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카페에 갔다가 캐럴을 들었다. 하반기 행사로 노트북과 함께 몸부림을 치고 있는 와중에 크리스마스 음악이라니. 난 아직 한 해를 마감할 준비를 하지 못했는데. 찬바람이 발목을 휘감아 가뜩이나 오래 버티기 힘들었던 공간에서 마음이 헛헛해졌다. 대체 난 올해 뭘 했나. 이참에 지난 [단련일기]를 읽어 봤다. 글을 남겨놓으니 이런 점이 좋구나. 요즘 자꾸 멍해지고 의욕을 잃어서 번아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올해 초에도 똑같이 번아웃을 느끼고 있었다. 거참.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라니.

‘돈과 자기만의 방’으로 연재를 하며 내가 가진 배포를 키우고, 경제 지식을 쌓으면서 현실 감각을 익히고 싶었다. 그래서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고 일과 생활의 균형을 찾았으면 했다. ‘그렇게 된다면 나는 너그러운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야',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하지만 나라는 사람을 전복하기엔 일 년의 시간이 너무 짧았나 보다. 집 재계약 시즌이 다가와서 서류를 작성하며 깨달았다. 조금도 달라진 게 없는 나의 모습. 소득 증명서를 떼서 12로 나누니 아주 소박한 결괏값에 민망함이 몰려왔다. 이 돈으로 살았다는 게 놀라우면서도 정말 더 놀라운 건 2년 전 서류에 적었던 월 소득과 지금이 하나 달라진 게 없다는 사실이다. 지난 몇 개월 동안 [단련일기]의 과제로 부동산 관련 책도 읽고 유튜브 영상도 보며 아,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사는구나. 내가 원하는 집의 조건을 상상하며 들뜨기도 했는데, 다 헛된 꿈이었나보다.

단톡방에 오랜만에 알림이 떴다. 한 명은 캐나다, 한 명은 영국, 한 명은 대구, 한 명은 울산에 사는 친구들과의 채팅방. 국내에 있는 친구 중 한 명이 곧 말레이시아로 이주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전했다. 야, 이 방 왤케 글로벌해. 그런데 친구는 침울했다. 지난 몇 년 동안 일에 대한 회의감과 다가올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힘들었다고 한다. 어쩌면 터닝포인트가 될지도 모른다며 말레이시아행을 결심했다고 한다. 생각한 걸 실천으로 옮기는 모습이 멋진데. 평소 같으면 단톡방에서 묵묵히 있을 나였지만, 이날은 어떤 울림이 있었는지 ‘에휴. 나도 지금 이 패턴에서 좀 벗어나고 싶은데. 시즌 3 정도 필요함. 마흔 앞두고 다들 그런 건가. 나는 겨울에 치앙마이로 도망갈까 고민 중 ㅋㅋ 너 말레이시아에 있으면 거기 들러봐도 되겠다!’ 라며 답장을 보냈다. 신세 한탄이 좀 포함되어 있지만 내 나름의 공감과 위로였달까. 근데 오히려 친구들이 나의 치앙마이행을 찬성하며 응원해줬다. 아, 감동. 5, 6년 전부터 가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이런저런 핑계로 가보지 못한 곳이었다. 나도 그곳에 가면 터닝포인트를 발견할 수 있으려나.

대화 이후로 ‘시즌 3’이라는 말이 입 안에 자꾸 맴돈다. 왜 시즌3이지. 시즌 1은 아마도 대학 졸업 후 경제적 독립을 하면서 시작되었을 거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일로 어떻게 가야 할지 서투르게 방황하다가 한국이 지겨워 캐나다로 갔다. 실컷 다른 자아로 놀다가 이제는 뭔가 하나에 정착하고 싶어 시즌 1을 종료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시즌 2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림 그리는 일을 업으로 삼고 버티는 게 시즌 2의 내용이다. 예상치 못한 어드벤처로 나름 재미있었지만, 어딘가 짠 내 나는 이야기의 반복으로 이제 슬슬 지루해지고 있다. 우우- ‘황집중의 세포’들이 있다면 에피소드에 같은 내용을 우려먹고 있다고 야유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혹은 집안일 세포가 재판받고 있을지도) 

