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나만 알고싶다, 낙성대 <사케바 히토리>

2022.10.05.

어릴 적, 나만의 아지트 구성요소는 단 2개였다.

하나, 나무 의자 2개와 담요로 만든 간이텐트.
둘, 그칠 줄 모르는 할머니의 간식.

내 어린 시절은 언제나 아늑함과 배부름이 공존했다.

어른이 된 지금, 담요는 세월에 덮이고 더 이상 의자 2개 아래에 숨을 수 없을 만큼 집채만한 책임감의 소유자가 되었다. 그뿐이던가, 늘 위풍당당해 보였던 할머니는 이제 당신의 마른 어깨를 내게 기대셔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아지트를 잊고 산다.

천진함을 잃어버린 어른은, 퇴근 후 어느 이자카야에서 힘겹게 술잔을 들었다. 그런데 주문한 메뉴 말고도 여러 음식이 연이어 나온다. 술안주는 절대 아끼지 않는다는 사장님의 따스한 진심에서, 어릴 적 할머니의 인심이 떠올랐다. 덕분에 마음도 배도 잔뜩 불린 채 가게 문을 나서며 다짐했다. ‘이곳을 아지트로 삼아야겠다.’

사케바 히토리는 낙성대입구역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의 구석진 자리에 위치한다. 들어가 보니 좁은 통로에 10명 정도 앉을 수 있는 아늑한 다찌석*이 전부이다. 바글바글한 술집 분위기를 싫어한다면 이곳이다. 보통 작은 가게들은 짐을 둘 공간이 없어 망설여지는데, 이곳은 좌석 바로 뒤에 가방과 옷가지를 걸어둘 수 있어 편리하다. 다찌석 뒤로 오픈 키친에서 바지런히 요리하는 모습, 그리고 한쪽 벽을 가득 메운 술병들이 눈에 들어온다. 탭 비어처럼 병을 거꾸로 매달아 잔에 소량을 담아 내어놓는, 이른바 잔 사케를 판매하고 있었다.

단체 예약 손님들이 오면 내 자리는 없는 걸까, 하는 걱정도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걱정하지 말자. ‘히토리’는 ‘한 사람’을 뜻한다. 상호를 반영하듯 이곳은 혼술 맛집으로 유명하다. 한번에 2인까지만 방문할 수 있다. 혹시나 자리가 없을 수 있으니 방문 전에 전화로 문의하는 것을 추천한다.

*다찌석 : 요리사와 마주 보고 앉을 수 있는 자리. 주로 기다란 형태의 바 테이블 자리를 통칭한다.

여느 이자카야처럼 다양한 해산물 요리가 메인으로 준비되어 있다. 물론, 해산물을 즐기지 못하는 손님들을 위한 고기 요리도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길.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 이 글을 먼 미래에서 보고 있다면, 히토리의 메뉴판은 현재의 사진과 분명히 다를 것이다. 분기별로 제철 재료를 활용한 메뉴를 준비하기 때문이다. 철마다 사시미의 종류가 바뀐다. 어떤 메뉴를 먹게 될지 예측하지 못한다는 점이 가장 흥미롭다.

쿨민트 그린 쇼츄
도수 : 26.0%

가격 : 잔- 12,000원 / 바틀- 140,000원

바나나 향을 내는 ‘가고시마 산 향기 효모 1호’*를 사용한 증류식 고구마 소주다. 증류 후, 처음에는 바나나 향이 나지만 이후 민트 향으로 변한다. 병에 그려진 펭귄이 사는 북극 마냥, 매우 강력한 민트향을 주지는 않고 은은한 청량감 정도만 느껴지니 겁먹지 말자. 가볍고 시원한 맛을 가진 술이기에, 사시미나 튀김 같은 가벼운 안주에 잘 어울린다. 처음 마실 때 민트 향이 강하다고 느껴진다면, 온더락**으로 마시는 걸 추천한다.

*가고시마 산 향기 효모 1호 : 증류식 소주의 전용 효모 중 하나이다. 고구마 소주는 원료가 갖는 특성, 발효와 숙성 방법에 따라서 제품의 품질이 달라지는데, 현재 가고시마 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업체들이 개발 중이다.

