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번째 만화다반사 (2024.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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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0일 깊어지는 가을 밤, 마포구 대흥역 근처에 위치한 어느 작은 서점(서점극장 라블레)은 은근한 흥분과 묘한 열기로 가득했습니다. 그곳에 오신 분들은 ‘오직 요시나가 후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일이어도, 일이 아니어도:만화와 요시나가 후미』의 북토크 독자분들💙 출간된 지 두 달이 지났음에도 이날만을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마감된 모집과 늦은 시간까지 귀기울여주신 독자분들께 감사합니다. 이러한 뜨거운 관심은 북토크를 빛내주신 아주 특별한 게스트 때문이기도 한데요. 이분의 등장, 아니 ‘강림’에 진행을 맡은 편집자는 너무나 감격스러운 순간의 연속이었다고 합니다. 이 초특급 게스트와 요시나가 후미 작가님 사이엔 꽤 닮은 구석이 있습니다.

 

1. 요시나가 후미 작가만큼이나 ‘음식’과 ‘식생활’에 진심이신 분
2. 요시나가 후미 작가처럼 ‘나의 이야기’에서 작품이 시작되는 분
3. 요시나가 후미 작가와 같은 법대 출신, 한때는 법조인을 꿈꾸신 분

무엇보다 이분은 요시나가 후미 작가님의 동인지까지 섭렵하신, 어마어마한 팬이라는 사실. 바로 『먹는 존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여자뮤지션』(이하 『부내죽』)의 들개이빨 작가님입니다. 올해 〈오늘의우리만화상〉을 수상한 『부내죽』의 반가운 소식을 들려주신 작가님은 늘 하는 산책과 요리를 반복하며 만화가로서의 에세이를 준비중이라는 근황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지는 요시나가 후미 토크에서는 들개이빨 작가님의 입담이 폭발해 늦은 밤까지 작은 서점 안은 웃음으로 가득했는데요, 그 현장을 여러분과 나눕니다!

들개이빨과 요시나가 후미

편집자(이하 편): 이 인터뷰집을 처음 검토했을 때 상당히 골때렸던 기억이 납니다. 와, 정말 요시나가 작가님의 유치원 입학 전부터 다루다니? 그리고 시작부터 냅다 음식 이야기라니? 요시나가 작가님의 작품 속 음식과 요리라는 행위는 삶의 태도랄까요. ‘야무진 생활’ ‘성실한 삶’을 사는 인물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것 같아요. 아니면 밥 한끼 제대로 차려먹으면 만사가 형통하리, 그런 느낌으로 ‘마음의 거리를 허무는 소재’랄까요? 마찬가지로 『먹는 존재』는 물론, 에세이 『나의 먹이』도 쓰신 들개이빨 작가님은 요시나가 만화 속 음식을 어떻게 읽으셨나요? 작가님 작품 속 음식과는 또다른 느낌이잖아요.

들개이빨(이하 들개): 전 책 속에 나오는 음식은 덮어놓고 먹어보고 싶어 하는 독자입니다. 어릴 때 서양의 동화에 나오는 부드러운 빵이라든지, 버터를 듬뿍 넣어 구운 쿠키라든지, 간 요리, 호박 파이… 그런 음식 묘사에 사로잡혀 집중이 안 될 정도였던 터라 요선생님(요시나가 후미 선생님)의 책을 읽을 때마다 너무 즐겁습니다. 요선생님의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음식이기도 하고요. 스토리와 전혀 상관없이 음식과 메뉴 명들이 줄줄이 읊어질 때마다 웃음이 나옵니다.

: 누가 봐도 갑자기 여기서 왜 이렇게까지 음식 이야길 자세히 하는 거야😦? 싶은데 요선생님은 아랑곳 않습니다.

들개: 요선생님이 좋아하는 음식도 고급스런 요리보단 김, 계란, 오이가 들어간 주먹밥, 된장국, 시금치나물 이런 거잖아요. 어릴 때 그런 음식 좋아하기 힘든데 입맛이 비범한 분이십니다. 그런 면에서 요선생님은 태초부터 ‘어른스러움’을 지향하는 사람이라 느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야무지고 꼼꼼한 성격의 등장인물들도 그렇습니다. 요선생님 작품 속에서 밥을 해 먹는 캐릭터들을 보면 그래도 이들이 아주 막장은 아니다, 이렇게 잘 해 먹고 사는 애들이라면 바닥까지 내려갈 일은 없겠구나, 하고 안심합니다. 음식을 사랑의 비언어적 표현으로 드러내기도 하시고요. 물론 『오오쿠』에선 음식이 나오면 긴장됩니다. 독살을 당할까봐…

편: 요선생님도 『오오쿠』 초반엔 밥 해 먹고 오붓하게 식사할 시간 같은 건 없었다고 하셨죠.

