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14일  (No.366)
구체적인 게 항상 좋은 것은 아닙니다

오늘은 월요일이니 정신 부담을 덜기 위해 가벼운 글로 시작하겠습니다. 다음의 글을 읽어보기 바랍니다.

  • 길동이는 자기 친구들을 여러 명 집으로 초대했다. 집에 컵이 부족해서 길동이는 컵을 사러 마트에 갔다.

아주 쉬운 문장이라 상황이 바로 머리에 들어올 겁니다. 그렇다면, 아래의 글은 어떻습니까?

  • 길동이는 친구 10명을 집으로 초대했다. 집에 컵이 7개 뿐이라서 길동이는 3개의 컵을 사러 마트에 갔다.

비슷한 상황의 글이지만, 이번엔 아까보다 글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조금 더 걸렸을 겁니다. 모자란 컵의 수, 마트에서 사야 하는 컵의 수를 계산하는 데 자신도 모르게 신경을 썼기 때문입니다. 이는 심리학 실험으로 밝혀진 사실입니다.


연구에 따르면 정확한 정보를 줄 때보다 모호한 정보를 줄 때 사람들은 뇌의 에너지를 덜 쓴다고 합니다. 에너지를 덜 쓴다는 말은 그만큼 '쉽게' 정보를 받아들인다는 뜻이죠. 그리고 정확한 정보를 접할 때보다는 모호한 정보를 접할 때 그 내용에 별로 비판적이지 않다는 게 실험 결과로 밝혀졌습니다. '상대방이 내 말을 별다른 비판 없이 받아들인다'를 '설득'의 의미로 본다면, 모호하게 정보를 전달해야 설득하기가 더 쉽다는 게 이 연구의 의미입니다.

좀 의아하지 않습니까? 정보를 자세하게 전달해야 상대방을 설득하기가 용이하다는 것을 상식으로 아는 분들은 고개를 갸웃할 이야기인데요, 왜 그럴까요? 인간은 가능한 한 뇌의 에너지를 '적게' 씀으로써 에너지를 보존하는 쪽으로 진화했기 때문입니다.

설득을 위해서라면 항상 상대방에게 정보를 모호하게 줘야 할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 연구에서 우리가 채택해야 할 시사점은 정보를 상세하게 제시할 때와 모호하게 전달할 때를 잘 구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득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가 아닌 것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죠. '정확히 모자란 컵의 수'가 뭐 그리 중요할까요? '컵이 부족해서 마트에 컵을 사러갔다' 정도로 표현해도 충분하죠. 중요한 것은 길동이가 파티를 준비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상대방을 설득하거나 이해시켜야 할 핵심 메시지는 가능한 한 구체적으로 전달하고 그렇지 않은 메시지들은 대략적이고 피상적으로 언급하세요. 독자의 두뇌 에너지를 낭비시키지 않고 핵심 메시지에 집중시켜야 여러분 글의 가독성이 올라갑니다.

제가 몇 명의 실험 참가자를 대상으로 몇 퍼센트의 결과를 얻었다는 식으로 연구 논문의 데이터를 상세히 언급하지 않는 건 다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일기에 '자전거 탄 남자' 사진(위)을 올린 것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참고논문
Mannaioli, G., Ansani, A., Coppola, C., & Lombardi Vallauri, E. (2024). Vagueness as an implicit-encoding persuasive strategy: an experimental approach. Cognitive Processing,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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