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완연한 비 오는 날 땅으로부터 무언가 식어져 푸르르 몸을 푸는 듯한 넓고도 따스한 내음, 푹 쪄낸 떡이 늘어졌다가 다시 팽팽하게 죄어들며 몸을 굳힐 때, 아차 하며 열어보자 냄비 뚜껑에 맺힌 단단한 쌀 내음, 뜨거운 김에 풀어진 찻잎이 뱉어내는 좋은 침 냄새라고 마음껏 말하고픈 난향, 목에 넘기며 맛을 감지하는 때의 아쉬움으로 가득한 가운데, 순간 공기를 일으켜 또렷한 판형으로 지어낸 상서로운 감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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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모양 토기, 울산 중산리 유적, 원삼국 3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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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내 향과 더불어 일하고 고민하며 지난 겨울을 보냈습니다. 자연스럽고 고요함으로써 장 끌로드 엘레나 Jean-Claude Ellena는 프랜시스 커정 Francis Kurkdjian과 다른 방식으로 혁신하였음을, 바나베 피용 Barnabé Fillion은 계속되는 지옥과도 같은 두터운 잔향을 의도했음을, 더불어 고려의 향 문화와 향로, 차 맛에서의 향이 앞세우는 기운이라거나 좀 더 깊은 지점에서 목 언저리에 자리 잡는 침향차에 이르기까지 일하며 여러 곳에서 그 향에 귀 기울이고 감탄하면서 향이 돋우는 감각에 대해서 나름대로 꼭지점을 이어가며 개인적, 또 사회적으로 다양한 측면에서의 향의 특수성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일선의 현장에서는 향에 관련한 디자인을 준비하며 시향 어플리케이터, 블로팅 페이퍼 같은 것들을 종이며 금속, 문집의 셀렉션이나 큐레이션 등으로, 마치 피부에 향을 얹듯 그야말로 도포하는 프로젝트며, 멀티 센서리 Multi-Sensory 경험으로써 브랜드 공간을 정립하는 일의 기획과 디자인에 참여하고 있기도 합니다.
한편, 아라비는 한자로 阿羅飛라고 씁니다. 회사를 설립하는 시기 여러가지 정의를 한꺼번에 내리던 시절, 독음에서 부족한 확장성을 불어넣고자 한자를 앉혔습니다. 아라 阿羅는 6세기 신라제국에 속해진 500년 역사를 오롯하게 지닌 가야, 6국 중에서도 세력이 컸던 것으로 연구되는 '아라가야'와 같은 자, 그리고 비 飛, '날으는 새'를 붙여 쓴 것으로, 자연에 깃들고 문화로 융성하는 것을 일로 삼고픈 의도를 품었습니다. 여기에서의 '새'는 이곳저곳, 때로는 죽은 자와 산 자를 융통하는 매개이기도 합니다. 마치 새처럼, 있음과 없음의 경계에서 노니는 감각으로써 향이 지닌 차원을 전격적으로 이해해야 하는구나, 보이지 않는 것을 재료로 시를 짓는 것이 되겠다, 이른바 시각화 작업으로 회사를 꾸리는 사람으로써 향이란 눈과 코 앞에 훅 다가온 풀어야 할 재료이며 구조이기도 하다는 것을 몸소 느끼는 한 해 이기도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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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messence Series by Hermes.
장클로드 엘레나 Jean-Claude Ellena의 Cuir d'Ange ,'천사의 가죽'은 장 지오노 Jean Giono의 자전적 소설인 'Jean le Bleu(1932)' 로부터 장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구두수선소의 시공간과 직업으로써 베푸는 덕성을 섬세하며 고아하게 묘사한 향수입니다. Perfume의 어원 — 'per fumum 연기를 통해' —과 걸맞는 결정적이며 순수한 양식성을 진정 지적으로 승화하는 것, 조용하게 보여주며 부드럽게 완성하는 것, 완벽하게 정중한 것으로써의 창작물을 만드는 엘레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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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문화운동가 고은정 선생님이 계신 지리산 자락으로부터 도착한 장소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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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팩티브 아트 디렉팅 Olfactive Art Directing은 업무 영역에서 언어적으로, 시-문학적으로, 시간과 공간적으로 규정한 건축의 조형성과 연결하여 향의 주제의식을 몰입감있게 표현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정서적 지능과 깊이, 숨기기 어려운 감각적 차원에 속하는 것이라 사용자 개인차의 진폭이 아주 크고, 하나 하나 헤집어서 이해하고 나면 아프고 쓰라리구나 인간적으로 공감하면서도 고생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일을 앞에 둔 사람이니까, 몰입감을 디자인하기에 앞서 그 기반을 절대적으로 '정중하면서 기분 좋게 하는 것'에 기초를 두고 싶습니다. 내가 속한 사회의 공통된 것 안에서의 진솔한 향긋한 것, 진지하고도 새롭게 바라봄으로써 시니컬하지 않은 아름다운 것으로 하이라이팅하여 제안하는 일.