들개: 요선생님께 음식이 그런 것이라면, 저한테 음식은 짝사랑하는 상대 같습니다. 갈망과 죄의식의 대상이에요. 음식과는 원만한 관계를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선생님은 살이 잘 안 찌는 마른 체형이지 않을까 싶어요. 음식에 대한 수치심이나 배덕감이 있는 분이라면 음식을 긍정하는 이야기를 전면으로 하기 어렵다고 생각해서요.


: 두 분 사이엔 또 공통점이 있는데요. 요선생님은 법대 출신입니다. 전문직이 되면 육아나 휴직에 관계없이 안정적으로 업무 외 시간에 만화를 그릴 수 있을 거란 생각으로 변호사를 꿈꾸기 시작하셨다고 하죠. 들개이빨 작가님도 사람들이 만화를 무시하니까 ‘권위적 직업을 가져야겠다. 판사가 되어 만화를 그리면 아무도 뭐라고 안 하겠지?’ 그런 심정으로 법조계를 꿈꾸셨다고 인터뷰에서 보았습니다. 저 같은 바보 입장에서는 만화가보다 법조인 되는 게 더 힘든 일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아무튼 작가님은 요선생님이 법조인이라는 직업을 이용(?)하는 이야기 보면서 공감을 하셨을 것 같아요. 만화가가 되기 위해 일단 법조인이 되자고 마음먹은 사람은 전 세계에서 아마 두 분밖에 없지 않을까요…

들개: 그런데 여기서도 요선생님과 저의 미묘한 차이가 느껴져 재밌습니다. 요선생님은 자기가 처한 현실을 직시하고 만화를 그리기 위한 기반을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다지기 위해 그런 결정을 내리셨단 생각이 듭니다. 저의 경우는 ‘허세’가 앞섰습니다. 경제적 안정에 대한 고려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너 지금 나 무시하냐?’ 같은 다분히 한국적 욱함에서 비롯된 생각이었죠. 어쨌거나 중요한 건 요선생님도 저도 법조인이 되지 못했다는 겁니다(웃음). 인터뷰집 읽으니 요선생님도 대학 때 공부 열심히 안 하신 것 같던데…

: 아무래도 만화 보고 동인지 그리기 바쁘셨던 것 같죠…

강아지도 즐겁게 듣고 있는 북토크 현장

: 1장에는 요선생님이 만화를 처음 읽고 그리게 된 이야기가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요선생님이 가장 좋아하고 영향을 받은 작품이라면 역시 『베르사유의 장미』. 빅토리아풍, 대혼돈을 앞둔 귀족과 혁명 시대의 유럽 이야기를 참 많이 그리셨습니다. 본인이 말하기로도 틈만 나면 아주 그냥 베르바라 소재를 작품에 끼워 넣었다고도 하고요. ‘덕질’로 좋아했던 작품이라면 『슬램덩크』 같고요. 이건 유명합니다. 그후 요선생님이 그린 모든 캐릭터는 권준호와 정대만을 약간씩은 닮아 있으니. 그 중간지대, 덕질로도 작품적으로도 영향을 받은 게 의외로 소설 『은하영웅전설』인 것 같습니다. 전 독자이자 편집자로서 한 창작자가 어떤 작품과 작가에서 영향을 받았는지 보이는 게, 혹은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게 무척 즐거운데요. 들개이빨 작가님은 어떠세요? 창작자로서 영향을 받는 작품, 질투나서 못 보겠는 작품, 혹은 그런 것 상관없이 백 퍼센트 즐길 수 있는 작품이 분리되시나요?

