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찾아서》를 읽고 쓴 ‘교회를 찾아서’와 거의 상관없는 이야기
2024년 1월 첫째 주: 1호
안녕하세요. 정민호 에디터입니다.

2024년 첫 뉴스레터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저는 매년 버킷리스트를 쓰면서 한 해를 시작합니다. 기대를 품고 이런저런 내용을 쓰지만, 하루하루 바쁘게 살다 보니 연말이 닥쳐야 한 해의 소망을 들추어 보게 되는데요. 다 잊고 지낸 듯해도 막상 확인해보면 제 예상보다 실행에 옮긴 일이 많더라고요. 몇 번 비슷한 경험을 한 뒤부터는,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뭐든지 겁 없이 버킷리스트에 추가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너무나 이상적인 바람 같아서 멀리 있는 꿈처럼 보이는 올해의 10가지 리스트 중 마지막이 뭔지 아세요? ‘〈서사의 서사〉 1년 동안 발행하기’랍니다.

12월까지 잘하고 싶은데, 첫 번째 뉴스레터 준비부터 위기였습니다. 연초에 할 일이 어찌나 많고, 정신이 없는지… 참 바빴습니다. (저 원래 바쁘다는 얘기 잘 안 해요. 정말입니다😅) 하려는 일이 많을수록, 그 꿈이 클수록 위기는 자주, 크게 오는 법인가 봅니다. 그래도 때가 되면 무심히 밝아오는 창문 밖의 하늘처럼(이른 아침에 창문 앞에서 이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일주일 1회 발행의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서사의 서사〉 첫 번째 에피소드는 정다운 번역가님의 이야기입니다. 레이첼 헬드 에반스의 《교회를 찾아서》를 읽고 나서 쓰게 된 글이라고 하는데요. 모태신앙이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교회 생활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고, 그럼에도 교회를 영영 떠나지는 않았던 한 사람의 진솔한 고백입니다. 《교회를 찾아서》라는 책 제목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교회의 의미를 찾아가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교회를 찾아서》를 읽고 쓴 ‘교회를 찾아서’와 거의 상관없는 이야기

정다운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는 아니었다. 내가 다녔던 교회는 나에게 커다란 상처를 입히거나 심한 모욕을 가하지 않았다. 나를 사랑하고 내게 너그러웠던 교회를 떠난 이유는 더는 내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척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노력을 해도 ‘제1항에 찬성을!’이라는 글씨 아래 손을 잡고 웃는 여인이 될 수 없었다. 아니, 되기 싫었다.

―레이첼 헬드 에반스 《교회를 찾아서》


레이첼과 달리 나는, 교회를 떠날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건 어쩌면 내가 이미 교회를 너무 자주 떠났기 때문인 것 같다. 집안 형편상 한 교회에 오래 다닐 수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고, 학교도 교회도 늘 자주 옮겨 다녀야 했다. 그래서 나에게는 특정 지역교회를 ‘교회’ 전체와 동일시하는 일이 애초에 불가능했다. 그랬던 시절이 없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어린 시절 나는 이른바 ‘교회 생활’에는 잘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였다. 본래 낯을 많이 가리는 데다, 새 신자에서 좀 벗어날 만하면 교회를 떠나야 했기에 그 교회 터줏대감이었던 아이들이랑 잘 섞이지 못한 채로 겉돌다 교회를 옮겨야 했다. 아예 ‘전도’ 대상이거나 제대로 된 ‘새 신자’였다면 좀 달랐을 텐데 엄마 아빠가 교회를 다니는, 신경 안 써도 교회에 나오는 아이라 선생님들한테도 관심 순위에서 밀렸지 싶다. 엄마 아빠가 교회의 대단한 중직도 아니고, 그렇다고 교회라는 곳이 아예 처음인 ‘새 신자’도 아닌 어정쩡한 아이, 어린 시절 교회에서 나의 자리는 늘 그렇게 어정쩡했다.

굳이 비교하자면 교회보다는 학교에 적응하기가 쉬웠다. 학교가 새로운 사람에게 좀 더 개방적이었달까. 어느 교회를 가든 교회에는 주류인 아이들이 따로 있었다. 대개는 어릴 때부터 그 교회에 다닌 아이들로 이루어진 무리였고, 그 아이들에게 전도를 받았거나, 신앙이 뜨겁거나 그런 아이들이 무리에 포함되었다. 그 주류를 제외한 나머지는 교회 활동에 그리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어쩌면 참여를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아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에 비해 학교는 1년마다 반이 바뀌면서 친구들을 다 같이 새로 사귀는 환경이었고, 아마도 그런 탓에 (적어도 내 경험 안에서는) 교회에 비해서는 새로운 사람들에게 개방적이었다. 매일 가서 하루에 몇 시간을 같이 있으니 저절로 친구 되기가 더 쉬웠을지도 모른다.

