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OUND Vol.93 〈우리의 아름다운 기억으로부터〉

가장 앞에 놓인 기준

까치발까지 들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힘쓰는 일, 정해진 시간이 되면 주저 없이 끝내도 되는 일, 마음과 시간을 적게 쓰는 대신 손에 쥐어지는 것도 적은 일…. 무수히 많은 일 중에서 님은 무얼 하고 싶나요? 그 대답에서 님이 삶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엿보이겠지요. 일과 삶은 완벽히 다른 게 아니라 삶 안에 일이 있으니까요. 가치의 순위가 한평생 절대적인 것은 아니기에, 시도와 경험을 반복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자리를 옮겨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가장 앞에 놓인 기준이 나를 온전한 사람으로 존재하게 해주는지 틈을 내어 짚어보고, 때로는 다른 사람이 세워둔 가치를 들여다보며 나의 것과 비교해 봐도 좋겠지요. 《AROUND》 93호에서 시도와 경험을 쌓아 나만의 것을 만든 이들의 이야기를 이번 뉴스레터에서 그러모아 봅니다. 한적한 가평 산골 어딘가, ‘아시 하우스’를 짓고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 세운 하태웅·송현정 부부의 삶에 대해 들어볼까요?

03.21. Another Story Here책 너머 이야기

AROUND Vol.93 작업실에서(In Workroom)

우리의 아름다운 기억으로부터하태웅·송현정—아시 하우스


04.04. What We Like―취향을 나누는 마음

어라운드 사람들의 취향을 소개해요.


04.18. Another Story Here―책 너머 이야기
책에 실리지 못한, 숨겨진 어라운드만의 이야기를 전해요.

우리의 아름다운 기억으로부터

하태웅·송현정—아시 하우스

그림 같은 집을 보았다. 잘 익은 밤의 색을 닮은 산등성이를 어깨에 두른 그곳은 군더더기 없이 담백한 모습이었다. 세상의 시끄러운 소음은 기척도 느껴지지 않고, 집을 채운 부부의 취향만이 나긋한 목소리를 내며 흘렀다. 그 모습이 참으로 슴슴하고도 안온하다. 서울을 훌쩍 떠나 가평 산골에 집을 지은 하태웅·송현정 부부는 오늘도 단정한 마음으로 오는 이를 기다린다. 부부의 아름다운 기억을 꺼내둔 아시 하우스에서.


에디터 이명주  포토그래퍼 강현욱


현정 씨는 서울에서 어떤 일을 했어요? 

현정 저도 디자인을 전공해서 작은 스튜디오에 입사했어요. 특이한 게, 회사 대표님이 취미로 고급 자전거를 수입하셨는데 그걸 다시 비싸게 되팔기 위해 옷 입히고 매장 꾸리는 일을 맡았어요. 그런데 저는 자전거 탈 줄도 모르거든요. 에너제틱한 라이프 스타일을 즐기는 척 일하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이후에 좀더 큰 교육 회사로 가서 수험생 대상 프로그램을 디자인할 때도 마찬가지였고요. 회사 크기의 문제일까 싶어서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대기업에 들어갔는데, 저와 맞지 않는 캐릭터 제작 업무를 맡게 된 거예요. 좋은 회사에 들어가면 끝날 줄 알았던 고민이 다시 시작된 거죠. 

 

여러 시도를 했지만 잘 맞진 않았네요. 

현정 대기업으로 옮기면서 결혼하고 신혼집도 꾸렸는데, 그때 계속 뭘 샀다고 했잖아요. 일과 삶이 일치되지 않으니까 거기서 큰 공허감을 느꼈나 봐요. 주변에서 일과 삶을 분리하라고 조언하길래 완전히 떼어놓았는데 일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면서 더 불행해졌죠. 

 

사실 분리하는 게 쉽지 않잖아요. 하루 중 일하면서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긴데요. 

현정 그러니까요. 나와 맞지 않은 공간에서 보낸 시간을 보상받듯 무얼 사서 집에 가져다 두기는 하는데 만족이 안 되는 이유를 그때는 몰랐어요. 회사에서 야근하고 오느라 내가 고른 가구나 티팟은 볼 시간도 없었고요. 회사를 다니는 것에 대해, 우리의 삶이 어떤 노선을 타야 하느냐에 대해 남편과 함께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죠. 

태웅 일과 삶은 다른 게 아니라 삶 안에 일이 있는 거잖아요. 그 사이의 이질감을 덜고, 둘을 함께 보기로 인정했어요. 저도 브랜드 디자이너로 오래 일하다 보니까, 이 일의 궁극적인 도달점은 어딜까 생각했을 때 회사는 아닌 것 같더라고요. 회사에서는 늘 새로운 걸 보여줘야 하고 변화를 만들어야 하는데, 저희는 언제나 그대로인 브랜드가 좋았거든요. 브랜드가 한 사람 같았으면 좋겠다는 게 저희의 새로운 지향점이었어요.

 

브랜드가 하나의 사람 같다는 건 어떤 의미예요? 