들개: 어릴 적 읽은 『기생수』 『드래곤볼』 『총몽』 같은 만화와 김혜린, 황미나, 김동화, 김수정, 천계영 선생님의 만화들은 독자로서 백 퍼센트 푹 빠져 읽은 만화들입니다. 주로 출판만화와 애니메이션이 대부분인데, 특히 저에겐 만화가 ‘책’이라는 매체에 담기면 교과서와 같은 권위가 생기는 듯합니다. 그리고 교과서는 질투의 대상이 아니죠. 이런 만화들이 제 창작에 영향을 주었다곤 생각하지만 직접적으로 어디서 어떻게 영향을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보시는 독자분들이 더 정확히 캐치하실 것 같습니다. 질투가 나서 못 보겠다 싶은 작품은 그만큼 재미가 있다는 이야기니까 끝까지 볼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웹툰은 왠지 정신적으로 피로해서 잘 못 보는 편입니다.

: 아, 웹툰작가님들 중에 의외로 웹툰 많이 안 보고, 못 본다는 분들 꽤 많습니다.

들개: 제겐 일이 되어버린 것 같아요. 남의 업장을 구경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엄지로 스크롤 내리는 것도 힘이 듭니다. 손가락을 한 번 쓸어내리는 것에 비해 들어오는 정보는 너무 적어요. 아, 최근에 질투와 가장 가까운 감정이 들었던 작품이 한 가지 있는데 와야마 야마 작가님의 작품들입니다. 그의 개그 주머니를 뺏어오고 싶었습니다.

 

편: 요시나가 후미 하면 역시 ‘아저씨’입니다. 『서양골동양과자점』을 연재할 때도 편집자와 회유 끝에 30대로 연령을 낮춰 그렸다 하시고, 『어제 뭐 먹었어?』 때는 ‘이제는 진짜 누가 뭐래도 마흔 넘은 아저씨뿐이다’라는 심정이었다고 하죠. 들개이빨 작가님도 결국은 ‘자기 이야기’에서 시작되어야 만화를 그릴 수 있다고 하셨던 인터뷰가 기억이 나요. 나랑 멀어질수록 몰입도 안 되고 재미도 없어졌다고요. 어떠세요? 요선생님처럼 취향이 확실하고, 자기 취향을 계속 밀고 나가며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창작자가요. ‘작가의 욕망이 투명하게 보인다’ ‘뇌절한다’ ‘똑같은 것만 그린다’라는 말이 약간은 폄하처럼 쓰인다 생각하거든요.

들개: 저도 오랜 시간 그 점을 걱정했고 제 욕망을 꿰뚫어보는 듯한 반응을 볼 때면 굉장히 창피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다릅니다. 어차피 모든 창작물은 작가의 욕망의 산물이니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욕망이 투명히 보인다, 뇌절한다. 이런 부정적인 평이 한 창작자에게 반복된다면 그건 똑같은 것을 그리더라도 재미있고 신선하게 그려내는 연출력을 개선해야 할 문제라고 봅니다. ‘작품에 내 욕망을 실었다.’ 그 자체는 고민할 문제가 아닙니다. ‘요시나가 하면 아저씨’처럼 작가의 욕망을 대중들에게 각인시키는 게 더 바람직한 창작자의 자세이자 성공적인 사례라 생각합니다. 주목받기 힘든 콘텐츠 범람 시대에, ‘뇌절’이란 말은 훈장 아닐까요?

편: 한 창작자가 오랜 시간 다수의 창작물을 시장에 내놓았다는 뜻이고, 독자들이 그것들의 흐름과 경향성을 파악할 정도로 주목을 받아왔다는 이야기와 같으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내가 그리고 싶은 걸 그린다’고 하는 요선생님도 크게 고민하는 것 중 하나가 엔터테인먼트적 요소, 즉 오락성과 상업성입니다. 자기 만화가 대중적 재미를 갖고 있을까, BL의 문법에 따른 재미를 갖고 있을까 하는 고민요. 데뷔 초에는 특히 눈치를 보는 것 같았어요. 독자뿐 아니라 편집자의 눈치까지도요. 작가님은 어떠세요? 본인 만화에 별 다섯 개 만점에 한 개만 주시는 것을 보고 많이 고민하실 거라 예감은 듭니다만.

