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신학자
#93 장 칼뱅, 제네바로 가느니 차라리 죽겠습니다
#94 시몬 베유, 신을 기다리며
#95 장 칼뱅, 새로 온 목사님과 다투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96 슐라이어마허는 예수를 사랑했다.

독자님, 안녕하세요.

하늘샘입니다.

 

<오만과 편견>에서 제인 오스틴은 다아시와 엘리자베스의 목소리를 빌려 인간의 자만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고리를 어떻게 끊어버릴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엘리자베스는 다아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다아시의 오만을 쉽게 용서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의 오만이 저의 자만을 거세게 억눌러 버리지만 않았더라면 말이죠.”

 

누구나 그렇습니다. 상대의 오만이 나의 자아를 억압할 때, 그 관계는 깨어집니다. 나의 오만이 상대의 자아를 집어삼킬 때, 그 사이는 틀어집니다. <오만과 편견>이 200년이 넘도록 사랑 받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제인 오스틴이 인간 존재의 본질을 꿰뚫었기 때문이지요. 달리 말해, 인생의 고난은 결국 관계에서 나오는 고통에서 비롯되고, 그 고통은 결국 오만이라는 알을 깨고 나와 탄생합니다.

 

신자에게도 관계가 주는 어려움은 예외가 아닙니다. 아니, 어쩌면 오만은 교인에게 더 무거운 유혹이나 짐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주님의 선택 받은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백성이라는 칭호가 주는 무게로 어깨가 으쓱해지기 쉽습니다. 나야말로 주님의 편에 섰다며 목에 힘을 주게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달콤한 충동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요? 칼뱅의 편지를 보며 함께 씨름해보기를 원합니다.

#95 새로 온 목사님과 다투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1539년 6월, 스트라스부르에서 칼뱅은 제네바 교회에게 편지를 한 통 씁니다. 시작은 평범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비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성령님의 소통을 통해 여러분 가운데 충만히 넘쳐나기를 기도합니다.”

은혜롭게 편지를 시작한 칼뱅은, 바로 슬픈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제가 가장 사랑하는 지체님들께 말씀드립니다. 이미 제네바 교회가 슬픔 가운데 산산조각났습니다. 이미 교회가 완전히 뒤집힌 바닥입니다. 그런데 그 상황 속에서 저를 대신하여 새롭게 오신 목사님들과 여러분이 싸우고 다투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는 제 인생 가장 큰 슬픔을 경험했습니다. … 이 비극적인 상황은 제가 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씁쓸합니다. 제네바 교회는 지금 공개적으로 갈가리 찢어졌을 뿐 아니라, 교회 사역이 비난과 경멸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습니다. 이는 무한히 중요한 일입니다.”

아름다운 축복으로 시작했던 편지가 완전히 틀어졌습니다. 칼뱅이 제네바를 떠난 후, 교회는 이미 분열을 겪기 시작했습니다. 그 상황부터 이미 잔인할 정도로 처참합니다. 하지만 교회가 칼뱅을 쫓아낸 후 새로이 부른 목회자들과 다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칼뱅은 더 큰 비참함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칼뱅은 이 사안을 보며,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귀한 사역이 경멸에 노출되었다고 하지요.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핵심이 땅에 떨어져 버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칼뱅은 소망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은 듯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지금이 주님께서 교회를 다시 세우기 위해 주신 가장 바람직하고 적절한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파렐과 제가 보기에 여러분이 새로운 목회자 및 이웃 교회와 화해하기 위해 온전히 노력하고 있지 않다고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충분하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여러분이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로 영혼이 더욱 안정을 찾았다고, 더욱 침착해졌다고 믿습니다. 제가 지금 편지를 쓰는 지금이라면, 저의 유일한 목적이 여러분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데 있음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실 줄 믿습니다.”

칼뱅은 제네바 교회에서 일어났었고 또 일어나고 있는 비극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더불어 여전히 본인이 기대하는 만큼의 화해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소망을 가지며 전진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면 그 “올바른 길”은 무엇이라고 할까요?

“특별히 여러분에게 제가 간청드립니다. 성숙한 마음으로 헤아리셔야 합니다. 각 사람이 받아야 할 존경심을 버려두십시오. 그 사람이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인지는 그만 걱정하십시오. 대신, 주님이 그들을 어떻게 보시는지에 집중하십시오. 주님께서 당신의 교회의 목회자로 세운 사람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지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선포되는 말씀을 두렵고 떨림으로 순종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지만 나아가 말씀을 맡은 사역자 역시 적절히 대우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제네바 교회 교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자세를 견지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칼뱅의 태도를 보고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네바 교인 중 일부는 새로운 목회자를 인간적인 관점으로 평가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점이 모자라고, 저런 점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겠지요. 하지만 칼뱅은 사람의 기준으로 보아선 안 된다고 했습니다. 정반대로, 하나님의 시선으로 그들을 보아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너무나 조심스러운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사람답지 않은 목회자가 많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았다고 해서 “하나님이 세우셨으니 순종하라”는 이야기는 결코 주님이 원하시는 방식이 아닐 것입니다. 칼뱅도 도덕적으로 타락한 목회자를 용서해도 된다는 식의 논리를 펼치고 있지는 않은 듯합니다. 정확히 사정을 알 수 없지만, 칼뱅이 보기에 지극히 인간적인 단점을 근거로 목회자를 배격하는 무리가 있었고, 거기에 대해 조심스레 설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합당한 목회자라면,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칼뱅은 목회자를 향한 성도의 의무만을 강조하지는 않습니다. 정반대입니다.

