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5. 노가리 클럽 : 일상을 행복으로 채우는 덕질의 힘

인생의 3분의 2를 덕질로 채워온 사람이자, 주변인 중 3분의 2가 덕후인 사람으로서, 무언가를 몰두해서 좋아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행복의 역치가 낮다는 것이죠. 


행복의 역치가 낮은 덕후는 아주 사소한 것에서도 행복을 건져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최애의 노래 한 번 들으면 기분이 사르르 녹고,  무기력해서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에도 최애 작가의 책장은 잘만 넘어갑니다. 치솟는 짜증도 최애 드라마를 보며 한바탕 욕을 쏟아내고 나면 어느새 가라앉고 금방 괜찮아질 힘을 얻죠. 


다르게 말하면, 이들은 ‘내가 언제 행복한지’를 정확히 아는 사람들이에요. 기분이 곤두박질 칠 때면, 빠르게 행복을 눈앞에 가져오는 방법을 아니까요. 


하지만 이들 역시 하루아침에 이렇게 된 건 아닙니다. 야구선수가 배팅 연습을 하듯 행복의 타율을 높이기 위해서도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덕후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보고, 듣고, 경험하며 자기의 주파수에 꼭 맞는 행복을 찾는 중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노가리클럽 멤버들이 가장 최근에 소비한 문화생활 중 타율이 좋았던 것들을 골라 소개합니다. 희는 지난 달 공연을 다녀온 뒤로 다시금 푹 빠져있는 밴드 <넬>의 음악을, 윻은  여름에 대한 인상을 바꿔준  이수지 작가의 <여름이 온다>, 슬은 배우들의 얼굴을 구경하는 것만으로 황홀해진 <클리닝 업>을 소개합니다. 


최근, 여러분의 감정을 충만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나요? 딱히 없었다면 저희가 차린 상을 은근슬쩍 들이밀어보며, 노가리클럽 다섯번째 영업 시작합니다.

[𝓟𝓵𝓪𝔂𝓵𝓲𝓼𝓽] 일상의 채도를 높이는 음악

밴드 Nell by. 희

 

혹시 어떤 음악 좋아하세요? 예전엔 이런 질문을 받으면 주로 장르로 답했던 것 같아요. (Rock will never die!🤟) 시간의 데이터 속에 겹겹이 쌓인 음악들을 쭉 펼쳐 놓고 보니, 사실 공통적으로 한 장르만 듣는 것도 아니더라고요. 그렇다고 ‘뒤죽박죽 들어요’라고 표현하기엔 너무 명확한 취향이 있어 난감했죠. 오월 초에 넬의 단독 콘서트에 다녀와 아주 푹 빠져 있는데요. 개인적 취향의 집합체 같은 밴드인 넬의 음악으로 하루를 열고 닫다 보니, 좋아하는 음악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해줄 두가지 문장이 수면 위로 두둥실 떠올랐어요.

 

(𝚝𝚛𝚊𝚌𝚔 𝟷) 눈앞의 풍경이 아름다워 보이는 음악

1호선 지상철 안, 문에 기대어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어느 순간 한강 위를 가로질러 가고 있더라고요. 서울에 온지 얼마 안 됐을 땐 공중그네를 타는 듯한 이 순간을 기다렸다가 열심히 창밖 사진을 찍었는데, 서울살이 고작 몇 년 만에 익숙해진 게 새삼스럽더라고요. 그 순간 헤드셋에서 넬의 ‘Promise Me’가 흘러나오는데, 일상의 배경음악이 달라진 것 만으로도 익숙한 풍경이 꽤 아름다워 보이더라고요. 왜, 그런 순간 있잖아요. 뭔가 필터가 씌워진 것처럼 갑자기 세상이 아름다워 보일 때. 그 순간 깨달았죠. 어쩌면 밴드 사운드를 좋아한다기 보단, 인류애가 바닥치는 저 같은 사람마저도 '그래, 세상은 아름다워'하고, 순간을 긍정하게 만들어주는 음악을 좋아한다는 걸요. 또, 내 안에 행복감이 찰랑찰랑하게 차오르는 게 느껴질 정도로 충만한 감정을 끌어 올려주는 음악을 좋아한다는 걸요.

 

(𝚝𝚛𝚊𝚌𝚔 2)  다정한 음악

“우리는 매순간 선택을 하며 살아가잖아요?

남의 시선에 비추어 봤을 때는 좀 다를지언정,

‘내가 진짜 원하는 길을 가보겠다’고 정하는 데

이 노래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적어도 여기 모인 우리는 다름과 틀림을

구분하며 사는 사람들이잖아요?”