들개: 저는 그 부분이 인터뷰집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였습니다. 내 만화가 대중성이 있을까, 연재처가 받아줄까. 이런 고민은 저처럼 자기 확신이 부족한 창작자나 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당연한 일이었어요. 상업성을 우선하는 작가는 더 큰 대중적 재미를 위해 고민하고, 소위 작가주의적인 창작자들은 이걸 받아줄 연재처가 있을지, 얼마만큼 오락성을 가미해 타협해야 할지를 고민합니다. 결국 세상에 내놓아지는 모든 작품은 ‘남의 눈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치만 여기서 요선생님과 제 공통점이 또 나오죠. “고민은 엄청 하지만 결국 내 맘대로 한다.”

편: 요선생님도 인터뷰집 후반부에 말하니까요. 나는 내가 그리고 싶은 것, 내가 보고 싶은 것만 그릴 수 있다고요.

들개: 물론 대중성과 작품성이 양립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제 개인적 취향도 굉장히 메이저하고요. 저도 남들이 재밌다고 하는 거 웬만하면 다 재밌게 봅니다. 적어도 저에게 있어서는 ‘내 욕망에 최대한 충실하게 작품을 만든다’는 것이 가장 대중성과 가까워지는 전략이었습니다. 만약 제 작품에 대중적인 재미가 없다면, 그건 제가 그리고 싶은 것을 충분히 솔직하게 그리지 못했기 때문일 겁니다.

 

편: 이렇게 자신이 그리고 싶은 걸 그린다고 말한 요선생님이지만 의외로 분명하게 싫어한다고 밝힌 본인 작품이 있다고 해서 놀랐어요. 『1교시는 활기찬 민법』은 연재 때도 지금도 좋아하지 않고 너무 아쉬운 점이 많다고 합니다. 『1교시는 활기찬 민법』을 꽤 좋아하는 독자로선 좀 놀랐습니다. 보통 작가님들은 가장 아끼는 작품에 대한 질문을 받을 텐데 『1교시는 활기찬 민법』처럼 너무 아쉽거나, 성에 안 찬 에피소드가 있나요?

들개: 저도 『1교시는 활기찬 민법』은 법대 강의실 풍경이나, 학생들의 빈부격차와 성적에 의해 진로가 갈릴 때의 미묘함, 돈과 권력을 겸비한 상류층 자제의 고뇌 등을 담백하게 잘 그려내 무척 즐겁게 보았습니다. 그런데 또 싫어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아요. 상대적으로 애정도가 낮거나 아쉬워지는 작품들은 대체로 작가 본인의 실제 모습이 직접적으로 반영된 현대 일상물이었어요. 자신의 실제 경험과 추억 같은 게 제대로 소화가 되지 못한 상태에서 만화 작업에 들어가 아쉬움과 부끄러움이 더 커지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편: 작가님들이 그런 이야기 많이 하시더라고요. 본인이 재밌게 본 작품이나 경험담에서 작품의 시작이 될 때도 있는데, 그건 내가 그것을 창작에 쓸 수 있을 만큼 소화가 되거나 거리감이 생겨야 가능하다고요.

들개: 저는 요선생님과 미묘하게 다른 지점에서 아쉬움과 부끄러움을 느끼는데, 『부내죽』의 홍점순이 등장하는 모든 장면이 그렇습니다. 장르물에 대한 이해도 완전하지 않았고, 그러한 인간상에 대한 이해력과 관찰력이 모두 미숙했습니다. 웃기지도 않았습니다… 보통은 할말이 다 떨어진 상태에서 작품을 그리면 이렇게 됩니다. 하지만 다시 그린다고 해서 지금보다 나아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그린 건 그때의 최선이 낳은 결과 같습니다. 그러니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또 다하며 차기작을 준비하는 수밖에요.

 

편: 앞 질문의 연장선인 질문이 될 것 같습니다. 제5장 <다큐멘터리처럼>에서 요선생님은 『어제 뭐 먹었어?』의 연재를 준비할 때, 처음 작업하는 잡지고 판타지 색이 강한 잡지여서 내 자리가 아닌 것 같아 영 불편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잡지가 나랑 어울릴지 고민해봐도 결국 나는 어느 잡지든 겉돌았을 거라고요. 들개이빨 작가님도 왠지 비슷한 고민을 하신 적이 있을까 싶어 궁금했어요. 『부내죽』에서도 담당PD님이 메타픽션처럼 계속 나오잖아요? 요선생님의 이런 ‘겉돎’에 대한 고민을 보면서 작가님은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그럴 때마다 자신과 확신을 갖는 법이 있었나요.

