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하고 특별한
우리 동네 여성들의 이야기
여덟 명의 작가가 매달 1편의 글을 씁니다.
매주 금요일 2편의 에세이를 보내드립니다.
 쓰다 

장애아 엄마라는 타이틀을 삼십사 년째 복대처럼 차고 산다. 그거 말고도 나를 보여줄 이름이 참 많았는데 어느새 가장 큰 명패가 돼버렸다. 또 평생 다른 이의 삶을 쓰다가 정작 내 이야기는 잊어간다. 나의 이름, 나의 이야기가 사라지기 전, 편히 풀어놓을 좋은 자리를 만났다. 모두에게 고마울 뿐이다. 심지어 인생이 나에게 선사한 고통조차도.


일류 삼강의 파란만장 세상 유람기

일은 순식간에 일어난다. 역사를 새로 쓰는 큰일은 말할 것 없고 개인 삶을 흔드는 작은 사건도 긴 시간을 요구하지 않는다. 지난 6개월 사이 신상에 큰 변화를 겪으며 죽기 전에 어디든 내 이야기를 남겨야겠다고 결심했다. 장애아이 엄마라는 타이틀을 떼고 나를 말하기 어려운 삶을 살았다. 강씨 성 가진 세 명의 남자와 유씨 성을 가진 여자가 함께한 세상 유람을 통해 장애아이를 키우는 가정의 특별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긴 세월 그 평범함을 유지하며 열심히 살아온 나를 엄청 우쭈쭈하는 잘난 척 에세이 되시겠다.

, 셈하지 말고 일단 출~~!

잘 꾸린 짐이 여행을 두 배로 즐겁게 한다

 

원래 여행은 현지를 돌아다닐 때보다 떠나기 전 준비하고, 다녀와서 사진 정리하며 추억을 되새길 때가 진짜라고 했다. 더구나 엄청난 집중을 요구하는, 손 많이 가는 아이를 데리고 떠나는 여행이다 보니 실제 여행지 기억은, 도저히 떠올리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몇 컷 말고 사진이나 틈틈이 기록한 수첩을 들춰봐야 생각날 뿐이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짐도 꼭 필요한 물건들만 꾸려서 가볍게 떠나...는 개뿔~, 두 번째 해외여행의 설렘과 아이에 대한 책임감에 파묻힌 나머지 어마어마한 가방꾸러미를 만들고야 말았다. 아무리 먼 장거리 출장이라도 서류 가방과 기내 카트 하나로 모든 일정을 커버하던 남편은 내가 만들어 놓은 산더미 같은 짐을 보며 “이민 가냐? 칫솔 하나만 있으면 됨. 아니 칫솔도 현지에서 사면 되니까 그냥 몸만 가볍게 떠나.”라고 어이없어했다. 뭘 모르는 소리!