– Nell’s Season 2022 공연 중 ‘Dream Catcher’ 소개 멘트

 

보통은 가사의 내용에서 위로를 받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 공연을 통해 작곡가의 제작 의도에도 다정함이 담길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때부터 넬의 음악이 조금 다르게 들리더라고요. (원래는 ‘그냥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 들어줘’, ‘개 같은 날 개만도 못한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까 기분이 좀 그래’ 같은 가사가 들렸는데 말이죠. ㅎㅎ)

 

주변에 넬 공연을 보러 간다고 자랑했더니 가장 많이 들은 말이 “'기억을 걷는 시간' 부른, 그 넬? 중학생 때 많이 들었는데, 진짜 오랜만이다.”였습니다. 대부분 감성 밴드라고 알고 있지만 곡마다 분위기가 천차만별이라, 기분에 따라 듣기 좋은 플레이리스트로 영업을 마무리해봅니다.


 🎵ɴᴇʟʟ

🥺 – 유희

🥰 – A to Z

😭 – 낙엽의 비

😪 – 12 seconds

😄 – Promise Me / 1:03

😆 – Ocean of Light / Love It When It Rains

🐱 – 고양이

😠 – 기생충

🤬 – All This Fxxking Time

여름이 온다. 여름이 왔다.

이수지의 그림책 <여름이 온다> by. 윻


여름이 되면 MBTI 맨 앞 글자가 파워 E에서 은근슬쩍 I로 바뀝니다. 해가 길어질수록 급격히 밖에서 만나는 약속이 줄어들고, 어쩌다 밖에 나가도 30분에 한 번씩 카페와 그늘로 도망을 다니기 바쁘죠. 그런 저에게 <여름이 온다> 만큼 반갑지 않은 문장이 있을까 싶습니다. 처음 책이 나왔을 때 어쩐지 손이 가지 않은 탓도 제목 때문이었던 듯 싶습니다. 여느 그림책과 달리 꽤 두꺼운 두께도 한몫했고요.

(이렇게 글로 적고 보니 정말 옹졸하기 그지없네요.)


그러다 어찌어찌 지난번에 열린 국제 도서전에서 홀린 듯이 책을 사게 됐는데요. 그러고도 방구석에 그대로 방치해둔지 여러 날인지라 죄책감만 쌓여가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영상은 버겁고, 텍스트도 시끄러운 주말, 창밖을 봤는데 구름이 제대로 열 일을 하는 것을 보자마자 필이 짜르르 왔습니다. ‘오늘이다’. 그렇게 비장한 다짐 끝에 책을 펼쳤고, 그대로 여름에 흠뻑 젖어버렸습니다.


<여름이 온다>는 비발디 『사계』 중 「여름」에 영감을 받아 그린 책으로 「여름」의 1, 2, 3악장의 구성을 따라 흘러갑니다. 오케스트라의 입장과 함께 커다란 태양이 초원을 달구는 풍경으로 1악장이 막을 열고 여름 볕 아래서 한바탕 물놀이를 즐기는 아이들의 모습을 다양하게 보여줍니다.


여기서 저기로 쏘아지고, 튀는 물줄기들 사이로 까르르 웃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그림을 보다 보면 마치 내가 거기서 함께 물놀이를 즐기는 것 같죠. 그렇게 정신없이 그림 속 친구들과 물놀이를 즐기다 보면 초록과 파랑이 양쪽으로 한 장씩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우며 1악장이 끝이 납니다.


그리고 오선지 사이로 튀어 오르는 물줄기, 구름이 몰려오는 소리와 함께 2악장이 시작되죠. 정말 비가 내리기 직전의 찰나와 같은 순간처럼 느리지만 빠르게 2악장은 끝이 납니다. 그러고는 이내 사위가 어두워지고 물놀이도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더니, 3악장에 이르러서는 바람이 휘몰아치며 억센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정신없이 비를 구경하고, 맞고, 피하다 보면 음악도 책도 마지막을 만나게 됩니다.


<여름이 온다>는 여름 풍경을 정교하게 그린 그림책은 아닙니다. 하지만 찰나와 같이 지나가는  여름날 어느 순간에 대한 느낌들이 가득 차 있어 더욱 생생한 아이러니가 있죠. 그 그림들을 손으로 짚어가며 한참을 보고 나니 잊고 있었던 여름 추억들이 하나 둘 떠올랐습니다.


김장 배추를 절이는 커다란 갈색 함지박에 배추 대신 들어가 손발이 쪼그라들도록 하늘을 구경하던 일, 아프 도록 떨어지던 장대비가 신기해 한참동안 맞았던 날, 우산 안으로 들이치던 비바람에도 정신없이 웃음만 나던 하굣길, 비구름이 물러간 후 온통 쨍하니 빛나던 하늘과 산과 들의 빛. 여름 싫어 사람으로 살아온 것이 머쓱할 정도로 너무나 귀여운 여름의 순간들이 제 안에 가득했음을 알게 됐습니다.