설상가상으로 (악기를 다룬다거나, 율동을 잘한다거나, 노래를 잘하는 것과 같은) 교회에 유용한 능력이 나에게는 없었다. 이래저래 교회에서 나는 늘 이방인 같은 아이였다. 좀 특이한 점은 내가 이에 관해 문제의식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는 거다. 교회는 그냥 그렇게 다니면 되는 줄 알았다. 애초에 교회에서 맺은 인간관계에서 좋은 경험을 한 일이 없으니, 교회에 그다지 기대가 없었고, 그래서 실망도 없었다.

그렇지만 어디로 이사를 하든 교회는 꾸준히 나갔고 왜 그런지 어린 시절부터 (돌이켜 보면 어린 시절 삶에서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도 않았던) 교회에 관심이 많았다. 교회에서 부르는 노래, 거기에 있는 사람들, 교회에서 하는 이야기들을 늘 유심히 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성경이나 교회에서 하는 이야기들을 잘 믿는, 이른바 ‘신앙 좋은 신동’들을 많이 봤는데 나는 그런 부류는 아니었다. 주로 교회에서 하는 이야기들이 이해가 잘 안됐고, 그걸 저렇게 잘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때때로 거의 존경했다.) 덧붙이자면 어떻게 저런 걸 믿나 하는 삐딱한 시선은 아니었다. 그냥 신기했고, 뭔가 내가 모르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았고, ‘저런 말을 어떻게 믿나, 저건 무슨 말인가’ 알고 싶었다.

그러니까 나는 교회에 다니지만 깊게 소속되지는 않은 채로 오랜 시간을 보냈다. 이게 모태신앙치고는 꽤 특이한 이력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교회에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교회에서 하는 이야기를 잘 믿지도 못하는데, 왜 교회를 떠날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워낙 여러 곳을 다니다 보니 한심한 공동체의 모습도 많이 봤는데. (내성적인 내 성격으로는) 학교보다 적응하기 어려운 교회의 모습에 어느 순간 서운해질 수도 있었을 텐데.

아마 일차적으로는 누구 말마따나 나를 붙드는 손이 있었던 것이겠고, 내 편에서의 이유를 찾자면 내게 ‘그런’ 기대가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교회에서 인정이나 사랑을 받고 싶었다면 진작 내게 그것을 주지 않는 교회에 실망하고 떠났을 텐데, 내 관심이 거기에 없었다. 왜 그런지 나는 어릴 적부터 교회에서 하는 이야기들(신앙고백)에 주로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신앙의 내용들에 대한 그 강렬한 호기심이 실은 그분이 나를 부르시고 붙드시는 손길이었다는 걸.

그러니까 교회에 대한 마음이 복잡해진 것은 그렇게 교회 생활을 했던 어린 시절이 한참 지나고 나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엄청난 사실을 고백하게 되고 나서. 교회에 대한 꿈과 기대가 생기고 난 후부터였다. 뒤늦게 어린 시절 나의 교회 생활을 되돌아보며 나는 의아해졌다. 어린 시절 수줍은 나에게, 교회 근처만 맴도는 나에게도, 교회에 다니지만 신앙에 대해 잘 모르는 나에게도 교회가 손을 내밀어 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실은 나에게도 교회가 필요했다. 내게도 그렇게 교회 근처만 맴도는 나를 알아주는 눈이, 교회 안으로 나를 깊숙이 끌어 당겨주는 손이, 내 많은 질문을 들어주는 귀가 필요했다. 어린 시절 교회에서의 따뜻한 추억 같은 것이 필요했다.

