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래도록, 독서에 재미를 붙인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정확히는 질투했었다.
안녕하세요. 정민호입니다.
여자친구는 꽤 짓궂은 면이 있습니다. 가끔 저에게 ‘재미없다’ 말할 때가 있거든요. 솔직히 제가 재미없다고 평가받을 정도는 아닌데 말이죠. 특히 설명을 조금만 길게 할 때면, 꼭 매크로처럼 하품 소리를 내거나 너무 지루하다고 폭로해서 웃음을 터뜨립니다. 하, 이런 장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지난주, 집 앞 도서관에 처음 가봤습니다. 회원 가입을 하고 신나서 책 열 권을 대출해왔죠. 그런데 어떤 책을 빌렸는지 한 권씩 소개하려고 하니, 여자친구가 이렇게 반응하더라고요. “언제 끝나?” 짓궂은 말에 한참을 같이 웃었지만, 마음 한편은 씁쓸했습니다. 사실, 그날 얘기를 길게 하고 싶었거든요. 그가 참아주길 바랐습니다. (솔직히, 잠깐 재미없는 순간이었단 걸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도파민 중독 시대의 폐해입니다. 그 잠깐을 견디지 못하고 으이그….
이제 재미없는 긴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야겠습니다. 글로, 말로 재미있는 이야기만 나눠야겠죠. 그러고 싶습니다. 혹시 책 이야기를 재밌게 할 수 있는 분이 계시다면 말씀해주세요. 〈서사의 서사〉 공간을 마련해 드립니다.
오늘도 흥미진진한 글이 이어집니다. 강동석 기자님의 독서 이야기입니다. 짓궂게 ‘재미없다’ 장난치지 마시고, 끝까지 읽어주세요. 진짜 재밌습니다. 주말도 잘 보내시고요!
P.S. 사실 길게 얘기하는 빈도는 저보다 여자친구가 더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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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타고난 독서가는 아니었다. 어렸을 적부터 집에 있는 세계문학전집을 다 읽었거나 심심풀이로 학교 도서관 같은 데서 살았다는, 독서에 두각을 나타낸 사람들과 달랐다. 고등학교 이전까지 독서량이 적었다. 아버지는 강소주를 마시며 앉은자리에서 소설 몇 권 읽는 분이긴 했으나, 독서가의 핏줄은 형에게만 이어진 것 같았다.
전직 사서인 나의 친형으로 말할 것 같으면, 2007학번으로 대학에 들어갔다. 형은 고등학교 시절 언어영역을 처음부터 끝까지 두 번 풀고도 20분 넘게 시간이 남는 속독형 인간이었다. 이런 속독이 특정한 훈련으로 길러진 능력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이리저리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해, 중·고등학생 때 자연스럽게 ‘대각선 읽기’가 몸에 밴 사람. 몇 시간 안 걸려 1천 쪽 분량 소설을 해치우는 모습을 보며, ‘저건 뭐지?’ 싶었다.
물론 형도 어려운 책을 읽으면 속도가 느려지긴 했었다. 움베르트 에코를 특히나 좋아했고, 웬만한 고전 철학서는 취미로 다 읽었다. 한번 뭔가에 빠지면 옆에서 몇 번이고 말을 걸어야 대답을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집중력…. 책도 그랬다. 책 읽는 모습만 보면, 부자가 똑 닮았다. 나도 글 자체에는 남들보다 익숙했을지도 모르겠다. 초등학생 때 이야기 몇 편 써보고, 중학생 때 취미 삼아 단편소설 한 편을 완성해본 적이 있기는 했었다.
내가 독서에 관심을 둔 시점은 고등학교 1학년 때. 당시 담임이던 국어 선생님은 농담도 잘하시는 데다가 지역의 사물놀이패 활동을 하실 정도로 예술적 끼와 흥을 갖추었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소속으로 여느 선생님과는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분이셨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연탄쌤’이라는 별명을 갖고서 아이들에게 무척 인기가 많으셨는데, 나도 그 아이들 중 한 명이었다. 나는 1학기 초, 운 좋게 연탄쌤이 담당하시던 신문부에 들어갔다.