8개월 만삭의 몸으로 둘째를 배에 넣고 떠났던 첫 해외여행은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볶듯이 이뤄졌다. 94년, 파리에서 열린 바이오 관련 엑스포에 참가하는 남편 출장길에 동행했다. 단 하루만 참여하고 돌아오기에는 비행기 삯이 아까워 나간 김에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독일을 5박 6일 일정으로 둘러보기로 했다. 모든 여정을 출장 스케쥴과 맞춰야 해서 이런저런 제한이 있었지만 비행기를 탄다는 사실만으로 몹시 들떴다. 큰아이는 시어머니 손에 맡기고 오랜만에 신혼을 맛보나 싶었는데 처음부터 삐거덕거리기 시작했다. 계획이 전혀 없는 남편과 온갖 시간표와 준비가 철저해야 몸을 움직이는 나는 달라도 너무 다른 종족이었다. ‘칫솔 하나’ 주장만 듣고 그야말로 괴나리봇짐 꾸리듯 대강 꾸려 떠난 첫 기착지에서부터 온갖 불편이 다가왔다. 갑자기 떨어진 단추를 꿰맬 바늘 꾸러미, 여행 내내 거추장스럽던 손 까시래기를 떼어낼 손톱깎이, 샤워 후 귀에 들어간 물을 닦아낼 면봉...아쉬운 물건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때로는 사소한 결핍이 여행의 즐거움이라는 큰 본질을 압도할 때가 있다. 또 짧은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누려야 했던 여행 일정은 한가하게 슈퍼를 돌아다니며 쇼핑할 시간을 내주지 않았다. 일어나자마자 짐을 들고 유레일 패스를 타러 역으로 뛰었고, 그 와중에 몇 해 전 큰 화재로 사라질 뻔한 노트르담 대성당 종탑을 오르고 하이델베르크 성 건너 철학자의 길을 걸었으며 세느강 야간유람선과 융프라우 등산 열차까지 탔으니 일정이 얼마나 빡빡했을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강행군 그 자체였다. 유람선을 타기 전, 기분 내겠다고 사 온 와인을 병째 들고 나발을 불었다가 정작 휘황찬란한 에펠탑이며 퐁뇌프 다리를 지나는데도 보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았다면 말 다한 거지. 물론 나는 아니고. 어쨌든 짐을 제대로 챙기지 않은 값을 톡톡히 치른 생애 첫 번째 여행의 경험은 다음 해 영국여행 때 급기야 이삿짐 수준의 가방을 꾸리게 했다. 갓난쟁이 둘째를 두고 장애가 있는 여섯 살 첫째를 데리고 떠나는 여행이기에 더욱 제대로 짐을 꾸려야 했다. 역시 영국 케임브리지 출장길에 동행했다.

여행이 찾아준 아이의 놀라운 모습에 용기를 얻다

 

첫 해외 여행지로 만난 프랑스 파리와 스위스 인터라켄, 루체른, 그린덴발트,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와 독일 하이델베르크는 떠나기 전 ‘론니 플래닛’을 밑줄 치며 공부했던 보람을 안겨주고도 남을 만큼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요즘이야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쉽게 갈 수 있는 유럽이지만 90년대 초반만 해도 우리나라에 이제 막 해외여행 붐이 일어나기 시작할 때였고 특히 유럽은 비행시간이 워낙 길어 여행지로 선택하기 어려운 지역이었다. 외국인들은 임신 8개월의 몸인데도 등치가 워낙 좋던 나를 그냥 배가 좀 많이 나온 뚱뚱한 여자로 보는 듯했다. 게다가 살찐 사람을 보는 시선이 우리나라처럼 별나지 않아서 정말 편안하게 돌아다녔다. 특히 혼자 파리 지하철을 타고 루브르에 가서 어마어마한 전시물을 보며 “참 골고루 많이도 훔쳐 왔구나!”라며 감탄 반, 욕 반을 섞어가며 구경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비너스와 모나리자는 생각보다 규모가 작아서 실망했고 그럼에도 그 앞에 줄지어서 사진 찍느라 정신없던 동양사람들 때문에 더 실망스러웠다. 어디 가든 재퍼니즈냐고 묻던 당시 유럽인의 인식에는 동양 하면 일본이라는 공식이 박혀있었다. 파리에서 유레일 패스를 타고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독일 일정을 마치고 다시 파리로 돌아와 한국으로 오기 전, 바게트를 우물거리며 마지막으로 걸었던 낙엽에 휩싸인 샹제리제 거리와 그 끝의 개선문도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80일간의 세계 일주처럼 초단기 단타로 치고 빠진 5박 6일간의 첫 유럽 해외여행은 앞으로 진행될 우리 가족의 세계 유랑을 알리는 시보였다.  

