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들 무렵> (감독 정승오)
독립영화 큐레이션 레터 by. 인디스페이스
vol. 330 〈철들 무렵〉
10월 21일 오늘의 큐 💡   
Q. 영원히 철드는 중?
점점 봄과 가을이 사라진다더니, 그 말을 온몸으로 실감하는 요즘입니다. 마치 겨울처럼 쌀쌀해진 아침 공기에 오늘 처음으로 얇은 머플러를 꺼냈어요. 분명 지난 주엔 이렇게 춥지 않았는데요. 인디즈 큐를 보내드릴 때마다 날씨가 달라지다니! 다음 주의 날씨는 또 얼마나 변화무쌍할지, 설레면서도 조금은 두렵습니다.
오늘은 빠르게 변하는 날씨를 닮은 영화, 정승오 감독의 신작 〈철들 무렵〉을 소개합니다. 열심히 연기 활동을 이어 가지만 아직 주연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정미(하윤경)', 암 말기 판정을 받고 힘이 빠진 아빠 '철택(기주봉)', 복지센터에 다니며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할머니 '옥남(원미원)', 그리고 전원생활을 즐기던 중 옥남을 보살피게 된 '현숙(양말복)'의 이야기입니다. 각자의 사정을 마음속에 깊이 묻어 둔 채, 정미는 철택을 간병하고 현숙은 옥남과 함께 지내게 되죠.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우리 가족의 모습과 닮은 것 같기도 한 모습들이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스크린 위에 생생하게 되살아나게 됩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지만 나이도 다르고 생각도 천차만별인 인물들을 바라보며 영화의 제목 '철들 무렵'이 의미하는 바를 곱씹게 됩니다. 서른의 한창때에도, 구순 잔치를 여는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철들어 가는 중인 것 같아요. 하루의 작은 사건들이 모여 커다란 인생을 만들고 그 안에 매일의 비바람과 햇살이 쌓여 한 사람을 만들어 간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새로운 영화를 보는 이유도 저마다 조금씩 철들어 가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소개해 드리는 영화들이 우리를 조금 더 성숙하게 만들어 주길 바라며, 모두들 환절기 감기 조심하세요. 🤧😷
🎥 오늘 만나 볼 이야기

1. 〈철들 무렵〉 리뷰|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2. 〈장손〉과 함께|세상은 변하고, 그럼에도 여전히
3. 〈새들이 돌아오는 시간〉, 〈이장〉과 함께|정승오 감독 탐구생활
4. 〈나만 없는 집〉 같이 보기|지금은 철들어 가는 중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철들 무렵〉

이상하게도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너무 잘 알아듣게 되는 순간이 있다. 〈철들 무렵〉은 그런 순간들로 빼곡하다. 병원에서 간병을 하다 별것 아닌 일로 싸움이 붙고, 걱정하면서도 퉁명스러운 말이 먼저 튀어나오고, 정작 해야 할 말 앞에서는 입을 다문다. 그 마음을 하나하나 설명해주는 사람은 없는데 이상하게도 안다. 왜 저 순간에 저런 말이 나왔는지, 왜 대답하지 않았는지, 왜 저렇게까지 짜증을 냈는지.
그러다 문득 병원의 공기가 떠올랐다. 너무 밝은 조명과 차가운 바닥, 복도를 오가는 사람들의 발소리, 오래 머물수록 조금씩 무뎌지는 서늘함. 스크린에서는 냄새도 온도도 전해질 리 없는데 이상하게 그곳의 공기를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속 가족이 나의 가족인 것도, 그 병원이 내가 아는 병원인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마 너무 오래 보고 들어온 것에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모양이다. 모국어가 그렇다. 같은 ‘괜찮아’도 정말 괜찮다는 뜻인지, 이제 그만 묻으라는 뜻인지, 하나도 괜찮지 않다는 뜻인지 우리는 제법 잘 알아듣는다. 말끝과 뜸, 끝내 삼켜버린 문장까지도 마음의 일부가 된다. 모국어란 어쩌면 말보다 먼저 알아듣는 것들의 이름인지도 모른다.
〈철들 무렵〉의 가족들도 그렇다. 서로를 위하는 마음과 지긋지긋해하는 마음을 굳이 분리하지 않는다. 아픈 사람을 걱정하다가도 화를 내고, 가족이니까 곁에 있으면서도 가족이기 때문에 가장 모진 말을 한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로 정리하기에는 너무 오래 함께 살아버린 사람들의 마음이다.
영화는 그 마음의 빈칸을 채우지 않는다. 사람들이 말하고, 멈추고, 밥을 먹고, 간병하고, 싸우고, 다시 곁에 있는 모습을 가만히 내버려둔다. 그런데 그 틈을 알아듣는 일은 이상하리만큼 어렵지 않다. 걱정한다는 말 대신 밥을 먹었느냐고 묻고, 미안하다는 말 대신 무언가를 챙겨주는 이상한 언어를 우리 역시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철들 무렵〉을 보는 일은 낯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해하기보다 이미 알고 있던 무언가를 계속해서 알아보는 일에 가까웠다. 
생각해보면 이 영화의 제목에서 마음에 남는 것도 ‘철들다’보다 ‘무렵’이라는 말이다. 철이 드는 순간에는 정확한 날짜가 없다. 오늘까지 철이 없었다가 내일부터 갑자기 어른이 되는 사람은 없다. 사람이 늙어가는 것도, 부모가 조금씩 작아지는 것도, 자식이 어느새 부모의 걱정을 하기 시작하는 것도 그렇다. 삶의 중요한 변화들은 좀처럼 자신이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는다.
〈철들 무렵〉의 사람들도 누군가의 병 앞에서 갑자기 철이 들거나 오래 묵은 마음을 말끔히 털어내지 않는다. 여전히 제 삶이 버겁고, 가족이 미우며, 그래서 싸우고 또 곁에 남는다. 다만 우리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밥을 먹고 싸우는 사이, 말과 말 사이의 빈칸에서 무언가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그때는 알지 못한다. 말하지 않은 마음을 나중에서야 알아듣듯, 사람이 변한 순간도 지나고 나서야 어느새 알아차린다. 그 무렵부터였다는 걸.
인디즈 정다원

