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께 보내는 열두 번째 흄세레터
거리두기가 해제되고 나서 맞는 첫 번째 금요일이에요. 아직 실감이 잘 안 나는데, 님은 어떠신가요? 혹시 여행 계획을 세우고 계신가요? 편집자 흄과 세는 한창 시즌 2를 준비하고 있는데요, ‘이국의 사랑’이라는 주제에 맞게 다양한 나라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을 편집하며 간접 세계 여행 중이랍니다.
흄세레터는 당분간 휴식기를 가지며 다음 시즌 준비에 집중하려고 해요. 머지않아 새로운 테마와 작품으로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그때까지는 흄세 인스타그램을 통해 소식을 전할게요! 그간 함께해주셔서 감사하고, 남겨주신 피드백을 보며 큰 힘을 얻었다는 인사를 전합니다.
시즌 1을 마무리하는 오늘 레터에서는 이디스 워튼의 《석류의 씨》에 수록된 단편 〈하녀의 종〉과 〈빗장 지른 문〉의 일부를 보내드려요. 짧지만 재미있게 읽으시길!
수록작 〈하녀의 종〉 미리보기
📚 〈하녀의 종〉 줄거리

‘브림프턴 부인’은 남편의 친구이자 이웃인 ‘랜퍼드 씨’와 교류하는 것을 유일한 기쁨으로 삼아 살아가지만, 이마저도 폭력적인 남편에 의해 좌절된 채 미스터리한 죽음을 맞는다.

하려던 말이 혀 위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거기 서 있는 사람은 에마 색슨이었다.

 

그녀가 언제부터 거기 서 있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몸을 움직일 수도, 그녀한테서 눈을 뗄 수도 없었다. 나중에는 끔찍하게 겁에 질렸지만, 당시에 내가 느낀 감정은 공포보다 더 깊고 조용한 것이었다. 그녀는 나를 한참 바라보았다. 말없이 간절히 나에게 무언가를 간구하는 표정이었지만, 대체 내가 그녀를 어떻게 도울 수 있단 말인가? 갑자기 그녀는 몸을 돌렸다. 그녀가 복도를 걸어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따라가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벌떡 일어나 뛰쳐나갔다. 그녀는 복도 반대편 끝에 있었다. 마님의 방 쪽으로 돌아설 거라 예상했지만, 그녀는 뒤쪽 계단으로 이어지는 문을 밀어 열었다. 나는 그녀의 뒤를 쫓아 계단을 내려가 뒷문으로 가는 복도를 걸어갔다. 주방과 식당은 비어 있었다. 남자 하인을 제외한 나머지 하인들은 모두 쉬는 시간이었고, 남자 하인은 식품 저장실에 있었다. 그녀는 문 앞에 잠시 서더니 다시 한번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문손잡이를 돌려 밖으로 나갔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나를 어디로 이끄는 것일까? 문은 그녀가 나간 뒤 부드럽게 닫혔다. 그녀가 사라졌기를 반쯤은 기대하는 마음으로 문을 열어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몇 미터 앞에서 급한 발걸음으로 안뜰을 가로질러 숲으로 이어지는 길로 향했다. 눈 속에서 그녀의 모습은 검고 외롭게 보였다. 잠시 심장이 멎는 듯했고 여기서 돌아갈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자기를 따라오라며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나는 블라인더 부인의 낡은 숄을 집어 들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에마 색슨은 이제 숲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쉬지 않고 걸었고, 나도 같은 속도로 뒤따랐다. 우리는 대문을 지나 큰길까지 나왔다. 그녀는 마을로 가는 공터를 가로질렀다. 이제 땅은 하얗게 덮였다. 그녀가 내 앞의 헐벗은 언덕을 오를 때 그녀의 발자국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심장이 쪼그라들고 무릎에 힘이 풀렸다. 집 안에서보다 여기가 더 나빴다. 그녀의 존재 때문에 시골 들판 전체가 무덤처럼 외로운 곳으로 보였다. 이곳에는 오직 우리 둘만 있고 드넓은 세상에 도움될 만한 것은 하나 없었다.


돌아가려고도 해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마치 밧줄로 나를 묶어 끌고 가는 듯했다. 나는 개처럼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마을에 다다르자 그녀는 나를 이끌고 교회와 대장간을 지나 랜퍼드 씨 집으로 이어진 좁은 길로 들어섰다.(230~231쪽) 

흄’s pick

브림프턴 부인의 하녀가 홀린 듯 에마 색슨의 유령을 따라가는 장면입니다. 뭔가 엄청난 상황이 펼쳐질 것 같아 숨죽이면서 읽었는데요, 에마 색슨은 브림프턴 부인과 묘한(?) 관계에 있는 랜퍼드 씨의 집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 채 사라집니다. 어쩐지 김이 빠지는 것 같다가도 왜 하필 폭력적인 남편과는 사뭇 다른 다정한 남자 랜퍼드 씨의 집으로 이끌었는지 곰곰 생각해보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어쩌면 어떤 진실은 감추려 했을 때 더 선명해지고, “드넓은 세상에 도움될 만한 것은” 감출 수 없는 ‘진실’뿐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수록작 〈빗장 지른 문〉 미리보기

📚 〈빗장 지른 문〉 줄거리
'그래니스'는 자기가 사촌인 '조지프 렌먼'을 죽인 범인임을 고백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 그래니스는 자신의 말을 믿어줄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유죄를 입증하려 애쓴다.
어느 여름에 렌먼의 집 근처인 렌필드에 가게 되었습니다. 렌먼은 아시다시피 제 외사촌이지요. 가족들이 항상 그를 돌보아주었는데, 대개는 조카딸이 도맡았습니다. 하지만 그해에는 다들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고, 조카딸 한 명이 우리에게 두 달간 자기 의무를 대신해준다면 오두막을 빌려주겠노라고 제안했습니다. 물론 저한테는 성가신 일이었지요. 렌필드는 시내에서 두 시간 거리니까요. 하지만 가족의 의무에 충실했던 어머니는 항상 그 노인에게 잘해주셨어요. 그러니 우리가 그런 요청을 받은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지요. 또 집세도 아끼고 맑은 공기를 쐬면 케이트에게도 좋을 테니까요. 그래서 갔습니다.