큰아이와 떠난 두 번째 여행은 나에게 도전이었다. 아직 어려서 장애가 있음을 먼저 밝힐 필요는 없지만 예상치 못한 돌발행동이 언제 나올지 몰라 모든 신경을 아이에게 둔 채 비행기에 탔다. 열두 시간이 넘는 비행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고민하다가 온갖 장난감에 먹거리 그리고 여차하면 재울 수 있는 멜라토닌까지 챙기고, 타면서 저녁 먹고 바로 잠자리에 들도록 이륙시간을 맞춰 예약했다. 결론은 어찌 됐냐고? 대성공이었다. 일상에서는 알아보기 어렵던 여러 잠재능력을 여행하면서 많이 찾았다. 절대 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일들을 의외로 해냈다. 아예 기회를 줄 엄두조차 내지 않았던 내가 오히려 문제였다. 둘이 구경 다니다가 디카로 엄마를 찍어보라고 했더니 비록 대각선 한구석으로 날아가는 모습으로 나왔지만 가르쳐 주는 대로 카메라를 들고 셔터를 누를 줄 알았다. 제 사진을 찍을 때 눈 맞춤을 하지 않아 제대로 나온 사진이 거의 없는데 여행 와서는 웬일인지 반듯한 자세로, 심지어 포즈를 잡고 렌즈를 똑바로 바라보기까지 했다. 한국에서는 손만 놓으면 마음대로 뛰더니 이곳에서는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다. 물론 먹는 가게가 보이면 홀린 듯 그쪽으로 흐르기도 하지만 오히려 말에 집중하고 시키는 대로 더 잘해서 원래 영국에서 살던 애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대학도시인 케임브리지와 학교 동창이 유학하고 있던 남부의 엑시터를 방문하고 런던 시내를 돌아다녔던 5박 6일간의 영국여행을 기대 이상으로 즐겁게 한 후 큰 용기를 얻었다. 남편은 미팅하느라 케임브리지에 머무는 동안 아이와 둘이 버스를 타고 지방이랑 런던을 투어하며 두려움과 걱정 대신 묘한 해방감과 자신감이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앞으로도 가능하겠구나! 아이와 함께 하는 해외여행이.

2년 뒤에 떠난 미국여행부터 제대로 된 가족여행단의 모습이 꾸려졌다. 다시 2년을 건너 이어진 캐네디언 로키 여행과 다음 해의 미국방문, 이듬해의 스페인과 프랑스, 그 뒤 2년 간격으로 찾아간 요르단과 튀르키예, 아프리카와 중동, 중남미까지 오세아니아 대륙 빼고 세상 땅을 다 밟아본 우리 가족의 천방지축 세계유람은 그렇게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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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심
호기심과 이기심 사이를 오가며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살고 있다. 여성들과 이것저것 '작당모의' 하기와 혼자 '사부작사부작' 도전하는 시간을 즐긴다.  

중년 여성, 트렌드와 줏대 둘 다 잡으면서 나이 들기
몸이 예전 같지 않아 나이 드는 걸 실감한다. 늙는 건 포기를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주변 말에 조급증 나는 에코페미니스트. 더 나이 들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매번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지구와 다른 생명을 떠올리며 하나씩 도전!

기계 좀 다루는 여자

7년 전 카페를 창업했었다. 한숨 나오는 공간이 인테리어 공사로 극적으로 변하는 데에 며칠이면 충분했다. 공사판 먼지가 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입을 벌리고 쳐다봤다. 카페는 제쳐두고 목수 보조로 전향해서 일을 배우고 싶었다. 어느 날 길을 걷다 기술 배우기 욕망과 누군가 목공방에서 가구 만들기 강습이 있다고 했던 이야기가 겹쳐 스파크가 일었다. 그길로 목공방으로 갔다. 식탁과 의자를 직접 만들 수 있냐고 물었다. 기계를 익히려는 본심은 넣어두었다. 덤비는 이미지를 줘서, ‘사고’ 걱정거리를 주고 싶지 않았다. 사장이 수강생을 어찌 대하는지 모르면서 단정 지었고, 목공방에 찾는 사람 대부분은 기계를 대면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을 떠올리지 못했다. 나를 반대하는 사람을 반대하느라 필요 이상으로 신경을 쓰고 있었다.