〈철들 무렵〉

감독 정승오

출연 하윤경, 기주봉, 양말복, 원미원

105분|극영화|2026


유.아.독.존 철부지 시한부 아빠
고.군.분.투 명배우 지망생 딸
유.유.자.적 싱글 라이프 엄마

제 코가 석자인데, 서로가 서로를 책임져야 하는 세 사람.

원하는 건 건강한 내일과 완전한 자유뿐.
효도는 계약서로, 독립은 선전포고로.

피는 물보다 진하지만, 그래서 더 지긋지긋한 이 가족의 철들 무렵.

세상은 변하고, 그럼에도 여전히
〈철들 무렵〉 그리고 〈장손〉

정미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닌 전사가 필요한 역할을 맡아야 된다 말한다. 전생에 자신이 여왕의 무당이었음을 고하며 피 분장을 닦아내고, 몸을 쓰느라 결린 군데군데에 파스를 여럿 붙인다. 한편, 〈철들 무렵〉은 술로 하루를 사는 철택과 고요한 주택 생활을 즐기는 현숙, 복지 센터에 다니는 옥남을 그려낸다. 옥남의 긴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그리 길지 않고, 꽤나 짓궂은 구석이 있다.  
우선 나열된 네 명의 관계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별거한 지 오래된 부부와 그들의 딸, 현숙의 엄마 옥남까지 피로 엮인 가족인 것. 기존의 관계는 철택이 암 말기 진단을 받으며 전복된다. 자식이었던 정미와 현숙은 철택과 옥남의 보호자 역할을 맡기 시작했고, 사람을 잃을까 걱정하던 시절을 지나, 이들은 어느새 그 사람을 귀찮아하는 시점에 도착한다. 철들지 않는 순간의 설익은 말들이 서로를 향해 오갈 때, 홀로 영위하는 시간을 존중받지 못할 때에 이들은 서로의 자리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인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지난한 효도의 특수성과 타협하지 않는다. 부모가 자식을 외면하고 자기의 생을 택할 권리와 철저히 계산한 돌봄의 보상을 요구한다. 숨길 법도 한 감정을 모조리 꺼내 불편한 시원함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간 이들의 결말은 어쨌거나 해피엔딩의 모양을 띤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철택의 건강뿐, 가족에게 닥친 사건은 누구의 삶도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했다. 그저 각자의 삶에 한 편의 서사를 덧붙였을 뿐이다.