일과 생활의 균형을 잃고 또 지저분해진 방을 보며 나는 혀를 끌끌 차고 있다. ‘이번 일만 끝나면 방 정리해야지.’ 작년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결심. 시행착오를 겪으며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지만, 한 번만 더 반복했다간 시리즈가 아예 망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든다. 시즌 2를 마쳐야 할 때가 왔구나. 근데 엔딩은 어떻게 하지. 이런저런 생각 때문인지 오랜만에 불면증이 찾아왔다. 새벽 3시라는 짜증 나는 숫자를 애써 무시하고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갑자기 침대 맞은편에 있는 책장에서 책을 모조리 뺐다. 그리고 바닥에 차곡차곡 쌓았다. 한쪽은 일과 관련된 책, 나머지는 취미와 라이프 스타일과 관련된 걸로. 아닌 밤중에 몸을 썼더니 땀이 삐질삐질 났다. 목덜미까지 세수하고 침대에 걸터앉아 빈 책장을 바라보았다. 같아지지 않을 거야. 눈알을 굴려 침대를, 책상을, 하며 방 배치를 머릿속에서 바꿔 본다. 그리고 눈여겨보던 책장을 질러버렸다.

새 책장이 오면 거기에 들어갈 만큼만 남기고 나머진 다 처분해야지. 꼭 필요한 것만 소유하고 내가 무얼 원하는지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돈과 자기만의 방은 나를 알아가는 수단으로써 필요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새벽 5시. 밝아오는 창을 무시하고 다시 잠을 청했다. 책장이 도착하면 나는 달라질 거야. 시즌 3을 기약하며 ‘돈과 자기만의 방' 연재의 마지막 글을 쓴다.

미셸 투르니에 산문집 <짧은 글 긴 침묵> 

지난 호 단련일기에 작업실로 짐을 옮기고 나니 집이 심심한 공간이 되었다고 썼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 질서가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해야겠다. 식탁이 없어서 싱크대나 책장 위에 그릇을 놓고 밥을 먹고, 수납할 곳이 없어 자잘한 잡동사니는 몇 달째 상자 안에 들어가서 나오질 못하고 있다. 식탁을 살까? 책상을 살까? 서랍을 살까? 고민하다 보면 그냥 다시 다 사버릴까?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러자면 이전의 생활과 다를 게 없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민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무엇을 선택해도 내 삶이 크게 바뀔 것 같지는 않기도 하고. 비슷비슷한 선택지 사이에서 고민만 하다가 선택하기를 포기하고 계절이 바뀌었다. 나도 다음 계절로 넘어가야 할 것 같은데 새로운 생활은 불편하고 이전의 익숙함으로 돌아가는 건 내키지 않아 어정쩡한 곳에서 멈춰 서있다. 

미섈 투르니에 산문집 <짧은 글 긴 침묵>을 펼쳤다. 이 책에는 내가 좋아하는 ‘집’에 관한 문장으로 가득 찬 한 편의 글이 있다. 제목은 <거북이와 고양이>이다.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25년 전 내가 이 집에 처음 이사 왔을 때

유난히 마음에 드는 것은 그 텅 비어 있음과

가구 하나 없는 방들에서만 느낄 수 있는 낭랑한 울림,

그리고 작가인 나에게는 백지의 흰색을 연상시키는

그 벌거벗음이었다.

그는 자신의 집에 있는 물건 하나하나가 그 집에서 지낸 모든 나날들로 만들어져있다고 썼다. 집은 자신의 움직임과 몸짓이 만들어 낸, 일상생활을 찍어낸 정확한 틀이라고. 하지만 그처럼 세련되게 정돈해 놓은 생활에도 단점은 있다. 사람을 거북이처럼 둔하게 하고, 슬그머니 늙어가게 만든다는 것. 

그는 이렇게 말한다.

가끔 나는 그만 걷어치우고 해방감을

맛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팔아버리자. 모두 작파해버리자.

엄청나게 쌓인 이 허섭 쓰레기들을,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나의 모든 습관을 버리자.

그리고 제로에서 다시 시작하는 거다.

올해 초, 그리고 그 이전부터 나 역시 무수히 했던 생각.

하지만 그는 이내 이렇게 고백한다. 

그러나 내가 살고 있는 이 사제관을 배반한다는 것은

한쪽 팔이나 한쪽 다리를 자르는 것이나 다름없다.

또한 고양이처럼 한곳에 깊게 뿌리내린 붙박이 삶도 역시 자신에게 큰 매혹으로 작용한다고 말한다. 이 글을 다시 읽고 공간을 바꾼다는 건 하루하루의 생활을 바꾸는 일이고 생활은 곧 삶이기에, 삶을 바꾸는 과정에서 들려오는 잡음과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같은 자신을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