신문부를 오랫동안 하지는 못했다. 아이들 상담에, 외부 활동에 선생님이 워낙 바쁘셔서 계획을 몇 번 세우고 역할만 나누다가 1학기를 다 채우기도 전에 부서 자체가 사라지고 말았다. 부원들은 다 흩어졌고, 나는 영화감상반으로 옮겨갔다. 해산되기 전, 신문부 활동 도중 짧은 글을 나눠 쓴 적이 있었는데, 선생님은 나를 따로 부르시곤 “너 글 써본 적 있지? 문재(文才)가 있는 듯하니 나랑 같이 열심히 써보자” 말씀하신 게 자극을 줬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는지 선생님께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은, 빤한 구석이 있었다.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 이 비법(?)을 깨우쳐 강력한 의지를 불태운 끝에 독서가이자 글쓰기 고수가 됐다고 한다면 결론이 깔끔하겠으나, 그렇진 않았다. 고등학교 1학년 어느 시점부터 한 주에 두 권 이상씩 꾸준히 읽기 시작했는데, 같은 신문부원으로서 평소 아주 조용했던 한 여학생을 향한 짝사랑과 호승심이 계기가 되었다.
2000년대 중후반, 싸이월드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가던 시절이었고,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에야 싸이월드를 주로 썼다. 그전에는 다들 한 번씩 두드려보곤 했던 네이버 블로그에 관심을 두었다. 우연이었는지, 아니면 열심히 검색한 결과였는지(아마도 후자일 테다), 이 여학생의 블로그 주소를 알게 된 것이다. 직접 말을 걸 용기가 없고, 이 친구는 손에 꼽을 정도로 내성적이었던 터라, 나는 마음만 키우면서 종종 블로그를 훔쳐보곤 했다.
더구나 이 학생은 고등학교 3년 내내 학교에서 ‘글 잘 쓴다’ 소리를 들었던 네 명 중 한 명이었다. 당시 블로그 글에서 두드러졌던 그의 단문은 정말 정갈했다. 돌아보면 확실히, 그가 설정해둔 고상한 글씨체 효과도 있었겠다(현재 이 글은 아래아 한글에서 글자 모양을 ‘한컴바탕 10포인트 자간 –18’에 맞춰두고 쓰고 있다. 날렵하게 잘 써지는 느낌이랄까). 나보다 문장을 잘 쓰는 것 같은데, 학교 공부도 훨씬 잘하고 책도 많이 읽었더랬다.
학교 성적이야, 극상위권 학생의 존재는 선생님을 통해서 소문으로 전해 듣곤 하니까 어느 정도 알았다. 독서량은 블로그 글을 통해 대강 파악했다. 한 주에 적어도 한 권 이상은 꾸준히 독후감을 남긴 기록이 있었다. 그의 독후감을 꽤 많이 봤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2004년판 《거꾸로 읽는 세계사》(푸른나무)를 비롯한 유시민이 쓴 책들. 그 유명한 ‘유시민의 항소이유서’도 블로그로 접하고 이때 처음 읽었다. 매끄럽게 읽지는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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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친구보다 잘하는 게 하나라도 있었으면 싶었다. 성적은 따라잡기 어려워 보이니 글쓰기와 독서에서 그랬으면 했다. 그러면 마음을 고백해볼 ‘자격’이라도 얻을 것 같은 유치한 마음 때문이었을까. 무조건 한 권이라도 더 읽는 것을 목표로 두고, 억지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일단 독후감으로 올라온 책들부터 시작했다. 2학년 때 같은 반이 되고서, 용기 내어 말 몇 번 섞은 뒤 환상이 깨져 짝사랑은 끝났지만, 독서는 멈추지 않고 계속했다.
호승심을 품고 혼자 이 친구를 상대로 섀도복싱을 했던 것도 같다. 글은 잘 쓰고 싶으나 책 읽기는 좀처럼 되지 않아, 독서가였던 형을 질투하던 마음이 작용했을지도 모르겠다. 수행을 쌓듯 책을 읽어갔고, 그 숫자가 2백 권이 넘고서야 뭔가 가닥이 잡히는 듯했다. 그렇다고 독서에 막 재미를 붙이지는 못했다. 아직도 여전히 책 읽는 속도로는 형보다 한참 느린 편이겠지만, 더 많은 장서를 보유하고 있고, 독서량은 비벼볼 만한 수준 같다.