나는 그 길로 교회를 영영 떠나지는 않았고, (고백하기는) 가장 알맞은 때 교회를 통한 사랑을 경험했지만, 내가 마침내 경험했으니 그만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입시를 위한 전쟁터 같은, 공부를 잘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인 학교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누군가에게는 더 닫힌 공동체가 되곤 하는 것. 서로 이해타산이 맞는 선까지는 서로를 돕기도 하는 직장보다 더 같이 일하기 힘든 비상식이 출현하는 곳, 옳고 그름의 가르마를 타느라 여념이 없어 가장 약하고 어려운 순간에 처한 이들을 받아줄 너른 품이 없는 곳. 교회가 종종 그렇게 전혀 인식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를 교회 밖으로 밀어내고 있는 것을 교회는 정말로 ‘의식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별 악의 없이 무신경하게, 어쩌면 때로는 의협심까지 가지고 했던 교회 ‘주류’들의 말과 행동에 교회 밖으로 밀려난 많은 사람을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선 어정쩡한 자리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늘 잘 보였다. 어떤 이유에선지 결국 교회를 통해 큰 사랑을 경험하고 이렇게 교회에 남았지만, 감사한 마음 아래로 늘 흐르는 물음표가 있었다. 왜 내가 교회를 떠나게 두시지 않았을까. 나는 감히 바라지도 않았던, 어떤 사람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사랑이 왜 내게는 주어졌을까. 교회가 모두에게 그런 곳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랑은 무거운 부채감으로 남았다.

어디에나 큰 사람이 있고 작은 사람이 있고, 촉망받는 사람이 있고 무시당하는 사람이 있으며, 주류가 있고 비주류가 있다. 작은 사람은 종종 자신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말할 목소리조차 갖지 못한다. 사노라면 누구나 그런 현실을 경험한다. 주로는 내가 ‘작은’ 사람 쪽에 속하게 될 때 더 처절하게 그 현실을 겪는다. 교회도 이 경험에서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교회 이야기의 끝은 아니다. 아니어야 한다. 그것이 끝이었다면, 2천 년 교회 역사는 진작 종결되었을 것이다. 교회가 행한 많은 부끄러운 일들, 신앙의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들이 결국 교회를 멸망시키고 말 것 같던 순간에도,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곳에서 가장 작은 사람 곁으로 다가가 그 짐을 나눠서 지려 했던 한 사람, 두 사람, 한 교회, 두 교회가 있었고 그 사랑이 전해져 오늘 우리가 여기에 있게 되었다. ‘교회는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구성원을 위해 존재하는 유일한 조직’이라는 윌리엄 템플의 말은 때로 우리 교회의 현실과 동떨어진 터무니없는 이상 같지만, 나는 그런 교회로 살아가는 어느 한 사람, 그런 어느 한 사랑으로 인해 결국 교회에 남게 되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교는 혁명을 여러 차례 겪었고, 매번 혁명이 일어날 때마다 죽음을 맞이했다. 그렇게, 그리스도교는 죽고 다시 살아나기를 반복했다. 그들에게는 무덤에서 나오는 법을 잘 아시는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G.K. 체스터턴(《교회를 찾아서》에서 재인용)


정다운

낮에는 회사에 다니고 밤에는 번역을 한다. 서로 다른 두 언어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에 관심이 있다.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 《십자가》 《신학자의 기도》 《기억하라, 네가 누구인지를》 《오라, 주님의 식탁으로》 등을 옮겼다. 팟캐스트 〈슬기로운 독서생활〉에 참여하고 있다. 〈복음과상황〉에 ‘질문의 시간: ‘사이’에서 묻다’를 연재하고 있다.



작은 사람을 만나 생긴 일들
이한주
  


UFC 헤비급 챔피언에게는 누구나 친절하다. 어떤 사람의 폭력성이 드러나는 건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만났을 때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는 것도 크고 강한 사람이 아니라 나보다 작고 약한 사람을 만났을 때다. 숨겨놓았던 좋은 것과 나쁜 것, 흐릿했던 선과 악이 마음에 떠오르고 행동으로 드러나는 건 타인을 내려다보며 힘을 사용할 수 있을 때다.


프티-제르베를 만났을 때 장 발장은 언제든 가해자가 될 수 있는 불쌍한 자기 모습을 보았고, 어린아이를 만났을 때 자살하려던 남자는 자기에게 남아있던 삶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빌 펄롱이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낸 것은 갇혀있는 어린 소녀를 만났기 때문이다. 이들은 작고 약한 사람을 만났고 이 만남을 통해 기독교인의 삶을 깨달았다. 예수님께서도 그분을 왕으로 만나는 때는 지극히 작은 자들을 만날 때고, 그들에게 한 것이 곧 그분에게 한 것이라 하셨다. 새해에는 작고 약한 사람들을 더 자주 만나고 힘을 보탤 수 있기를, 그 만남이 새로운 사건을 만들고 그 전과 다른 삶으로 나를 이끌 수 있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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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명의 구독자님이 〈서사의 서사〉를 응원하며 피드백을 남겨 주셨습니다. 사진은 보내주신 피드백을 확인하고 감동한 제 모습이고요😭 보내주신 의견들을 잘 반영해서 더 나은 콘텐츠로 보답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피드백 부탁드려요. 보내주신 의견 중 몇 개를 공유해봅니다.

