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첼 헬드 에반스 《교회를 찾아서》
레이첼과 달리 나는, 교회를 떠날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건 어쩌면 내가 이미 교회를 너무 자주 떠났기 때문인 것 같다. 집안 형편상 한 교회에 오래 다닐 수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고, 학교도 교회도 늘 자주 옮겨 다녀야 했다. 그래서 나에게는 특정 지역교회를 ‘교회’ 전체와 동일시하는 일이 애초에 불가능했다. 그랬던 시절이 없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어린 시절 나는 이른바 ‘교회 생활’에는 잘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였다. 본래 낯을 많이 가리는 데다, 새 신자에서 좀 벗어날 만하면 교회를 떠나야 했기에 그 교회 터줏대감이었던 아이들이랑 잘 섞이지 못한 채로 겉돌다 교회를 옮겨야 했다. 아예 ‘전도’ 대상이거나 제대로 된 ‘새 신자’였다면 좀 달랐을 텐데 엄마 아빠가 교회를 다니는, 신경 안 써도 교회에 나오는 아이라 선생님들한테도 관심 순위에서 밀렸지 싶다. 엄마 아빠가 교회의 대단한 중직도 아니고, 그렇다고 교회라는 곳이 아예 처음인 ‘새 신자’도 아닌 어정쩡한 아이, 어린 시절 교회에서 나의 자리는 늘 그렇게 어정쩡했다.
굳이 비교하자면 교회보다는 학교에 적응하기가 쉬웠다. 학교가 새로운 사람에게 좀 더 개방적이었달까. 어느 교회를 가든 교회에는 주류인 아이들이 따로 있었다. 대개는 어릴 때부터 그 교회에 다닌 아이들로 이루어진 무리였고, 그 아이들에게 전도를 받았거나, 신앙이 뜨겁거나 그런 아이들이 무리에 포함되었다. 그 주류를 제외한 나머지는 교회 활동에 그리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어쩌면 참여를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아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에 비해 학교는 1년마다 반이 바뀌면서 친구들을 다 같이 새로 사귀는 환경이었고, 아마도 그런 탓에 (적어도 내 경험 안에서는) 교회에 비해서는 새로운 사람들에게 개방적이었다. 매일 가서 하루에 몇 시간을 같이 있으니 저절로 친구 되기가 더 쉬웠을지도 모른다.
설상가상으로 (악기를 다룬다거나, 율동을 잘한다거나, 노래를 잘하는 것과 같은) 교회에 유용한 능력이 나에게는 없었다. 이래저래 교회에서 나는 늘 이방인 같은 아이였다. 좀 특이한 점은 내가 이에 관해 문제의식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는 거다. 교회는 그냥 그렇게 다니면 되는 줄 알았다. 애초에 교회에서 맺은 인간관계에서 좋은 경험을 한 일이 없으니, 교회에 그다지 기대가 없었고, 그래서 실망도 없었다.
그렇지만 어디로 이사를 하든 교회는 꾸준히 나갔고 왜 그런지 어린 시절부터 (돌이켜 보면 어린 시절 삶에서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도 않았던) 교회에 관심이 많았다. 교회에서 부르는 노래, 거기에 있는 사람들, 교회에서 하는 이야기들을 늘 유심히 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성경이나 교회에서 하는 이야기들을 잘 믿는, 이른바 ‘신앙 좋은 신동’들을 많이 봤는데 나는 그런 부류는 아니었다. 주로 교회에서 하는 이야기들이 이해가 잘 안됐고, 그걸 저렇게 잘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때때로 거의 존경했다.) 덧붙이자면 어떻게 저런 걸 믿나 하는 삐딱한 시선은 아니었다. 그냥 신기했고, 뭔가 내가 모르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았고, ‘저런 말을 어떻게 믿나, 저건 무슨 말인가’ 알고 싶었다.
그러니까 나는 교회에 다니지만 깊게 소속되지는 않은 채로 오랜 시간을 보냈다. 이게 모태신앙치고는 꽤 특이한 이력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교회에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교회에서 하는 이야기를 잘 믿지도 못하는데, 왜 교회를 떠날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워낙 여러 곳을 다니다 보니 한심한 공동체의 모습도 많이 봤는데. (내성적인 내 성격으로는) 학교보다 적응하기 어려운 교회의 모습에 어느 순간 서운해질 수도 있었을 텐데.
아마 일차적으로는 누구 말마따나 나를 붙드는 손이 있었던 것이겠고, 내 편에서의 이유를 찾자면 내게 ‘그런’ 기대가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교회에서 인정이나 사랑을 받고 싶었다면 진작 내게 그것을 주지 않는 교회에 실망하고 떠났을 텐데, 내 관심이 거기에 없었다. 왜 그런지 나는 어릴 적부터 교회에서 하는 이야기들(신앙고백)에 주로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신앙의 내용들에 대한 그 강렬한 호기심이 실은 그분이 나를 부르시고 붙드시는 손길이었다는 걸.