겨우내 집에 도착한 것 중 가장 귀한 것으로써 장소금 — 오랜 시간 발효하며 장항아리에 맺힌 소금 결정을 모은 것 — 은 깊은 감칠맛도 아름답지만 아주 기분 좋게 하는 카카오 향내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향은 층위가 풍요롭다 못해 물리적인 무게를 물리칠 만큼의 기운을 지니고 있더라는 것, 물론 담아낼 기물이 중요한 심미적 상황이 따릅니다만, 마음 놓고 주장하고 싶은 장소금의 떡지지 않은 아름다움 속에서 안도합니다. 일하는 사람으로써 심신으로 체험하는 향긋한 생활이 이어지는 것에 감사하며, 겨울에서 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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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de-Chine Tripod Censer. Qing dynasty, 17c. Porcelain of Tehua. 9.8(d) x 13.8(w) x 11(h) 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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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세 번째 호에 느리게 오는 와중에 본 메일링 프로그램의 에러로 애를 먹었습니다. 혹시 기다리셨을까, 걱정이 있었답니다. 와중에 저는 스와 오피스 테라스와 시골집, 그리고 살고 있는 아파트의 발코니에 크고 작은 정원을 꾸리고 있습니다. 황폐해진 겨울에도 세계를 훔쳐보며 때를 기다리다가 감동적으로 순을 터트리고 잎을 키우며 만개하는 해마다의 일. 동시에 세 곳에 팔을 걷어붙이는 것으로 계절을 열어젖혀야 합니다. 각자의 꽃과 약초만 내어주는 게 아닌, 고생스러운 신경통과 재채기를 유발하는 봄의 일에 게으르지 않으려고 몸을 푸는 요즘입니다. 저는 아픈 것이 두렵기보다는 쓰여질 일이 없어질까봐 시무룩해지기 쉬운 중년의 디자이너이니까요.
봄에는 시를 읽으시지요? 또 산뜻하고 맑은 산문들을 찾아보시지 않았을까요. 침침하게 스쳐진 겨울의 가슴을 잘 덮어줄 글이 고픕니다. 어깨가 시리고 손이 차다 싶을 때, 자크 데리다 Jacques Derrida의 아듀 레비나스 A dieu à Emmanuel Levinas 를 들추어 조각조각 읽으며 지하 세계에서 웅크려 연기처럼 존재하는 생명의 때를 생각했습니다. 집과 사무소를 오가며, 하루를 지나는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나 흐릿한 모습이 나지막한 슬픔과 기쁨을 자아낼 때가 있습니다. 맞아들이고, 감싸안으며 지켜보고픈 마음입니다. 매일 내게 환대하는 내 집을 오히려 내가 맞이하는 측면의 감명이 아침저녁으로 새롭게 샘솟기도 합니다. 그렇구나, 집에 풀들이 자라는구나, 구름이 해를 가리면 탄식하면서 해는 언제 오려나 손을 꼽겠구나 오늘도, 하는 감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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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여는 시며 산문을 읽다가... 또 훈향을 생각하다가 희게 번지는 위로 오르는 감각을 떠올리다가, '가벼움 (공기와 같은, 무거워 끌어내리기보다 둥실 선들 고양감을 주는 것, 그 감정에서의)'에 대한 망상으로 반쯤 미쳐가고 있을 때 (눌어붙어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책상과 다름 없어지는 때에) 존경하는 친구의 손에 이끌려 고려 상형 청자들을 전시 중인 국립중앙박물관에 다녀왔습니다. 살아있다, 점안한 눈의 깊이는 파고드는 정감이겠다, 손으로 매만져 예찬하는 것을 연구함에 최고치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점안'의 감각은 저에게 '연지 곤지' 같기도 합니다. 또 카톨릭에서 이마와 입술과 가슴에 긋는 성호의 감각과도 닿습니다. 학예사님의 감화로 가득한 어조로부터 뾰족한 지성, 함께한 친구의 맑고도 깊은 시선, 그런 공감을 단단하게 맺으며 나눈 한 시간여의 공부는 걸음에 음표를 붙인 듯 싱그러웠습니다. 다만 저 한 땀 한 땀 잘 지어 입은 옷 안에 삭아진 둥그런 어깨와 이마에 괜시리 코 끝이 찡하기도 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들의 옆얼굴을 가만히 볼 때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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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ilio Barnabe. Two Figures. 111.8 x 154.9 cm.
바르나베는 시각적 균형을 이루기 위해 거의 모든 것을 숨겨두지만, 장면에 드리운 빛을 더듬다 보면 저 두 사람이 나를 가만히 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작가는 우려하며 인위적으로 지워나간 것이 아닌 필요한 채널만을 열어둔 것이 아닌가 하며. 아, 하던 일을 계속하세요. 라고 조용히 맞이하는 사람으로써의 기쁨과 환대의 감정을 느끼게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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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ttorio Zecchin's Soffiato Vase. Circa 1920.
기술적으로 매우 얇게 불어낸 색조와 면적의 세계.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빛과 색, 유리의 투명성, 탁월하고도 유연한 미적 감각을 마주하노라면, 솜털처럼 가벼우며 아주 작아져서 저 병에 미끄러져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
어딘가 무엇이 어떻게 나를 부르고 있음을, 다시 말해 봄에 할 일들을 절절하게 하고 있는 것들 중에 서양난을 탐닉했던 오후에. 느끼고 싶은 세계와의 연결감, 넋의 위로함에 충분한 조화로운 예쁨을 배우며 만끽했습니다. 좋아하는 난원의 사장님들이 지닌 기민하며 소란스럽지 않은 애티튜드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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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다른 뉴스거리가 아님에도 많은 분들이 구독해주셔서 어느덧 세번째에 왔습니다. 오피스에서 밤도 낮도 없이 일하다가 그래도 짬을 내어보는 어느 날입니다. 황사 예보로 회색조의 하늘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올려다 본 오늘이었을까 가만히 떠올리면서, 저녁의 일터에 가기전 서둘러 발송합니다. 가까운 재래시장에서 여리고 맛있는 봄의 풀들에 코 내밀어 보시기를, 마음에 풀을 둘 수 있는 강건한 컨디션으로 하루를 잘 보내시기를.
평화를 빌며 좋은 기운을 보냅니다.
2025년 3월 12일, 이혜원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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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UNDATION ARABY. 4F, 17—63, Yeonhuimat—ro, Seodaemungu, SEOUL | soir@araby.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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