가족을 위해 누군가는 자신의 삶을 뒤로 미뤄야 한다. 그 역할은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오정민 감독의 〈장손〉에서는 돌봄에서 비껴난 인물이 존재한다.  
고향 집으로 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든다. 짐을 짊어진 채 늦게 도착한 성진을 온 가족이 반기며 맞이하지만, 성진의 마음은 불편하기만 하다.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기대를 한몸에 받는 성진은 돌봄과 살림의 자리에서는 자유롭다. 제사를 준비하고, 집안을 돌보는 일, 가족의 뒤를 살피는 일은 그의 몫이 아니다. 가장 큰 기대를 받는 사람이 역설적으로 가족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어놓는 일과는 무관하다. 이 지독한 불균형을 영화는 쉽게 판단하지 않는다. 성진에게도 가족의 뜻을 거스르고 떠날 권리가 있다. 다만, 그가 떠난 자리를 대신 지키는 사람은 여전히 존재한다. ‘효’라는 이름 아래 요구되는 의무는 모두에게 같은 무게로 주어지지 않는다.

인디즈 박은아

〈장손〉

감독 오정민

출연 강승호, 우상전, 손숙, 차미경, 오만석, 안민영, 정재은, 서현철, 김시은, 강태우

121분|극영화|2024


3대 대가족이 모두 모인 제삿날 일가의 명줄이 달린 가업 두부공장 운영 문제로 가족들이 다투는 와중, 장손 ‘성진’은 그 은혜로운 밥줄을 잇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설상가상 갑작스레 맞닥뜨린 예기치 못한 이별로 가족 간의 갈등은 극에 달하는데… 

🔎 정승오 감독 탐구생활

〈철들 무렵〉을 연출한 정승오 감독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키워드, 바로 '가족'입니다. 영화에는 옥남과 현숙&철택, 그리고 정미로 이어지는 3대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요. 서로 질긴 인연을 물고 태어나 얽히고설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이 이어지죠. 정승오 감독의 전작들에서도 비슷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2016년 단편 〈새들이 돌아오는 시간〉과 2020년 장편 〈이장〉을 소개해요. 두 영화 모두 가족을 둘러싼 사건이 벌어지고, 한자리에 모인 가족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웅다웅 애쓰는 모습을 다루고 있습니다. 비슷하지만 각자 다른 매력을 가진 두 편의 영화를 만나보세요. 

〈새들이 돌아오는 시간〉

감독 정승오

출연 이영석, 전소현, 장리우, 전하나, 김새벽

21분|극영화|2016


엄마에게 병문안을 가기 위해 오랜만에 모인 가족들. 한자리에 모여 앉아 정답고 모진 말들을 내뱉고 그 말을 받아내는 이들의 서로에 대한 관심은 점차 불평으로 이어지고, 그렇게 한 가족의 하루가 지나간다.

〈이장〉

감독 정승오

출연 장리우, 이선희, 공민정, 윤금선아, 곽민규, 강민준

94분|극영화|2020


a.k.a 살림 밑천 장녀 혜영

믿을 건 돈이라고 외치는 둘째 금옥

결혼을 앞둔 참견의 여왕 금희

아무도 못 말리는 돌직구 혜연

그리고 VIP 막내 아들 승락


아버지 묘 이장을 위해 흩어져 지낸 오남매가 오랜만에 모이며 세기말적 가부장제와 작별을 고하는 이야기

👧 지금은 철들어 가는 중 

철들기 위해 열심히 달려가는 소녀를 소개합니다. 김현정 감독의 〈나만 없는 집〉이에요. 아마 2017년쯤의 영화제에서 이 단편영화를 관람하신 분이 많을 것 같아요. 미쟝센단편영화제 대상은 물론 서울독립영화제 관객상을 받으며 당시 큰 입소문을 탔던 영화인데요. 〈철들 무렵〉의 세 어른이 철들 궁리를 아직도(!) 하고 있다면, 〈나만 없는 집〉의 세영(김민서)은 조금 이르게 철이 들고 있습니다. 걸스카우트가 하고 싶지만, 언니 선영(박지후)이 먼저 하고 있다는 이유로 포기해야 하는 세영의 마음은 누가 달랠 수 있을까요? 철들기 위해서는 가끔 자신을 달랠 필요가 있는 법, 세영은 조금 일찍 알아챈 것 같아요. 〈나만 없는 집〉은 아래 KMDB에서 청소년 추천 영화로 함께 만나보세요! 

〈나만 없는 집〉

감독 김현정

출연 김민서, 박지후

33분|극영화|2017


1998년 봄. 이제 4학년이 된 세영은 걸스카우트를 하고 싶다. 하지만 세영은 언니 선영으로 인해 예상치 못한 반대를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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