그러니까 교회에 대한 마음이 복잡해진 것은 그렇게 교회 생활을 했던 어린 시절이 한참 지나고 나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엄청난 사실을 고백하게 되고 나서. 교회에 대한 꿈과 기대가 생기고 난 후부터였다. 뒤늦게 어린 시절 나의 교회 생활을 되돌아보며 나는 의아해졌다. 어린 시절 수줍은 나에게, 교회 근처만 맴도는 나에게도, 교회에 다니지만 신앙에 대해 잘 모르는 나에게도 교회가 손을 내밀어 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실은 나에게도 교회가 필요했다. 내게도 그렇게 교회 근처만 맴도는 나를 알아주는 눈이, 교회 안으로 나를 깊숙이 끌어 당겨주는 손이, 내 많은 질문을 들어주는 귀가 필요했다. 어린 시절 교회에서의 따뜻한 추억 같은 것이 필요했다.
나는 그 길로 교회를 영영 떠나지는 않았고, (고백하기는) 가장 알맞은 때 교회를 통한 사랑을 경험했지만, 내가 마침내 경험했으니 그만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입시를 위한 전쟁터 같은, 공부를 잘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인 학교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누군가에게는 더 닫힌 공동체가 되곤 하는 것. 서로 이해타산이 맞는 선까지는 서로를 돕기도 하는 직장보다 더 같이 일하기 힘든 비상식이 출현하는 곳, 옳고 그름의 가르마를 타느라 여념이 없어 가장 약하고 어려운 순간에 처한 이들을 받아줄 너른 품이 없는 곳. 교회가 종종 그렇게 전혀 인식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를 교회 밖으로 밀어내고 있는 것을 교회는 정말로 ‘의식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별 악의 없이 무신경하게, 어쩌면 때로는 의협심까지 가지고 했던 교회 ‘주류’들의 말과 행동에 교회 밖으로 밀려난 많은 사람을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선 어정쩡한 자리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늘 잘 보였다. 어떤 이유에선지 결국 교회를 통해 큰 사랑을 경험하고 이렇게 교회에 남았지만, 감사한 마음 아래로 늘 흐르는 물음표가 있었다. 왜 내가 교회를 떠나게 두시지 않았을까. 나는 감히 바라지도 않았던, 어떤 사람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사랑이 왜 내게는 주어졌을까. 교회가 모두에게 그런 곳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랑은 무거운 부채감으로 남았다.
어디에나 큰 사람이 있고 작은 사람이 있고, 촉망받는 사람이 있고 무시당하는 사람이 있으며, 주류가 있고 비주류가 있다. 작은 사람은 종종 자신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말할 목소리조차 갖지 못한다. 사노라면 누구나 그런 현실을 경험한다. 주로는 내가 ‘작은’ 사람 쪽에 속하게 될 때 더 처절하게 그 현실을 겪는다. 교회도 이 경험에서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교회 이야기의 끝은 아니다. 아니어야 한다. 그것이 끝이었다면, 2천 년 교회 역사는 진작 종결되었을 것이다. 교회가 행한 많은 부끄러운 일들, 신앙의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들이 결국 교회를 멸망시키고 말 것 같던 순간에도,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곳에서 가장 작은 사람 곁으로 다가가 그 짐을 나눠서 지려 했던 한 사람, 두 사람, 한 교회, 두 교회가 있었고 그 사랑이 전해져 오늘 우리가 여기에 있게 되었다. ‘교회는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구성원을 위해 존재하는 유일한 조직’이라는 윌리엄 템플의 말은 때로 우리 교회의 현실과 동떨어진 터무니없는 이상 같지만, 나는 그런 교회로 살아가는 어느 한 사람, 그런 어느 한 사랑으로 인해 결국 교회에 남게 되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교는 혁명을 여러 차례 겪었고, 매번 혁명이 일어날 때마다 죽음을 맞이했다. 그렇게, 그리스도교는 죽고 다시 살아나기를 반복했다. 그들에게는 무덤에서 나오는 법을 잘 아시는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G.K. 체스터턴(《교회를 찾아서》에서 재인용)
정다운
낮에는 회사에 다니고 밤에는 번역을 한다. 서로 다른 두 언어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에 관심이 있다.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 《십자가》 《신학자의 기도》 《기억하라, 네가 누구인지를》 《오라, 주님의 식탁으로》 등을 옮겼다. 팟캐스트 〈슬기로운 독서생활〉에 참여하고 있다. 〈복음과상황〉에 ‘질문의 시간: ‘사이’에서 묻다’를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