들개: 일단 저는 좀 놀랐습니다. 요선생님의 작품은 제게 첫 페이지부터 끝까지 작가의 의도대로 잘 통제된 느낌이라 그런 불안 속에서 작업을 하실 줄 몰랐어요. 게다가 『어제 뭐 먹었어?』는 선생님 작품 중 가장 평온하고 현실에 발을 딱 붙이고 있는 작품이라 판타지색이 강한 잡지에서 연재되고 있는 줄도 몰랐네요.

편: 요선생님은 『어제 뭐 먹었어?』에 대해 비엘이라고 꼭 부연하세요. 일본은 비엘 장르면 비엘만 싣는 잡지에서 연재를 하는 게 보통이다보니, 청년 잡지에서 연재중인 작품에 대해 늘 그렇게 말씀하시죠.

들개: 그렇다면 다소 불편하실 법도 하네요. 저도 언제 어디서나 겉돎과 어색함을 느끼는 편이에요. 자신과 확신을 갖는 법 역시 아직 모르겠고요. 그냥 계속 불안하고 초조해하면서, 전적으로 외부에서 주입되는 힘에 의해 연재를 끌고 갑니다. 이를테면 연재를 준비할 땐 연재처에서 불러준 건데 다 생각이 있겠지, 하는 마음입니다. 아무 말 없으면 계속 연재하는 거고, 자르면 재미가 없었나보다 생각합니다. 그나마 제 안에서 확신 비슷한 게 싹틀 때는 독자분들의 재밌다는 감상을 들을 때입니다. 이것도 외부에서 주입해준 힘이네요.

보내주신 독자분들의 관심과 사랑에 감사합니다!

편: 요선생님은 『오오쿠』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요시무네와 히사미치처럼 엄청나게 야심만만한 여성이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는 걸 나중에 은연중에 깨달았다고요.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어찌 보면 캐릭터들이 창작자를 넘어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순간을 맞이했다고 읽혔습니다. 실제로 많은 만화가분들도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데, 이번에 『부내죽』 완결 인터뷰에서도 들개이빨 작가님이 비슷한 이야기를 하셨더라고요. 작품 후반부로 갈수록 주인공의 자유의지가 강해졌고, 이 주인공에게 나쁜 연기를 시키고 싶지 않으셨다고요. 주인공에게 큰 애착이 생기셨다는 말씀도 덧붙이셨습니다.

들개: 이것도 제겐 놀라운 대목이었습니다. 하여간 제게 요선생님은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잘 짜인 설계도를 바탕으로 그리는 만화가라는 인상이 아주 강했거든요. 요시무네와 히사미치에 대한 요선생님의 말씀 같은 경험은 제게도 신기한 일이었는데, 연재가 거듭될수록 등장인물이 했던 대사나 행동들이 점점 누적되고, 그것의 총합이 제가 통제할 수 없는 인격체로 성장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느낌이냐면… 과거에 제가 쓴 일기를 다시 보는 느낌이랄까요.

편: 그 말을 들으니 이해가 확 되네요. 제가 쓴 건데 도무지 다른 사람 같잖아요.

들개: 분명 내가 쓴 거지만 지금의 나와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한단 말이죠? 특정 시기에 살아 숨쉬는, 제 손이 닿지 않는 ‘나’라고 할 수 있죠. 그런 인물들을 맞이한 것이 낯설고 당황스럽고 흥분되었고 약간은 기쁘기도 했습니다. 스토리가 이상해지면 내가 아니라 등장인물들이 멋대로 움직여서 그랬습니다!! 하고 책임을 떠넘길 여지가 생겨서요(웃음).

 

편: 약간 쉬어가는 이야길 해볼까요. 혹시 작가님은 19권이라는 긴 장편 『오오쿠』에서 제일 좋아하는 에피소드나 인물이 있나요? 저는 히라가 겐나이를 정말 사랑합니다. 워낙에 여기저기서 튀는 행동을 많이 하고 다니는 괴짜인 그가 결국 눈 밖에 나 무뢰배들에게 강간을 당합니다. 사건이 있고 난 뒤 그가 ‘이런 걸로 복수가 되나?’ 그런 대사를 중얼거리거든요. 남성에게 강간을 당한 것쯤은 자기가 생각했을 때 ‘복수’ 같은 응징조차 되지 않는다는 이야길 한 건데 이 여인이 얼마나 강한지를 확 깨달았죠.

