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노출 사업장에서 실질적인 개선은 어떻게 이루어 지는지 실제 개선사례를 통해 알아봅니다
직업-건강
2026.11.27
매달 피를 뽑는 사람들
- 현장에서 찾은 해법  
강충원 | 한일병원

“무슨 일하는 노동자가 가축도 아니고, 아니 가축이라도 그러면 안 되죠.”


대통령의 언급으로 널리 알려진 울산의 한 자동차 배터리 회사의 납중독 은폐 사건은 우리에게 새로운 과제를 던졌다.


올해 초부터 불거진 이 사건을 두고 많은 산업보건 전문가들이 비판적 성찰을 이어가며 현 제도의 한계와 대안을 고민해 왔다. 수십 년간 큰 변화가 없었던 사업장은 언론의 집중 보도에 한껏 움츠러들었다. 이 사건은 뒤늦게나마 다시 주목받고 있다. 우리에게는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대통령의 언급처럼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답은 서류가 아니라 현장에 있다"

산업보건 관리의 중요한 원칙이 이 말에 담겨 있다고 믿는다. 나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안전보건공단의 “납 노출 근로자 연구조사”에 건강상담 의사로 참여하게 되었다. 국내의 다양한 배터리 제조업을 비롯해 납 노출 사업장을 방문하며 현장 노동자와 보건관리자, 전문가들의 고민을 들을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내린 결론은 “작업환경 개선 없는 평가는 독”이라는 것이다. 이제 전문가들이 측정이나 검진 같은 평가에만 머무르지 않고,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도록 제도를 바꿔야 한다.

납은 위험한가?

납은 신경계 독성, 심혈관계 독성, 생식독성과 제한된 발암성을 지닌 독성물질로, 잔류성이 높고 생물학적 반감기가 길다. 인체 노출에 안전한 하한 기준이 사실상 없으므로 혈중 납 농도는 가능한 한 낮게 유지해야 한다. 그런데도 특수건강진단을 하는 우리와 작업환경측정 기관은 “노출기준”과 “판정기준”을 넘지 않으면 “안전하고 건강하다”는 잘못된 신호를 보내왔다.

현장에서 확인한 실천 가능한 대안

모든 납 노출 사업장의 관리가 부실한 것은 아니다. 여러 사업장을 방문하면서 납 노출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현장에서 실효성 있는 대안을 실천하는 우수 사례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다만 사업장의 모습을 그대로 공개하는 것은 민감한 문제이므로, 현장 묘사는 일부 각색하고 현장에서 촬영한 사진은 AI 기술을 활용해 그림으로 바꾸었다. 실제 우수 사례의 모습과는 큰 차이가 없다. 이제 하나씩 살펴보자.

모든 곳에 납이 존재한다

납축전지는 납 합금 격자에 산화납을 입혀 극판을 만들고, 조립한 뒤 황산 전해액을 충전하고 포장하는 과정을 거친다. 납은 용융·배합·용접처럼 직접 취급하는 공정뿐 아니라 공장 내 지게차 이동, 청소, 작업복 세탁 등 다양한 과정에서도 노출된다. 식당, 휴게실, 화장실, 사무실에도 납이 존재한다. 바닥을 밟거나 작업복을 입고 이동하고, 작업자의 손이 닿는 곳 어디든 납이 묻을 수 있다.


즉, 노출 수준에는 차이가 있지만 공장 내 모든 구역에서 납을 관리해야 한다. 위험이 어디에나 있지만 해결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떤 방법을 시도하고 있을까?

납 전용 세제와 잔류 납 확인 키트 

A사업장에서는 작업장 내 취식을 금지하고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세면대에 잔류 납을 화학적으로 제거하는 ‘납 전용 세제’와 ‘잔류 납 확인 키트’를 비치한 것이다. 흡연·휴게·식사 시간 전에는 반드시 손을 씻도록 안내한다.


납은 미세한 입자 형태로 피부 주름에 쉽게 끼어 일반 비누와 물만으로는 완전히 제거하기 어렵다. 따라서 마찰을 이용해 씻도록 권장하며, 지나치게 뜨거운 물은 피부 모공을 열어 납 성분의 흡수를 촉진할 수 있으므로 미지근한 물을 사용하도록 안내한다. 납 전용 세제는 납 입자를 화학적으로 결합(킬레이트화)해 세척에 도움을 준다.


다만 가격이 비싸 국내 기업 대부분은 일반 비누를 사용한다. 잔류 납 확인 키트는 손 씻기가 제대로 이루어졌는지 즉시 확인할 수 있어 유용하다.

에어건·빗자루 청소 금지, 전용 진공청소기 사용

A사업장에서는 납 분진을 재비산시키는 빗자루와 에어건 사용을 엄격히 금지한다. 대신 HEPA 필터가 장착된 전용 진공청소기를 사용한다. 이는 공장 설계 단계부터 중앙집중식 진공청소 시스템을 갖췄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놓치기 쉬운 부분이 있다. 특히 단기간 용역 형태로 근무하는 청소 노동자는 납의 위험성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빗자루 청소는 금지되어 있지만, 청소 구역에 진공청소기가 없거나 급히 분진을 치워야 할 때 빗자루를 사용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는 관리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다.

맞춤형 호흡보호구

B사업장에서는 개인별 안면부 밀착도 검사(Fit-test)를 시행하고, 고농도 노출 공정에는 전동식 호흡보호구(PAPR)를 도입해 사용하고 있었다. 노출 위험 수준에 따라 보호구의 종류와 수준을 달리 적용한 것이다.


