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혼자만 알기 아까운 번역서 추천

당신이 읽고 싶어지는 책을 소개합니다 📚

가을이 아니어도 시인들이 노래하는
산문스러운 몇몇 날들
이쪽으로 눈도 조금 내리고
저쪽으로는 아지랑이 -

- 〈나의 꽃은 가깝고 낯설다〉, 에밀리 디킨슨

📖 번역서를 읽는다는 것

“문학은 뒤엉커 있는 삶에 답을 주지 않아요. 다만 언어로 정리할 뿐이죠. 잘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치유될 수 있죠. 번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등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유명 불문학 작품을 번역한 김화영 교수가 한 인터뷰에서 말했던 내용입니다. 인용문처럼 우리는 흔히 지식 습득, 문화 체험 등 ‘뒤엉킨 궁금증’을 정리하고 그 과정에서 무언가 원하는 바를 채우기 위해 책을 읽습니다. 그 중에서도 번역서를 읽을 때에는 한국어로 적힌 글과는 다른 생각과 문화, 위로를 기대하곤 하죠. 번역서를 읽는 이유, 그리고 좋은 번역서를 찾는 이유는 더 넓은 시야로 세상을 보고 다양한 시선으로부터 용기를 얻고 싶어하는 우리의 욕구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그런 관점에서 과연 번역서를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요컨대 번역서를 읽는 것은 누군가 했던 고찰의 시간을 동일한 호흡과 관심으로 공유하는 일일 겁니다. 번역된 책들은 작가의 집필 이후 ‘번역’이라는 과정을 한 단계 더 거치게 됩니다. 이때 편집자와 번역가의 시간을 통해 작품의 의미에 대한 고찰이 이루어지고, 그 고민의 시간 끝에 선택이 이루어지죠. ‘좋은’ 책을 판별하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번역이라는 수고스러운 과정을 거쳐 다른 언어•문화권의 사람들에게 소개되는 책이라면 적어도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책이라고 평가받은 작품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시대마다 독자에게 소개되는 번역서의 결은 굉장히 상이합니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이 무엇에 관심을 갖고 있고,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에 따라 선택받는 책들이 달라지기 마련이니까요. 그래서 오늘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며 ‘나’라는 존재에 대한 고민을 바탕으로 관계와 삶, 사회를 고민하는 여러분들께 울림이 있을 법한 두 여성 작가의 책을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

첫 번째 작가는 ‘아니 에르노’라는 프랑스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입니다. 출판사 ‘1984Books’는 이 작가의 책을 꾸준히 펴내고 있는 곳으로, 사진작가 ‘신승엽’ 대표님께서 시작하신 1인 출판사입니다. 남매인 ‘신유진’ 작가님께서 주로 번역을 맡아주셨고, 차분하고 따뜻한 느낌의 책 디자인이 두드러지는 곳입니다.

두 번째로 소개할 작가는 19세기 미국 시인 '에밀리 디킨슨'입니다. ‘파시클출판사’라는 번역서 중심의 1인 독립출판사가 이 작가의 책을 전문으로 펴내고 있는데요. 영문학 중에서도 에밀리 디킨슨을 전공한 ‘박혜란’ 대표님께서 더 다양한 작품과 해석을 소개하기 위해 출판사를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 오늘 소개하는 책

〈세월〉 | 아니 에르노

추천이유: 근현대 프랑스의 사회상을 개인의 모습을 통해 읽어볼 수 있는 책. 누군가의 기억 조각을 담백하고 친근한 문체로 만나볼 수 있어요.

〈빈 옷장〉 | 아니 에르노

추천이유: 자신의 아픔을 사실적으로 적은 책. 비슷한 상처와 고민을 가진 이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책입니다.

〈절대 돌아올 수 없는 것들〉 | 에밀리 디킨슨

추천이유: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원문과 함께 접할 수 있는 책.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따뜻한 시집입니다.

✍️ '나'의 이야기를 쓴다는 것

1984Books는 아니 에르노의 책들을 다수 출판했다고 알려드렸는데요. 아니 에르노라는 작가는 ‘자기에 대한 글쓰기’로 유명한 프랑스의 소설가입니다.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사적인 체험을 글로 녹여내는 자전적 글쓰기를 보여주었던 작가인데요. 이 작가의 작품은 사회에 비친 자기 자신의 모습과 더불어 ‘나’라는 개인에게 사회상이 투영된 모습 등 두 가지 방향성이 공존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물론 어느 시대나 ‘나’에 대한 글쓰기는 사랑을 받아왔지만, 여러 수단을 통해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표현하고 싶어하는 현대 사회의 독자들이 크게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글이라는 점이 아니 에르노의 작품을 소개해드리려는 이유입니다.