들개: 히라가 겐나이… 이 인물을 생각하면 전 마음이 너무 아파서 사랑보다는 외면하고 싶어집니다. 인간의 저열함에 숭고한 의지가 꺾이는 모습에 참 속이 뒤집혀져서요. 저는 겐나이에게 큰 시련을 안겨주는 인물, 하루사다. 그에게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웃음).

편: 아니 방금까지 겐나이 때문에 가슴 너무 아프셨는데 갑자기요?

들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자기 친자식마저도 무자비하게 갖고 놀고 죽이려드는, 그런 등장만으로도 숨막히게 하는 사이코패스 여자를 너무 그려보고 싶거든요.

편: 실제로 요선생님도 사이코패스라는 개념을 알게 된 후 만든 인물이라 하셨던 것 같아요.

들개: 반대로 너무나 총명하고 심성 고운 인격자 이에모치도 좋았습니다. 그리고 작품 초에 등장한 시원시원한 요시무네도 아주 좋아해요. 전 그렇게 돈 아낄 줄 아는 알뜰한 인물이 좋습니다.

편: 쓸데없는 돈 낭비 참 싫어하고 살뜰히, 가성비 있게 나라 운영을 하죠.

들개: 잠자리도 이런저런 허식 같은 거 무시하고 그냥 성욕이 뻗칠 때 지나가던 아무나 붙잡아서 풉니다. 멋지지 않나요. 그런 소탈하고 실용적인 것을 좋아하는 캐릭터들이 제게 매력적입니다.

 

편: 아마 많은 분들이 이 인터뷰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말이었을 것 같습니다. ‘잘못한 사람이 없어도 슬픈 일은 일어난다’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일이 있다’. 비엘, 가족드라마, 로맨스, SF, 역사물 등 요선생님이 다양하게 그리는 만화를 관통하는 단일한 메시지가 있다면 바로 저것이었어요. 작가님도 벌써 데뷔하신 지 10년이 훨씬 지났고 다양한 만화를 그려오셨는데 내 모든 만화를 관통하는 하나의 메시지가 있다면 어떤 거라 생각하시는지요.

들개: “사람을 쉽게 미워하지 말자. 다들 각자의 사정이 있다.” 이 생각을 갖고 작품과 인물들을 그리려고 하는데 잘 드러났는진 모르겠습니다. 하도 욕을 해서…

편: 전 성공적이었다 생각합니다. 지금 여기 서점에 『먹는 존재』 단행본이 쭉 놓여 있는데, 각 권의 표지 인물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작가님께서 이 캐릭터들을 마냥 예뻐해달라고, 이 친구 되게 좋은 애라고 포장하듯 만들지 않았다고요. 그렇게 못나고 미운 점을 갖고 있기에 또 저 같은 못난 사람들이 몰입하고 이입해서 작품에 빠져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편: 독자분들과의 수다로 넘어가기 전 마지막 질문입니다. 만화에 관한 에세이를 계획중이신데 한 작가의 모든 것을 집대성한 인터뷰집을 읽으면서 본인의 만화가 인생을 돌이켜보게 되셨는지요?

들개: 이 북토크를 준비하며 요선생님의 국내 정발된 모든 작품을 다시 읽었어요. 너무나 행복한 시간이었고 새삼 느꼈죠. 아, 역시 만화는 그리는 게 아니다. 읽는 거다. 남이 그린 걸 읽는 게 짱이다(웃음).

편: 아니, 아니죠. 그러시면 안 되죠. 저희도 들개이빨 작가님이 그린 만화 보면서 읽는 게 짱이라는 생각하거든요?

들개: 근데 또 만화를 그리는 게 힘든 만큼 중독적인 일입니다. 아마 저는 또 그리고 싶어질 겁니다. 그때가 되면 요선생님의 작품과 이 인터뷰집을 번갈아 감상하며 즐거워했던 오늘의 기억이 작업을 버텨내줄 힘이 될 것 같습니다. 이 나이가 되니 누구처럼 되고 싶단 생각을 안 하게 될 줄 알았는데 요선생님의 말씀들을 읽으며 여건이 허락하는 한 꾸준히, 성실하게 최고급 도시락 같은 만화를 그리는 사람이 되고 싶단 생각을 했습니다.

