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목적인 사랑은‘종교’를 닮았다.
많은 사람들이 죽기 전에 '종교’를 갖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고 한다.
열여섯살. 나의 첫번째 종교는 ‘동방신기'였다. 그 때 내 인생 첫 명함이 생겼다. 명함에는 ‘웹상'이라는 보직이 쓰여있었는데 그건 팬으로서의 특정 역할을 뜻하는 은어였다. 커뮤니티 활동을 하는 팬들은 크게 두 가지 보직으로 나뉘어 임무를 수행했다. '지상’이 음악 방송과 콘서트에 발로 뛰는 팬이라면 ‘웹상’은 포토샵으로 배너와 움짤을 생산하는 팬들을 의미했다. 종교로 치자면 ‘지상’은 성가대, ‘웹상’은 전도사에 가까웠다. 나는 신들의 무대를 눈 앞에서 응원하진 못했으나, 온라인 세계를 밤새 누비며 신들의 위대함을 전파했다.
나는 아빠 컴퓨터 앞에 앉아 새벽까지 포토샵을 연마했다. 오빠들을 더 뽀샤시하게 만들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웹상'으로서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기도 했다. 내가 올린 배너에 달리는 댓글들(ex. 시아준수 너무 이쁘게 해주셨네요ㅠㅠㅠㅠㅠㅠㅠ)이 나의 사랑이 진실되었음을 증명해주고 있었고 그건 곧 ‘나’라는 존재에 대한 증명이었다. 포토샵을 가르쳐 주는 유튜브 영상은 없었지만 블로거들이 올려주는 무료 ‘스탬프’ (하트 모양, 별 모양 등을 찍을 수 있는 포토샵 기능)를 가득 저장한 날은 배부르게 잠에 들었다.
스무살. 나의 두번째 종교는 '일본'이었다. 첫 수능을 폭망한 나는 어느 학교의 보건학과에 입학했다. 돌이켜보면 ‘보건교사 오지윤’이 될 수있는 기회였으나, 당시 나는 ‘문과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며 문송한 줄 모르고 나대던 선비였다.
그리고 그 선비는 현실을 잊기 위해 요시모토 바나나와 만나기 시작했다. ‘일본 소설’이란 ‘비현실적인 현실’ 그 자체였다. ‘여장 남자’, ‘텔레파시’ 등의 소재들이 한데 엉켜있는데도 위화감이 없는 세계. 이게 가능하다니. 나는 일본 소설을 읽기 시작한지 한 달도 되지 않아 YBM 일본어 수업을 등록하게 되었다. ‘일덕’이란 증상은 0기도 1기도 없이, 바로 ‘말기’로 가는 치명적인 질병같았다.
이어서 나는 일본 아이돌 ‘아라시’를 사랑했고 수많은 일본 드라마을 보느라 밤을 새야 했다. 일본으로 여행간 친구가 사다준 '야마삐'의 누드 화보집을 독서실에 앉아 몰래 훔쳐보며 나는 두번째 수능을 준비했다. 두번째 수능을 보러가던 추운 새벽에도 나는 아라시의 노래를 들으며 교문을 들어갔고 새로운 대학교에 가서도 1년 넘게 일본어 수업을 들었다. 그 때 내가 일덕으로서 폭발시킨 사랑이랑 맹렬하고 지독했다.
그리고는, 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인생에 주기적으로 찾아와 활력을 주는 줄 알았던 '맹목적인 사랑’은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어른이 되자, 음악이든 영화든 한 가지를 추종하는 것보다 다양하게 섭렵하는 것이 좋아졌고 한 가지만 파고 들기에 세상에는 매력적인 게 너무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생각이 너무 많아져버렸다. 우쿠렐레도 방탄소년단도 현대무용도 모두 깊이 사랑하지 못하고 끝이났다. 뜨거운 사랑이 될 뻔했던 우쿠렐레는 써먹을 데가 없다는 이유로 헤어졌고. 현대무용은 몸이 뜻대로 따라주지 않아서 헤어졌다. 여기저기 기웃거렸지만 그 시뻘건색의 사랑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게 있어 '글쓰기'는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대상은 아니다. 하지만 아주 당위적으로 의심 없이 사랑한다. 이 사랑은 동방신기, 일본어, 우쿠렐레, 방탄소년단, 현대무용을 따라 저승길로 보내고 싶지 않아서 내 손목과 몇 겹의 수갑으로 연결해 놓았다. 이 메일링도 그 수갑 중 하나다. 결혼 한 부부가 평생 의리를 지키기 위해 별의 별 고생을 하는 것처럼, 나도 글쓰기와 평생가기 위해 이 제도를 마련했다. 이 사랑은 너무 귀하고 지켜야 하니까. 호르몬이 주도하는 사랑은 오래가지 않고 나는 너무 게으르니까. 무언가를 진짜 하고 싶은 마음은 너무 너무 귀하다. 혹시나 그분이 오시면 정말 잘해 주자. 주변에서 미쳤냐고 뭐라해도 잘해주자. 너도 나도 그 충동을 모르고 지나치지 않기를. 기민하게 알아 차리기를. 그리고 외면하지 않기를. * 글이 마음에 드셨다면 친구에게 '구독하기' 링크를 공유해주세요. * 글과 사진의 일부는 출처를 밝히고 공유할 수 있습니다. 글과 사진의 저작권은 오지윤에게 있습니다. * [보낸이 오지윤]의 글과 사진에 대한 자유로운 답장은 언제든 감사한 마음으로 읽겠습니다. * [보낸이 오지윤]은 일요일 밤마다 글과 사진을 보내드립니다. * [지난 글 읽기] 버튼을 통해 다른 글도 감상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