**온더락 : 글래스에 미리 얼음을 넣고 그 위에 술을 따라 마시는 것. 바위 같은 얼음 위에 따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그노리아 쇼츄
도수 : 27.1%
가격 : 잔- 12,000원 / 바틀- 140,000원

‘써니크림 고구마 소주’ 라고도 불린다. 앞서 소개한 쿨민트 그린과 증류 방식은 동일하지만, 고구마, 누룩, 효모 중 쌀누룩의 비율을 높였기 때문에 달달한 향이 더 많이 느껴진다. 쇼츄는 깔끔한 텍스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건 굉장히 크리미하다. 바나나, 그리고 바닐라 향이 물씬 풍기며 혀 바깥쪽을 알싸하게 훑고 지나간다.

안주 없이도 가볍게 마실 수 있는 쇼츄를 찾는다면 더할 나위 없다. 하지만 담백한 생선회에 곁들인다면, 술이 가진 고유의 달달한 향이 묻히게 될 수 있으니 참고하자. 달콤함과 짭짤함은 서로 보완해 주기 때문에, 양념이 묻은 요리에 페어링 하는 것을 추천한다.

백년의 고독
도수 : 40.0%
가격 : 잔- 25,000원 / 바틀- 280,000원

1985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백년의 고독>과 이름이 똑같다. 소설의 내용이 한 가문의 100년사를 다루며, 동시에 구로키혼텐 양조장의 창립 100주년과 같은 해에 일본으로 번역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이름은 보리소주가 오크통 속에 갇혀 홀로 숙성되는 시간이 긴 고독의 시간이라고 느껴진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쉽게 구할 수 없는 술이라고 한다. 어쩐지, 잔부터 지금껏 나온 잔들과 다르다. 술을 맛있고, 멋있게 즐겨야 할 것 같은 잔이다. 1985년, 구로키혼텐 양조장의 100년을 기념해 4대 사장이 떡갈나무 오크통에서 3~5년 숙성한 프리미엄 보리소주이다. 위스키와 비슷할 것이라는 사장님의 말에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한 입 마셔보니 높은 도수임에도 단맛이 느껴지고, 혀끝에 보리의 고소함이 머무르다 이내 실키하게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색, 향, 그리고 맛까지, 모두 ‘진함’의 삼위일체를 이룬다.

시마아지 사시미

가격 : 30,000원

고소한 풍미와 육즙으로 도배된 사시미. 생선의 사각거리는 식감이 일품이다. 고등어 회의 감칠맛을 닮았고, 생김새도 비슷하다. 시마아지(줄무늬 전갱이)를 도톰하게 썰어내어, 약간 기름지다고 느낄 수 있다. 함께 나오는 짭짤한 곁들임 채소가 감칠맛을 확 살려준다. 등 푸른 생선 특유의 비린내는 사케로 말끔히 씻어내보자.

쫄복 가라아게

가격 : 22,000원

이름에 ‘쫄’지 말자. 설마 독을 먹었을까. 요즘은 가라아게 전용 복어살이 따로 손질되어 나온다니, 걱정 말고 즐겨도 좋겠다. 바삭한 튀김옷 아래로 촉촉한 복어살이 혓바닥 위에서 춤춘다. 말 그대로 춤춘다. 처음에는 조금 뜨겁기 때문이다. 따로 준비된 마요네즈와 간장 소스를 찍어먹으면 색다른 맛을 즐 길 수 있다. 이때, 쿨민트 그린을 온더락 잔에 부어 마셔보자. 쿨링된 민트 향이 기름진 입안을 시원하게 헹궈준다. 일반 복어 튀김과 비교했을 때 식감 면에서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회로 먹어야 더 탱탱하고 쫄깃한 식감을 맛볼 수 있으니 참고하자.

나폴리탄 파스타

15,000원

일본의 가정식 중 하나이다. 일반적인 나폴리탄 파스타는 케첩의 맛만 살짝 느껴지는데, 이곳은 웍에 볶아내어 불향이 코팅된 소스와 면발을 함께 즐길 수 있다. 소스에 버무렸다는 느낌 보다는 볶음 파스타의 느낌이 더 강했다. 노른자를 톡 터뜨려 비벼준 후, 뽀득한 소세지를 함께 먹는다. 더 이상 말이 필요없는 맛이다. 개인적으로, 위에 소개한 쇼츄나 사케보다는 하이볼에 좀더 잘 어울리는 맛이었다. 메뉴판 뒤쪽에 하이볼 메뉴도 따로 준비되어 있으니, 파스타 주문 시 참고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