독자와 요시나가 후미

편: 제가 북토크 신청 모집을 받으면서 독자분들께 여쭌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여러분의 최애 요시나가 작품입니다. 전 『플라워 오브 라이프』를 꼽고 싶습니다. 들개이빨 작가님은 채널예스와의 인터뷰에서 『사랑이 없어도 먹고 살 수 있습니다』를 언급하신 적이 있는데, 이게 최애작이 맞나요? 여기 오신 독자분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꼽힌 것은 『사랑해야 하는 딸들』이었습니다.

들개: 참 가혹한 질문이라 생각했습니다! 제가 처음 요선생님께 빠져든 계기가 된 작품이 『사랑이 없어도 먹고 살 수 있습니다』라 꼽았는데, 그러자니 『플라워 오브 라이프』가 걸리고, 『사랑해야 하는 딸들』도 걸리고… 하지만 역시 『사랑해야 하는 딸들』을 꼽겠습니다. 『사랑해야 하는 딸들』은 대사, 연출, 캐릭터, 그들 사이의 관계성, 에피소드 배치까지도 완벽하고 훌륭한 책입니다.

편: 맞아요. 저도 이번 북토크 전에 요선생님 작품 중 딱 하나만 다시 읽어보자 하고 고른 것이 『사랑해야 하는 딸들』이었어요. ‘단편집은 이런 것이다’라고 모범으로 내놔도 좋을 만큼 완벽한 단행본입니다. 아마 여자라면 이 책에 실린 어느 에피소드 한 편를 읽고 반드시 가슴에 상흔을 얻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남자들이 『사랑해야 하는 딸들』을 읽으면 이게 대체 뭔 소린지 이해는 할까? 싶더라고요.

들개: 그런데 제가 『사랑해야 하는 딸들』을 처음 읽었을 때 너무너무너무 좋은 나머지 그때 당시 좋아하던 남자에게 무턱대고 선물을 했습니다.

편: 아(개큰웃음).

들개: 집에 와서 아차 싶었던 기억이 납니다…

 

편: 두번째로 여쭌 것이 이번 인터뷰집에서 가장 인상 깊은 대목과 ‘나’에게 요시나가 후미란 어떤 작가인지였습니다. 오늘 여기 오신 독자분들은 인터뷰집을 어떻게 읽으셨는지, 그리고 여러분께 요시나가 작가가 어떤 창작자인지 한번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이 독자분은 4장 「해결되지 않는 일 속으로」에서 나온 내용을 인상 깊은 대목으로 꼽으셨습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트라우마는 사라지지 않고 행복해질 수도 없는데, 그런 이야기만 보게 되면 정말 괴롭겠죠. 그래서 사건이 해결되거나 트라우마가 치유되지 않아도 주인공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잃어버린 것이 완벽하게 똑같은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는 일은 거의 없고 잃어버린 사실을 없던 일로 할 수도 없지만, 그것이 곧 불행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그럼에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독자분은 살면서 완벽한 치유나 원하는 결과를 얻는 삶만이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는데, 그것이 요시나가 후미의 메시지와도 맞닿아 있어서 이 대목을 꼽으셨다고 합니다. 독자분께 묻고 싶습니다. 요선생님의 어떤 작품, 혹은 어떤 장면 중에서 자신의 깨달음과 맞닿아 있다고 느끼셨나요?

독자: 제가 가장 좋아하는 요선생님 작품이 『서양골동양과자점』인데, 그 작품을 읽으며 해결되지 않는 트라우마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사실 제가 처음 『서양골동양과자점』을 읽은 것은 중학교 때인데요.

편: 중학교 때요? 그때 요선생님 만화를 읽었으면 뭔 소리인지 이해 못 했을 것 같은데요.

독자: 맞아요, 그랬었어요. 트라우마를 가진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 인물이 마지막 권의 마지막 장면까지 아무것도 해결되지 못한 채, 그대로 또 아침에 일어나 일상을 살아간다는 결말을 보고 ‘이게 뭐야?’ 싶었던 기억이 나요.

들개: 저 또한 이십 대 때까지는 요선생님 만화를 이해하지 못했어요. 아무 맛도 안 나는 두부 같은 만화라고 생각했어요. (편: 또 음식 비유를ㅋㅋㅋ)

독자: 그후 저도 삶에서 상처를 입은 적이 있었고 해소되지 않는 트라우마를 갖게 되었는데, 그런 시간이 지나고 나서 요선생님의 만화를 다시 보니까 그제야 무슨 이야긴지 깨닫고 큰 위로가 되더라고요.