보호구는 작업자에게 불편할 수 있어 전면적으로 적용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에 이 사업장에서는 작업환경 측정 결과 노출 수준이 높거나 혈중 납 농도가 높은 노동자에게 단계적으로 전동식 호흡보호구를 지급했다. 그 결과 보호구 보급률을 높이고 혈중 납 농도를 낮출 수 있었다.

2차 오염과 간접 노출 관리

B사업장에서는 청소·미화 노동자, 지게차 운전자, 협력사 직원 등 간접 노출 가능성이 높은 인력도 '유사노출군(SEG)'으로 지정해 동일한 위생 지원과 기술적 가이드를 제공하고 있었다. 이들은 납을 직접 취급하지는 않았지만, 혈중 납 농도가 20µg/dL 전후로 높아진 경우가 있었다. 공장 안의 보이지 않는 납 분진에 노출된 결과였다.


이 사업장처럼 협력사 직원에 대한 산업보건 상의 차별을 인식하고 이를 개선하려는 노력은 드물다. 다른 사업장에서 협력사 노동자들을 상담해 보면, 집에 가서 씻거나 작업복을 가정에서 개별 세탁하는 경우가 많았다. 협력사 직원들은 여전히 작업장에서 보이지 않는 차별을 경험하고 있다. 사업장의 보건관리자가 이들에게 필요한 안내와 기술적 지원을 제공하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납 노출 사업장의 개선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1997년부터 국제배터리협회(BCI; Battery Council International)는 OSHA의 강제 규정보다 더 안전한 수준으로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자발적인 혈중 납 농도 감축 프로그램을 도입해 운영해 왔다. 현재 BCI 회원사 노동자 대부분은 혈중 납 농도를 10 µg/dL 미만으로 유지하고 있으며, 개인 모니터링에서 9 µg/dL 이상이 나오면 회사가 크게 우려할 정도라고 한다. 앞서 소개한 사업장의 사례는 본사가 해외가 있었기 때문에, BCI의 국제 기준을 충족하기 위해 회사가 자체적으로 노력한 결과였다.


유럽연합(EU)도 2029년부터 혈중 납 한계값을 15 µg/dL 이하로 대폭 강화할 예정이다. 이는 소량의 납 노출도 체내에 누적되어 독성을 일으킬 수 있으며, 특히 신경계와 신장에 손상을 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노동자가 쓰러지거나 급성 중독 증세를 보이지 않는 수준(40µg/dL이하)으로 관리하는 것이 목표였다면, 현대 산업보건에서는 만성적인 미세 독성과 생식 독성까지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혈중 납 농도를 가능한 한 낮게 관리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한국의 일반적인 납 관리 체계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그렇다고 우리나라에 지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산업안전보건공단의 KOSHA GUIDE H-207-2020 「납과 그 무기화합물 노출 근로자 혈중 납 관리수준 평가지침」은 납 노출 관리의 주요 원칙을 잘 제시한다. 그러나 이 지침은 사업장의 자율 규정으로 활용되지도, 규제 기준으로 적용되지도 않는다.


다만 특수건강진단제도에서는 사후관리 원칙, 즉 혈중 납 농도가 30µg/dL 이상이면 2개월마다 추적검사를 하도록 하는 기준만 엄격하게 적용된다. 그러다 보니 작업환경을 개선하기보다 개인의 혈중 납 농도를 낮추는 데 초점을 둔 관리 체계가 만들어졌다.


혈중 납 기준 관리 체계의 유용성과 한계

사업장 노동자들과의 면담에 따르면, 납 노출 사업장에서는 혈중 납 농도가 20~29µg/dL인 노동자들을 집중 관리 대상으로 정하고 특수건강진단을 준비한다.


이들의 혈중 납 농도가 C1 판정 기준인 30µg/dL을 초과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금연과 손 씻기 같은 생활 습관의 변화, 전동식 호흡보호구 사용이나 안면부 밀착도 검사(Fit-test), 세탁·청소 방식, 보안경 등 보호구 착용, 환기, 마스크 없이 작업하는 옆 공정에서의 간접 노출 등에 따라 자신의 혈중 납 농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살피면서 스스로 관리하는 능력을 키우기도 한다. 사업장에서는 매일 2리터 이상의 수분 섭취를 권고하거나 식사 시간에 칼슘제나 우유를 제공하는 등 개인의 혈중 납 농도를 낮추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기도 한다.


그러다 일부 사업장은 선을 넘었다.


따라서 혈중 납 농도를 단일 지표로 삼는 평가를 넘어설 필요가 있다. 현재 안전보건공단에서 실시하는 역학연구처럼 표면 납 오염도 측정(surface wipe sampling), 집진설비의 적절성, 작업환경 관리, 공학적 제어, 개인보호구의 적정성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선행지표 중심의 다차원 평가 모형'을 도입하는 것이 실효성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


납 노출 사업장 적정관리 인증체계를 만든다면

전문가로 구성된 인증평가단이 사업장의 납 관리체계를 종합적으로 평가해 우수한 사업장에는 4년 주기의 인증과 인센티브를 부여하고, 개선이 필요한 사업장에는 밀착 컨설팅을 제공한 뒤 1년 또는 2년 후 재평가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증체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업계의 노력이다. BCI처럼 국내 납축전지 제조 및 재활용 업계가 자체적인 납 노출 관리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자율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산업안전보건공단 등 공공영역과 민간영역의 전문가들은 '정밀진단자 및 현장 기술 컨설턴트'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장 노동자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실질적인 '개선'이다. 현장에서 실행 가능한 대안들을 하나씩 적용해 나갈 때, 안전한 사업장과 노동자의 건강권은 비로소 보장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