그 중에서도 〈세월〉이라는 작품은 작가의 삶을 통해 194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프랑스 사회를 담아내고 있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바로 ‘1인칭 시점’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인데요. ‘그녀’, ‘우리’, ‘사람들’과 같은 주어를 사용하여 단순히 작가 개인의 기억과 경험이 아닌 좀 더 포괄적으로 '우리'의 기억을 담고자 노력한 작품입니다. 그래서 이 책에는 65년의 세월 동안 작가의 시선으로 마주한 사회적 변화와 그 속에서 변모하는 개인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전쟁 직후의 상황들, 사상의 대립,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 속 젊은 세대의 대응뿐만 아니라 작가가 경험했던 여성으로서의 시간, 젊음과 늙음,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는 책입니다. 2019년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후보로 오르기도 했을 만큼 작품성을 인정받은 책이기도 합니다. 🏆

📝 책 속 한마디

“자신을 더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질문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나이마다 자신이 살아온 해를 규명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과거를 어떻게 그릴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

아니 에르노는 “허구를 쓴 적은 한 번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요. 앞서 살펴본 것처럼 거짓이나 허구에 기댄 것이 아닌 작가 본인의 경험을 통해 그려지는 작품세계는 〈빈 옷장〉이라는 제목의 데뷔작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이 책에서는 아니 에르노가 여성, 청소년, 가족 구성원, 누군가의 애인 등으로 자리하며 받았던 상처를 솔직하게 그려내고 있는데요. 그 상처를 그려내는 과정 속에서 ‘나’라는 주인공이 겪었던 상처들을 독자는 살이 베이는 것과 비슷하게 감각적으로 느끼며 깊이 공감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우리 각자가 삶을 살아가며 겪었던 수많은 상처와 아픔을 복기하고 그 과정을 통해 위로 받을 수 있는 책이랍니다. 상처를 마주하는 것은 항상 아픈 일이지만, 누군가 비슷한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과 그 상처에 대한 글쓰기를 읽는 것 자체만으로 가끔은 치유의 시간이 되기도 하니까요. 🩹

📝 책 속 한마디

“빅토르 위고나 페기처럼 교과 과정에 있는 작가를 공부해 볼까. 구역질이 난다. 그 안에는 나를 위한 것, 내 상황을 위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을 묘사하거나 이 끔찍한 순간이 지나가게끔 도와주는 대목은 한 구절도 없다. 탄생, 결혼, 임종, 모든 상황마다 그에 따른 기도가 존재하지 않는가, 모든 상황에 맞는 구절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 책은 그런 일에 대해 침묵한다.”

📝 다양한 '나'의 내면들

‘에밀리 디킨슨’은 미국의 시인으로 살아 생전 문학성을 인정받지 못 했지만 현재는 미국에서 가장 천재적인 시인이라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무려 1,800편에 가까운 시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생전에는 단 일곱 편만 세상에 발표되었다고 해요. 이 시인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내면’에 대한 고민을 그려낸 것이 특징인데요. 19세기 미국 사회 속 이데올로기, 종교, 가부장제, 노예제도 등에 대한 반성과 저항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한 오랜 탐구를 했던 작가입니다. 그래서 그런 걸까요, 디킨슨의 시집을 읽다보면 세계/나에 대한 회의와 부정이 읽히는 한편 삶/존재에 대한 따스함과 다정함을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

사진 : ⓒ 파시클출판사

그중에서도 〈절대 돌아올 수 없는 것들〉이라는 시집은 앞서 소개해드린 ‘파시클출판사’의 박혜란 대표가 여성적 자아, 자연, 삶과 죽음, 고독 등 총 8개의 테마로 디킨슨의 시를 정리하여 소개한 작품입니다. 정말 많은 시를 썼던 만큼 다양한 주제의 작품들을 보다 정갈하게 읽어볼 수 있는 친절한 책이죠. 이 책을 읽다보면 “-“ 표시를 많이 발견할 수 있는데요. 당시 시문학에 사용되지 않던 문자를 통해 실험적인 시도를 했던 에밀리 디킨슨의 흔적입니다. 이러한 시도들을 번역으로도 잘 살렸을 뿐만 아니라, 독자로 하여금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도록 영어 원문도 함께 실려있는 배려심 넘치는 번역본입니다. 특히 일관적이고 결정적인 모습의 ‘내’가 아니라 살아가며 마주하는 '나'의 다양한 모습들이 시의 화자로 등장하는 것 또한 다양한 정체성을 교차하며 살아가는 현대사회 독자들에게 크게 와닿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

📝 책 속 한마디

내 평생 세워둔 - 장전된 총이었는데 -
구석에 처박혀 있던 - 어느 날
주인이 지나다 - 알아보고는 -
날 챙겨 나갔다 -

[덧붙이기]

📜 번역서 전문 책방: '번역가의 서재'

번역가의 서재는 서울 마포구에 있는 번역서 전문 서점입니다. 일본어 번역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시는 책방지기님께서 직접 고른 번역서로 채워진 서가가 특징인데요. 지난 여름에 바인드북에서 책방지기님과 함께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었답니다. ‘서재와 같은 책방’을 만들어, 취향을 나눌 수 있는 아지트같은 서점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책방을 시작하게 되셨다고 합니다.

다양한 행사가 열리는 이 책방에는 책방지기님께서 직접 진행하시는 '원서로 배우는 일본어 강좌'도 진행되고 있는데요. 일본어 원서를 읽는 것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참여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책방에서는 일본 번역서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권과 언어권의 책들을 만나보실 수 있어요.

🔎 번역가의 서재 인스타그램

오늘 뉴스레터에서는 1984Books와 파시클출판사에서 펴낸 아니 에르노, 에밀리 디킨슨의 책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뉴스레터를 통해 님께서 취향에 딱 맞는 번역서를 찾고, 나아가 해외 작품을 읽을 때 더 빛나는 시간이 되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 지난 피드백

•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 소개를 읽고 "기존에 없던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멋있고 울림을 준다"는 피드백이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울림있는 이야기를 많이 전해드릴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

• 패션 외에도 취향/라이프스타일과 관련된 이야기를 읽고 싶다는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더 다양한 관심사를 반영하기 위해 열심히 기획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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