 

첫날 첫 시간부터 전동드릴이 쥐어졌다. 지레짐작하며 미리 냈던 기우를 돌려받았다. 자동차 액셀과 브레이크 밟듯이 부드럽게 손잡이 방아쇠 스위치를 누르면 된다. 나무가 아니라 손가락이 뚫리면 어쩌나 하는 불안을 누르고 힘을 준다. 천천히 한 것 같은데 확 눌러져서 놀라고, 드릴이 나사 머리를 벗어나서 나무에 흠집을 낸다. 당황했으나 멈추지 않는다. ‘과정일 뿐이야.’ 주문을 외우며 나무에 나사 서른 개쯤 박자 어느 정도 강도로 스위치를 누르면 되는지 감이 온다. 드릴은 예상보다 만만했다.

가구 만들기 과정 중 시간이 가장 많이 드는 건 사포질이다. 나뭇가루를 마시고, 팔뚝 살을 한껏 느끼며 밀고 또 민다. 며칠동안 팔을 쓸 만큼 쓰고 물었다. 센더 한 번 써봐도 되냐고. “대부분의 여자 수강생들은 기계보다 손으로 하는 걸 원했기에 써보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센더 외에 다른 기계도 원하면 얘기하세요.”라고 한다. 센더 진동이 손에 전해져 기계를 놓아도 팔이 떨린다. 진동은 며칠 동안 이어졌다. 전동 드릴은 가구 제작의 필수 공구라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주었던 것이고 다른 기계들은 내 의사 표현에 따라 달라지기에 더는 공구 정복욕을 숨기지 않기로 했다. 다음은 작심이 필요한 원형 톱이다. 원형 톱은 나무가 순식간에 두 동강이 난다. 드릴 잡을 때보다 더한 상상이 되었다. 나대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가르쳐준 대로 맨손으로 손이 톱날 가까이 가지 않도록 천천히 나무를 민다. 단 몇 초 만에 매끈하게 잘린다. 윙 소리도 전혀 시끄럽게 들리지 않는다. 나무에 미안하지만 짜릿하다. 직쏘는 두껍지 않은 나무를 곡선으로 자르는 전기톱이다. 냄비 받침을 만들며 둥근 부분을 밑그림대로 자르려고 무리하게 밀어서 톱날이 두 동강 나며 공중을 날아간다. 영화 장면처럼 누군가 몸에 꽂히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톱날을 망쳐서 미안해하니, “다치지 않으면 괜찮아요. 저도 그런 적이 여러 번이니 겁먹지 말고 계속하세요."라고 알려준다. 괜찮다고 하는데도 완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공구 사용법을 하나씩 익히며 난이도와 관계없이 무섭거나 어렵다는 말은 입 밖에 내지 못했다. 힘이 들어도 티가 나지 않도록 안간힘을 쓴다. 여성은 대부분 기계 다루는 걸 좋아하지 않고, 체력이 남성보다 떨어진다는 말에 모두가 그런 건 아니라고 증명하려 든다. 대표로 선발되지 않았으면서 대표인 듯 오점 없이 잘 해내려는 마음이 배우는 순간을 즐기기 어렵게 해서 한계를 만든다.

인테리어 공사 전부터 도구 자체에 흥미를 갖고 있었다. 여섯 살 어쩌다 내 손에 가위가 들어왔고 두 개의 날이 스치며 종이가 매끈하게 잘리는 걸 봐도 봐도 신기했다. 색종이를 넘어 집에 있는 종이는 가리지 않고 자르려는 마음을 눌러야 했다. 가위질에 집중하면 나를 둘러싼 공기가 진공이 되었다. 가위질 연마가 끝나자 아버지 연장통이 눈에 들어왔다. 경운기 잔고장 수리, 집 지붕 보수, 방수 공사, 페인트칠, 가전제품 수리할 때면 연장통이 등장했다. 만지거나 해볼라치면 “위험하다. 너는 공부나 해라.”라고 했다. 멀리서 구경만 했다. 지금의 공구 정복욕은 가위를 시작으로 한 도구 사용의 재미와 주변 반대에 대한 저항이 함께한다.