<여름이 온다>를 읽을 계획이시라면 한 번은 꼭 음악과 함께 감상하는 것을 추천 드립니다. 과몰입에 진심인 저는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 전 악장을 반복 재생하며 이 책을 읽었는데요. 아래 링크는 제가 책을 읽고, 이 글을 쓰며 들었던 이 무지치(I Musici)가 연주한 버전입니다. 이 책을 읽고 마침내 저에게도 여름이 왔듯, 여러분에게도 여러분만의 여름이 찾아오기를 바랍니다.


https://youtu.be/o2dnnqY8enA

7000개의 얼굴

드라마 <클리닝 업> by. 슬


너의 전문 분야가 뭐냐고 물으면 입이 딱 붙어버리는 흔하디흔한 국문과 졸업생이지만, ‘한드’에 관해서만은 자신감이 있습니다. 원래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다고 9시 이후엔 TV를 소등해야 하는 가정 환경이 저를 역설적으로 드라마 광인으로 키워냈거든요. 독립 후 내리 8시간을 달릴 수 있는 정주행 체력을 기르며, 나름대로 각이 나오는 드라마와 아닌 드라마를 감별할 수 있는 기준이 생겼는데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4화’가 그 기준선이었습니다. 드라마 세계관에 대한 설명과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빌드 업을 차근차근 쌓아가는 4분의 1 지점까진 믿고 보는 겁니다. 탈주는 그 이후에 고민하고요. 그런데 요즘엔 '4화의 룰'이 깨지고 있습니다. 10화까지 잘 가다가 갑자기 안드로메다로 순간 이동을 하기도 하고, 마지막 화에서 그동안의 감동을 다 부숴버리는 변종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거든요.

네, 완결 안 난 드라마를 추천하는 게 조심스럽다는 말을 구구절절 하고 있는 건데요. 혹시나 훗날 스토리가 산으로 가더라도 이 두 배우를 보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뚝심 있게 영업해보겠습니다.


사람의 얼굴에는 80개의 근육이 있다고 합니다. 근육으로 만들 수 있는 표정의 개수는 7000여 개고요. 스토리나 연출 같은 요소들을 다 떠나서, 화면에 가득 찬 미세 근육의 정교한 움직임을 감상할 때 느껴지는 희열과 즐거움이 있죠. <클리닝 업>은 그런 재미가 극대화되는 드라마예요. 염정아 배우와 김재화 배우의 7000가지 얼굴을 만날 수 있거든요.


여기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요. 우선 이야기 자체가 주인공들의 표정이 쉴 새 없이 바뀔 만큼 계속 상상 못한 곳으로 튀어갑니다. 용미(염정아 분)와 수자(김재화 분)는 베스티드 투자증권의 용역 미화원이에요. 직원들이 회사 기밀을 떠들면서도 전혀 눈치 보지 않는 풍경 같은 존재. 어느 날 용미는 내부 정보를 거래하는 직원의 통화를 우연히 듣게 됩니다. 핸들이 고장 난 1톤 트럭처럼 ‘빠꾸’라곤 모르는 용미는 작전에 들어갈 종목 이름을 듣기 위해 사무실에 도청기를 설치하자고 단짝인 인경(전소민 분)을 꼬시는데요. 겨우 기회를 잡은 어느 날, 용역 업체 관리자의 끄나풀인 수자에게 이를 들키고 맙니다. 여기까지만 읽어도 ‘헉, 다음엔 어떻게 되는데?’ 싶지 않으신가요? (아니라면 시무룩…)


그동안 해당 배우에게서 자주 보기 어려웠던 캐릭터를 통해 새로운 얼굴을 발견하는 것은 또 얼마나 짜릿하게요. 빚에 쫓기면서도 온라인 도박을 못 끊은 대책 없는 인간인 동시에 딸 둘을 억척스럽게 사랑하는 엄마. 그러니 도덕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작전 종목을 알아내 한탕 벌어봐야겠다는 용미의 얼굴 위로 비애와 오기가 스치는 순간, 염정아 배우의 표현력에 끊임없이 감탄하게 되는 것이에요.


김재화 배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늘 그녀를 짧고 굵게 지나가는 캐릭터로만 만났었는데요. <클리닝 업>에선 직장에선 노련하게 사람들을 구워삶으면서도 가족들에겐 찬밥 신세인 50대 중년 여성의 삶을 굉장한 설득력으로 표현해냅니다. 방에 홀로 앉아 유튜브 영상을 보며 소주 마시는 장면에선 어디가 현실인지 살짝 헷갈릴 정도였어요.


쓰고 보니 자신감을 가져도 될 것 같네요. 이 배우들의 별처럼 많은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경험이 될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보세요, <클리닝 업>!

내입엔영
혀를 쯧쯧 차다 스며든 허위매물 by. 슬

인스타그램 돋보기에서 '아내 카드로 명품 운동화 사온 남편' 영상을 봤을 때는, 남의 불행에 시뻘건 양념을 칠해 전시하는 프로그램이 또 시작했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회차를 거듭할 수록 의외로 유익한 프로그램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위기의 부부들에게 변호사 만나기, 부부 상담, 별거 체험 등의 미션을 제공해 결혼과 이혼을 다각도로 고려할 수 있게 만들어주더라고요. 그래요. 작년에 10만 쌍이 이혼했다는데, 우리도 '잘 이혼하는 법'을 배울 때가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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