🗣️ ‘서사의 서사’ 시작을 응원합니다 :) 수많은 책이 쏟아져 나오고 수많은 독서 모임이 생겨나는 요즘, 특히 기독교책에서 한 권의 책을 조명하여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지면이 생겼다는 사실이 즐겁네요. 읽어보지 못한 책들을 이야기하는 다양한 시선과 목소리에 저도 덩달아 들떠서 한 번 더 책을 찾아서 들춰보게 될 것이 기대됩니다.


🗣️ 수년 전에 복음과상황에서 책을 읽은 후에 모여서 토론하는 모임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책 읽기 모임을 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책은 하나지만 책 읽는 사람은 제각각이더군요. '서사의 서사' 이메일을 받고 그 시절 생각이 났습니다. 서사의 서사가 책 이야기를 하겠지만, 분명히 그 속에 책 읽는 사람의 이야기가 함께할 거라는 걸 알기에 더욱 기대됩니다.


🗣️ 한 책, 한 저자 이면에 있는 잘 알지 못했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


🗣️ 서사의 서사, 재미진, 흥미진, 유익진 이야기의 웹진. 기대합니다. ^^


🗣️ 다소 무거운 신학책과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책들 사이 어딘가 교양 있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책과 작가들에 대해 알아가고 싶습니다.


🗣️ 아무래도 관심이 가는 건 '비화', '뒷이야기'입니다. 뭐랄까 본격 소개, 진중한 덕질(?) 외에 가벼운 이야기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혹은 가볍긴 하나 쉬 얘기하기 힘든 이야기 같은 거요. 예를 들면... '내가 버린 책 이야기' 같은 거요. 어떤 면에서는 디스가 될 수 있기에 최대한 추상적인 표현과 이니셜 표기 등으로 이야기해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습니다. 책을 버리는 데에는 각자의 이유가 있겠죠? 저자에 대한 배신감(?)이든, 아니면 저자가 안내하는 곳 이상으로 넘어가고 싶은 졸업의 심정이든...오늘날 여전히 기독교 책을 읽고 덕질하는 사람들은 그 안에서 무언가 새로운 길을 모색하거나 자신이 있는 위치를 파악하려는 사람이겠죠. 그런 사람들이 '나 혼자가 아니다'라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로와 재미일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책과 함께 살아가는 '덕후'들을 소개해 주신다니 기대가 됩니다. 저같이 소소하게 기독교 책 덕질은 하고 있으나 그닥 생산은 못하는 '프로 소비자'의 입장에선 이런 콘텐츠가 너무 반갑습니다. 응원하는 마음으로 구독 시작하겠습니다.


🗣️ 뉴스레터를 시작하신 용기를 응원합니다. 1호가 기대됩니다. 복상이 복음과 상황을 연결하려는 노력이었다면 서사의 서사는 책과 작가의 상황을 연결하는 노력이면 좋겠습니다. 모든 책들은 작가가 처한 상황에서 출발하였을 텐데, 그 상황의 이야기를 좀 더 깊이 듣고 싶습니다.


🗣️ 복상이 발행하는 책의 이야기라니, 너무나 기대되네요. 출판사들의 이야기, 편집자, 디자이너, 인쇄소 직원 이야기도 다뤄주시면 어떨까 제안해봅니다.


이런 문의를 남긴 분도 계셨어요.


🗣️ 저는 보면서 궁금한 점이 생겼는데요. 기존에 복상에서 발송하셨던 메일은 이제 서사의 서사로 대체되는 건지, 아니면 별개인지 궁금했어요. 그리고 지금은 0호라서 그런지 복상의 기사를 옮겨온 느낌 정도로 보이는데, 추후 어떤 방식으로 달라지는 건지 궁금해졌어요.


복음과상황에서 잡지를 발행할 때마다 발송하던 메일은 그대로 발송됩니다. 그리고 〈서사의 서사〉는 한동안 기존 복음과상황의 뉴스레터를 받아보시던 분들과 〈서사의 서사〉를 새로 구독해주신 분들에게 발송될 예정이에요. 〈서사의 서사〉도 복상에서 발행하는 뉴스레터입니다만, 콘텐츠가 어느 정도 쌓이고 나면 구독자를 분리하여 발송하려 합니다. 추후에는 〈서사의 서사〉 구독을 신청해주신 분들에게만 〈서사의 서사〉를 발송하려는 계획입니다. (다시 안내를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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