연습용 보조 의자를 포함해 식탁과 의자를 만드는 데 오 개월이 걸렸다. 강습료가 포함된 비용은 할인받아도 부담이 되었다. 그래도 가구를 쓰는 내내 기분이 좋다. 동거인들에게 내가 만든 내 가구에 앉아서 밥을 먹을 때 유쾌한 이야기만 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으나 며칠 가지 않았다. 과한 의미 부여로 밥 먹으며 편하게 말할 자신들의 자유를 침해하지 말라고 한다. 동거인들은 만만치 않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기계 좀 다룬 경험은 삼십 년이 넘은 집 잔고장을 반갑게 만들었다. 욕실 문이 칠이 벗겨지고 나무가 떨어지는데 문을 교체하는 데는 큰돈이 드니까 봐도 못 본 척하고 있었다. 목공방에서 얻어온 사포로 매끈하게 문지르고 페인트와 코팅제 바니쉬를 발랐다. 전문가가 한 것처럼 매끈하지는 않으나, 더 이상 물이 튀어 가루가 떨어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욕실 화장실 문손잡이 부품이 부러져서 안에 사람이 몇 번 갇히고 나서, 맥가이버 배경음악을 마음속으로 깔며 내가 나선다. 교체한 후 잘 되나 문을 잠그고 여는 나는 집수리를 전담하던 기억 속의 아버지와 겹친다.

변기 백시멘트가 떨어져 앉을 때마다 덜거덕거린다. 조심해서 앉으면서 사람을 불러야 하나 하다 직접 해보기로 한다. 유튜브에 올려진 영상을 보며 드라이버로 긁어내고 잘 갠 백시멘트를 바르고 물 묻힌 스펀지로 말끔하게 닦아낸다. 떨어지지 말라고 두껍게 바른 것 말고는 나무랄 데 없다. 내 손길이 닿는 것에는 너그러운 경향이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식탁 세트를 만들었다고 뭐든 다 고치지는 못한다. 수전 교체는 물난리가 두려워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고, 두 번째 문손잡이를 바꾸면서는 경비실에서 빌려온 드릴 소모품 하나를 부러뜨려 변상해야 했다. 그래서 “사람 불러라.”라고 말하나 보다. 실전 경험이 부족해서 녹슬고, 좁은 공간에서는 도구를 어찌 써야 할지 잘 모른다. 가진 공구는 드라이버, 망치, 줄자뿐이니 고장이 나서 고치려면 주민자치센터나 관리실에서 적당한 공구를 빌려야 한다. 무엇보다 변수가 많은 현장에서는 가구를 만들며 배운 공구 사용 기술은 책으로 배운 걸로 다 안다고 판단하는 것과 맞먹는 오류다. 더 많은 기회를 만들며 발전시켜야 한다. 일이지만 도전정신이 이는 것은 부족하더라도 내 손으로 공간을 고치고 세우는 건 눈길이 갈 때마다 ‘나’라는 회사에 애사심을 증폭시키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지어주고 만들어 준 그대로 사는 수동적인 사람에서 삶에 적극적으로 임한다는 생각에 뿌듯하다. 가능한 삶의 많은 것을 스스로 힘으로 해내려고 한다. 돈이나 기계, 다른 사람의 힘은 내가 못 할 때 잘 요청하고 할 수 있는 것들을 늘어나길 바란다. 그래서 집을 짓지 않아도 기술은 진도를 더 나가려고 동부기술교육원 홈페이지의 목공 과정이나 집수리 과정을 들락날락한다. 진공상태로 다시 나를 보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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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어오르다 by 몽실몽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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