 

편: 또다른 독자분의 감상을 소개하겠습니다. 이 독자분께서는 요선생님의 만화에서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보여주는 여백을 좋아한다고 하세요. 그 여백에는 후회, 불안, 수치심, 슬픔, 절망 등 삶에서 피하고 싶은 감정들이 담겨 있다고 느끼신다고 해요. 이 답변과 더불어 다른 독자분의 이야기도 소개할게요. 이분은 요선생님이 독보적으로 입체적 인물을 그리는 창작자 같다고 하세요. 두 분의 답을 듣고 생각한 건 ‘입체적 캐릭터’는 여백을 가진 인물이구나, 였어요. 실제 삶에선 모든 감정이 언어화되지 않고, 하나의 감정으로 딱 잘라 떨어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런 점에서 요선생님은 정말 감정을 여백처럼 확 비워둡니다. 『사랑해야 하는 딸들』의 마지막 장면 혹시 기억나시나요? 딸 유키코가 엄마 마리에게 ‘난 엄마가 죽으면 장례식에서 엄청 울 거야’라고 말합니다. 과연 이 말에 마리가 뭐라고 받아칠까, 하고 페이지를 넘기니 마리는 그냥 ‘후훗’ 하고 웃어요. 그리고 이 단편집은 끝이 나요. ‘명대사’도 좋지만 이런 ‘명장면’도 참 훌륭합니다.

들개: 요선생님의 여백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는 감정은 경악, 분노, 체념이라 생각하는데 이중에서도 체념의 순간이 가장 아름답게 묘사된 게 『사랑해야 하는 딸들』 같아요. 그 특유의 왼쪽을 바라보는 서글픈 옆얼굴. 그 장면에선 항상 캐릭터들 머리카락도 약간 처연하게 흐트러져 있고…(웃음)

편: 누가 봐도 깊은 사연이 있어 보이는 산발의 머리카락…

들개: 또 당시 일본의 가정답지 않게, 수평적인 토론을 나누었던 집안에서 성장한 요선생님의 유년기도 반영된 것 같아요. 대체로 말풍선 안에 대사량이 많은데, 자신의 감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주인공들이 많이 나옵니다.

편: 우유부단하다고 생각했던 사야코도 사랑하는 건 사람을 차별한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바로 수녀 엔딩을 맞이합니다.

들개: 여성 인권에 누구보다 먼저 눈을 떴지만 또 누구보다 빠르게 꿈이 좌절된 유코도 가슴이 아파요. 겐나이를 볼 때의 아픔과 비슷해요. 그래도 행복한 가정을 꾸렸으니 다행이고요. 유키코도 집안일을 게을리하는 남편 때문에 속이 썩었지만 결국 남편이 밥을 하게 만든 것을 보면 자신의 어머니처럼 협상에 성공한 듯합니다.

수다에 동참해주신 독자분들께 선물한 요선생님의 동인지(편집자 개인소장본)

나와 요시나가 후미

편: 오늘 저와 한 창작자에 대해 깊고 깊은, 별 이야기를 다 나눠주신 들개이빨 작가님께 감사합니다. 이런 북토크는 처음이시죠? 오늘 어떠셨나요?

들개: 이런 북토크는 처음인데 같은 작가를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수다를 떠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이란 걸 처음 알게 됐습니다. 귀한 자리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편: 이번 북토크는 〈라디오스타〉의 질문 방법으로 마무릴 해볼까 해요. 인터뷰집 부제가 ‘만화와 요시나가 후미’거든요. 들개이빨 작가님께 ‘요시나가 후미’란?

들개: 아휴, 이런 질문을(웃음). 저에게 요시나가 후미 작가님은 초밥입니다.

편: 역시나 음식으로 답변하시는 게 너무 좋군요. 왜 초밥인가요?

들개: 제가 정말 좋아하고 평생 즐겁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음식이라서요.

편: 좋습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들개이빨 작가님께 ‘만화’란?

들개: 젓가락질입니다.

편: 이유는요?

들개: 젓가락질을 잘 못하는데, 그래도 용케 먹고살긴 했다!

편: 완벽한 마무리의 답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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