이제는 나를 두고 책을 매우 좋아하고, 말 그대로 ‘독서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규정하는 이들도 주변에 몇 있다. 어쩌면 해당 사항이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취미를 ‘독서’라고 밝혀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정도지만, 즐기며 읽은 책은 많지 않다. 문학 작품을 읽더라도 공부하듯 읽는다. 내게 독서란 ‘노동’이고, 때로 ‘고행’이다. 그런 의미로, 한 강연에서 그리고 어느 책에서 ‘취미 독서는 잊으라’던 최재천 교수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최재천 교수는, 독서는 ‘빡센 일’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의 독서력은 억지로 붙인 근육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권만 주욱 단박에 읽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이제는 늘 병렬독서만 한다. 그렇지만 ‘노동’에도, ‘고행’에도 맛이 있는 듯싶다. 내가 애정하는 작가로 꼽는 일본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의 꽤 많은 작품은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여러 배경지식을 공부하고 거듭 읽으며 ‘덕질’하는 맛이 제대로인 경우라서 좋아하게 됐다.
파고들 요소가 많고, 반복되는 몇 가지 테마가 선명해서(이해할 만하게 적당히 난해함)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 때마침 오에 겐자부로를 언급한 김에 덧붙이겠다. 〈서사의 서사〉 16호에서 94,900원에 올라와있던 그의 중고책을 훨씬 싸게 사기 위해 ‘존버’ 중이라고 전했는데, 후기를 밝히자면, 3개월 더 기다린 끝에 66,000원을 결제했다(여전히 비쌌지만, 더 기다리기엔 책 상태가 매우 좋았다). 그래도 작품을 ‘재미’로 읽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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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래도록, 독서에 재미를 붙인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정확히는 질투했었다. 독서 자체로 독서의 목적을 이루는 사람들을. 물론 그렇다고 하여, ‘정말 재밌어서 진도가 팍팍 나가는’ ‘이대로 페이지가 끝나지 않았으면 싶은’ 책이 전혀 없지는 않다. 매우 드물게나마 ‘존재한다’. 올해는 존 맥스웰 쿳시의 《서머타임》(문학동네), 그리고 유리관의 《교정의 요정》(민음사). 딱 두 권이었다. 그마저도 《교정의 요정》은 그 재미가 2부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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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발’이 길어지는 듯해 민망하지만, 《교정의 요정》 맨 앞에 실린 글의 토막을 꽤 길게 인용하는 실례(?)를 저지르면서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나는 타고난 독서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나마 오늘의 나를 만든 것은 독서였다. 가장 많이 해왔고 지금도 하는 일을 고려하면, 나도 엄연한 ‘교정공’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독서가 아니었다면 교정·교열로 밥벌이하는 게 가능했을까? 진실은, 독서 때문에 코가 단단히 잘못 꿰인 결과물일지도.
이 직업에는 내버리기 어려운 특유의 병과 벌도 있습니다. 내가 느끼는 내 노동의 필요와는 무관하게, 그 어떤 잘나고 목소리 높으신 분들의 그 어떤 글에서든 고칠 곳이 보인다는 점입니다. 이 말글을 쓰는 이 나라에서 손발로 의전서열이 꼽히는 분들은 물론이거니와, 지성의 첨단에 계시다 하는 박사 교수님들, 심지어는 저 훌륭 대단한 여러 작가 문호님들까지. 그 누구도 관심이 없는 일에 오직 내가, 폭포 아래서 폭포를 멈추려 하고 있다는 그 느낌, 오직 나만이, 혼자서만 유령들을 보는 듯한, 그 위험천만한 느낌에 붙들릴 때마다 나는 눈을 감아 봅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의 기로 앞에서, 속으로 눈물을 쏟고 분을 토했을, 이제 교정의 전당에 들어가 표정 없이 늘어선 선배 교정공들의 모르는 얼굴(데스마스크)들을 나는 떠올립니다. 선배들의 단단한 이마 너머에 무른 것의 고통이,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한없는 고통과 노고가 있었음을 나는 느낍니다. 이 고통은 대체 언제쯤 끝날까요? 이 고통이 끝나는 것이 온당할까요?
나의 선생님은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이들을 가장 존경하라’고 했습니다.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그런 이들을요. 다른 누구보다도요. 거의 모든 게 위기에 빠져 있고 한국어 역시 그렇습니다. 내 결론은 이겁니다. 교정공의 눈으로 본 말글세계가 지옥이라면 교정공은 악마가 되는 수밖에 없다, 아니면 여러분을 악마로 만드는 수밖에… 농담입니다……. 이것은 당신을 나로 대체하려는, 나 교정공의 기록입니다. 이것은 농담이 아닙니다…….
― 《교정의 요정》 ‘들어가며: 망해 가는 세상에서’ 中
강동석
〈복음과상황〉에서 글을 받고 고치는 일을 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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