조지프 렌먼을 전혀 모르신다고요? 아메바나 뭐 그 비슷한 타이탄의 현미경 아래 놓인 원시적인 유기체를 떠올려보십시오. 그는 덩치가 크고 무기력했어요. 체온을 재고 성공회 소식지를 읽는 것 외에는 아무 일도 안 했습니다. 아, 멜론도 키웠지요. 그게 사촌의 취미였습니다. 야외에서 막 키우는 멜론이 아니라 온실에서 키우는 것이었지요. 그는 렌필드에 땅이 많았습니다. 커다란 텃밭을 수십 개의 온실이 둘러싸고 있었어요. 그리고 거의 모든 온실에서 멜론을 키웠어요. 조생 멜론, 만생 멜론, 프랑스산, 영국산, 토종……. 작은 것도 있고 엄청 큰 것도 있었어요. 모양과 색깔이 다양했습니다. 사촌은 멜론을 아이 다루듯 애지중지했지요. 훈련된 일꾼들이 돌보았습니다. 멜론의 온도를 재는 의사가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어쨌든 그곳에는 온도계가 널려 있었어요. 그리고 그 멜론들은 보통 멜론처럼 땅 위로 덩굴을 뻗고 자라는 게 아니라 복숭아처럼 유리를 타고 올라가게 했습니다. 햇볕과 공기를 골고루 받을 수 있도록 멜론 하나하나를 무게를 지탱해주는 그물에 넣어 매달아놓았지요.


가끔은 늙은 렌먼이 자신의 멜론들 중 하나랑 똑같다고 느 꼈습니다. 옅은 색 영국산 말입니다. 심드렁하고 움직임 없이, 그의 삶은 금으로 짠 그물에 싸여, 늘 똑같이 따뜻한 공기 속에서 지저분한 속세의 근심으로부터 높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의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규칙은 ‘근심하지 않는다’였습니다. 하루는 케이트가 건강이 좋지 않아서 변화가 좀 필요하다는 얘기를 했더니 저에게 이렇게 충고했던 기억이 납 니다. ‘나는 절대로 근심하지 않는다네.’ 사촌은 만족스럽게 말했습니다. ‘간에는 최악이야. 자네도 간이 있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는구먼. 내 충고를 받아들여서 기운을 차려보게. 스스로 더 행복해지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될 걸세.’ 그저 수표 한 장을 써서 이 딱한 처녀를 휴가 보내주기만 하면 되는데 말이지요!(90~92쪽)

세’s pick

〈빗장 지른 문〉은 《석류의 씨》의 다른 수록작들에 비해 비교적 덜 주목받은 듯해요. 여성 주인공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주인공 그래니스뿐 아니라 사촌인 렌먼까지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매우 생생한 작품이랍니다. 특히 렌먼이 온갖 종류의 🍈멜론을 애지중지 키운다는 설정이 인상 깊었어요. 작품이 영화화된다면 시각적으로 큰 즐거움을 줄 만한 설정인 듯합니다.

👀 편집자 흄&세가 추천하는 함께 보면 더 좋을 콘텐츠 🙌
스왈로우Swallow(2019) 
주인공 ‘헌터’는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사는 듯 보입니다. 좋은 집, 능력 있는 남편, 곧 태어날 아기까지. 하지만 헌터에게는 은밀한 취미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유리나 송곳처럼 날카로운 물건을 입에 넣어 삼키는 것. 공허함을 느낄수록 욕망은 점점 커지고, 결국 몸에 문제가 생겨 수술까지 받게 되죠. 헌터의 비밀을 알게 된 남편과 시어머니는 사람을 붙여 그녀를 감시합니다. 헌터는 이제 자신의 욕망 그리고 거기에 숨겨진 비밀을 마주하려 합니다.
스토리도, 포스터의 붉은 색감도 《석류의 씨》와 많이 닮았죠?
4개월마다 만나는
하나의 테마, 다섯 편의 클래식

001 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 | 박아람 옮김

002색 여인

엘리자베스 개스켈 | 이리나 옮김

003 석류의 씨

이디스 워튼 | 송은주 옮김

004 사악한 목소리

버넌 리 | 김선형 옮김

005 초대받지 못한 자

도러시 매카들 | 이나경 옮김

💘 C O M I N G   S O O N
시즌 2. 이국의 사랑
삶의 이편에서 저편으로 건너가면 만날 수 있는 사랑의 얼굴

006 베네치아에서의 죽음‧토니오 크뢰거
토마스 만 | 김인순 옮김
007 그녀와 그
조르주 상드 | 조재룡 옮김
008 녹색의 장원
윌리엄 허드슨 | 김선형 옮김
009 폴과 비르지니
베르나르댕 드생피에르 | 김현준 옮김
010 도즈워스
싱클레어 루이스 | 이나경 옮김

사랑의 다양한 얼굴을 보여주는 다섯 작품, 6월에 만나요!🤗 
흄세(휴머니스트 세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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