“아울러 저는 그 목회자들에게는 정반대의 가르침을 전할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목사가 어떤 일을 얼마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치겠지요.”

이렇게 말하는 칼뱅의 근거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칼뱅이 갖고 있던 신학의 골수를 만날 수 있습니다.

“참된 진리를 나누고자 합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자신만의 의무를 인지하고 이행해야 합니다. 목사든 아니든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라면 모두 자신을 향한 타인의 의무보다는, 타인을 향한 자신의 의무를 먼저 생각해야만 합니다.”

칼뱅은 목회자가 아닌 교인에게 목사를 향한 의무를 먼저 생각하라고 권합니다. 동시에 목회자에게는 자신의 권위나 주장이나 자격보다는 성도를 향한 책무를 우선으로 고려하라고 명합니다. 하나님 나라 시민이라면, 자신의 의무를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나를 향한 타인의 책무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다음 순서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목사의 의무에 대해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목사는 자신의 권위로 하나님께서 다른 교인에게 직접 주신 권리를 결코 박탈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모든 목회자는 심사와 평가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목회자를 바른 목자로 검증하는 과정이 있어야 악인이 아닌 사람에게 바르게 교회를 맡길 수 있으며,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양의 탈을 쓴 늑대로부터 교회를 지킬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칼뱅은 “하나님이 목사를 부르셨으니 목회자는 마음대로 해도 된다”라는 주장과는 아주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성도에게는 주님의 법도를 따르는 목사라면 인간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어도 존중해야 할 의무가 있지만, 목사에게는 교인의 권리를 보호할, 심사와 평가를 받을, 검증 과정을 거칠 책무가 있다고 합니다. 서로를 돌아보고 돌보며 지켜줄 상호 책임을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정말 중요한 교리나 도덕에 있어 충돌이 생겼을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칼뱅은 이렇게 조언합니다.

“만일 어떤 신자가 타인의 교리나 도덕에 있어 이런 문제나 저런 문제가 있다고 대답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여러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가장 먼저 이렇게 하기를 간청합니다. 그 사안을 놓고 마음을 다해 신중하게 숙고할 수 있는 만큼 숙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결코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근거는 간단합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에 대해 자선의 빚, 자비의 부채를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타인을 향한 조급한 비난은 자제해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타인을 대할 때 최대한 관용과 정의를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칼뱅은 교인이 목사의 문제를 눈감아 주어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신자가 다른 신자의 죄를 무조건 숨겨 주어야 한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죄인을 찾아다니며 즉각 비판하고 교정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제3의 길을 역설합니다. 서로를 향해 최대한 자비를 베풀며 깊이 고민해야 하지만, 동시에 죄를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고 단언합니다.

마지막으로 칼뱅은 자신의 이 모든 권면을 어떤 거대한 반석을 기초로 삼아 그 위에 세울 수 있었는지 설명합니다.

“자, 그러므로 제가 가장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능력 가운데 탄원하고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사람에게서 돌이키십시오. 그 시선을 유일무이하신 구원자께로 돌리십시오. 그분만을 의지하십시오. 마지막으로 간청합니다. 주님의 거룩한 명령에 우리가 얼마나 전적으로 복종해야 하는지, 우리가 어떻게 그분께 온전히 매여 있는지를 묵상하십시오!”

칼뱅은 지금까지 참 많은 부분을 다루었습니다. 교회의 분열을 슬퍼하며, 제네바 교회 교인들에게 새로운 목회자를 자비의 눈길로 바라보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고, 신자라면 자신을 향한 타인의 의무보다 타인을 향한 자신의 의무에 주목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설사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심사숙고하기를 권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소중하고 고귀한 의무가 예수 그리스도, 그 단 한 분으로부터 흘러나온다고 역설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두가 그리스도께 온전히 묶여 있습니다. 존재 자체가 그리스도께 빚으로 존재합니다. 신자는 주님의 소유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리스도의 능력 가운데 주님만 바라보아야 하고, 그분의 숭고한 천명에 철저히 순종해야 합니다. 이는 목사든 아니든 상관없이 모든 성도가 서로에게 지고 있는 존재적, 운명적 부채입니다.

우리 인생은 <오만과 편견>에서 나오는 세상살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터질듯 빵빵한 자만으로 서로를 대합니다. 거기서 관계가 부서지고 깨어지지요. 오늘 칼뱅의 목소리에서 혜안을 봅니다. 오만을 버리고 내가 타인에게 무엇을 빚졌는지를 생각하는, 우리 삶을 통째로 소유하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숭엄한 그 길을 봅니다.

독자님과 소통하며 함께 <이달의 신학자>를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오늘의 뉴스레터를 어떻게 읽으셨는지 독자님의 생각과 하늘샘 선생님에게 하고 싶은 말을 보내 주세요.

복 있는 사람
hismessage@naver.com
서울시 마포구 성미산로 23길 26-6
수신거부 Unsubscribe
친구와 함께 읽기💌(구독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