇게 됩니다. 하지만 다시 그린다고 해서 지금보다 나아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그린 건 그때의 최선이 낳은 결과 같습니다. 그러니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또 다하며 차기작을 준비하는 수밖에요.
편: 앞 질문의 연장선인 질문이 될 것 같습니다. 제5장 <다큐멘터리처럼>에서 요선생님은 『어제 뭐 먹었어?』의 연재를 준비할 때, 처음 작업하는 잡지고 판타지 색이 강한 잡지여서 내 자리가 아닌 것 같아 영 불편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잡지가 나랑 어울릴지 고민해봐도 결국 나는 어느 잡지든 겉돌았을 거라고요. 들개이빨 작가님도 왠지 비슷한 고민을 하신 적이 있을까 싶어 궁금했어요. 『부내죽』에서도 담당PD님이 메타픽션처럼 계속 나오잖아요? 요선생님의 이런 ‘겉돎’에 대한 고민을 보면서 작가님은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그럴 때마다 자신과 확신을 갖는 법이 있었나요.
들개: 일단 저는 좀 놀랐습니다. 요선생님의 작품은 제게 첫 페이지부터 끝까지 작가의 의도대로 잘 통제된 느낌이라 그런 불안 속에서 작업을 하실 줄 몰랐어요. 게다가 『어제 뭐 먹었어?』는 선생님 작품 중 가장 평온하고 현실에 발을 딱 붙이고 있는 작품이라 판타지색이 강한 잡지에서 연재되고 있는 줄도 몰랐네요.
편: 요선생님은 『어제 뭐 먹었어?』에 대해 비엘이라고 꼭 부연하세요. 일본은 비엘 장르면 비엘만 싣는 잡지에서 연재를 하는 게 보통이다보니, 청년 잡지에서 연재중인 작품에 대해 늘 그렇게 말씀하시죠.
들개: 그렇다면 다소 불편하실 법도 하네요. 저도 언제 어디서나 겉돎과 어색함을 느끼는 편이에요. 자신과 확신을 갖는 법 역시 아직 모르겠고요. 그냥 계속 불안하고 초조해하면서, 전적으로 외부에서 주입되는 힘에 의해 연재를 끌고 갑니다. 이를테면 연재를 준비할 땐 연재처에서 불러준 건데 다 생각이 있겠지, 하는 마음입니다. 아무 말 없으면 계속 연재하는 거고, 자르면 재미가 없었나보다 생각합니다. 그나마 제 안에서 확신 비슷한 게 싹틀 때는 독자분들의 재밌다는 감상을 들을 때입니다. 이것도 외부에서 주입해준 힘이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