태웅 저와 현정이 좋아하는 브랜드를 떠올려봤을 때, 그 안에 머무는 사람이 연상된다는 공통점이 있었어요. 망원동 ‘스몰커피’나 ‘훈고링고브레드’, 서촌 카페 ‘mk2’처럼 공간과 어긋나지 않은 사람이 일하고, 그들이 만들 것 같은 음료를 팔고, 또 그걸 좋아할 것 같은 손님들이 찾아오는 거요. 한 사람의 취향이 진득이 묻어 나오는 걸 좋아하다 보니 해외여행 가서도 으리으리한 호텔보다는 작은 에어비앤비에서 묵거든요. 현실적으로 서울에서는 우리 두 사람이 가게도 하고 고양이도 함께 살 공간을 찾는 게 불가능에 가까워서, ‘그렇다면 꼭 서울이 아니어도 되잖아?’ 싶었어요. 직장만 아니었다면 서울에 살지 않았을 테니까요. 거기서 하고 싶은 건 이미 충분히 경험했어요. 

현정 그래서 그 주 주말부터 빠르게 전국을 돌아다니기 시작했죠. 좋은 땅을 찾아보자며(웃음). 

 

그렇게나 빠르다니(웃음)! 그럼 왜 스테이를 만들고 싶었어요? 이유를 들으면 삶에서 무얼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전해질 것 같아요. 

태웅 우리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일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가게는 정확한 시간에 열고 닫아야 하고 휴무일도 지켜야 하지만, 스테이는 손님을 응대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집에서 일상을 보낼 수 있잖아요. 

현정 그리고 우리의 취향을 공유하고 싶었어요. 애정을 담은 소품들과 가구, 음악, 향기까지 차려두면 그걸 좋아하는 분들이 와서 향유해 주길 바랐어요. 사람들이 한 공간에 온전히 젖어들려면 하룻밤을 보내는 형태가 좋겠다고 생각했고요. 소수를 위한 초대의 개념이었죠. 

 

공간이 머무는 사람에게 주는 힘을 이미 알고 있었나 봐요. 

현정 신혼여행으로 떠났던 프랑스 남부 보르도 지방에서 마구간을 개조해서 만든 에어비앤비에 머문 적이 있어요. 가는 길도 불편하고 오래된 벽돌로 지어서 컴컴한데다가 안에는 말안장 같은 게 걸려 있는 독특한 곳이었죠. 옆에는 주인이 직접 운영하는 레스토랑과 수영장이 붙어 있었고요. 되게 이상한데, 모든 곳에서 주인이 느껴지는 거예요. 백 년 넘은 고택에서 주인이 열심히 쓸고 닦은 구석들이 보이고,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컵과 테이블이 있었어요. 음식도 별것 아닌데 맛있어서 그때의 기억이 참 좋게 남아 있죠. 

태웅 아시 하우스의 슬로건으로 “우리의 아름다운 기억을 통해서”라는 말을 쓰는데요. 저희도 공간에 기억들을 꺼내두고 행복했던 마음을 녹이면, 그걸 알아봐 줄 사람들이 올 것 같았어요.

좋아하니까 충만한 삶

어떤 분야든, 언제 발을 내디뎠든, 얼마나 지속해 왔든 그건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시 하우스를 만든 하태웅, 송현정 부부는 빠른 속도로 변화를 거듭해야 하는 서울에서 과감히 벗어나, 고요한 가평에서 성실하고 꾸준히 갈고 닦는 일과 삶을 선택했습니다. 두 사람은 지금껏 무얼 해왔는지보다 ‘내가 좋아하는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었던 거죠. 진정 원하는 삶의 속도를 찾았기에, 바쁜 하루나 기다림의 시간이 고되지 않고 오히려 충만하게 다가옵니다. 잘 익은 밤의 색을 닮은 아시 하우스 외에도 그들이 좋아하기에 만든, 그들만의 작업물을 하나 소개합니다.


이명주

우리다운 공간을 만드는,

아시 하우스의 플레이리스트

아시 하우스에서 두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눌 때,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걸 하나 꼽으라면 ‘음악’을 말하고 싶습니다. 대화를 나누는 내내 우리 주변으로 노랫소리가 흘렀는데요. 익숙한 곡은 아니지만 처음 만난 이들 사이의 비어 있는 공기는 느슨히 채워주고, 주고받는 이야기에는 방해되지 않도록 나긋한 노래들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무얼 할 때 공간에 음악을 틀어두고 원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집중이 잘 된다”는 하태웅 대표의 솜씨였어요. 그는 청소나 개인 업무 시간 외에도 아시 하우스에 오는 손님들을 위한 플레이리스트를 준비해 둡니다. “국적이나 가사의 유무는 중요하지 않지만, 음악이 상황의 배경이 되는 걸 선호”하는 터라 자기주장이 강한 멜로디나 가사는 피하고, 손님을 마주하는 잠깐동안 성향을 파악해 곡을 재생한다고 해요. 스포티파이에서는 한 달에 한 번, 아시 하우스가 세심하게 고른 ‘이달의 노래’를 감상할 수 있답니다. 노랫소리가 잔잔히 흐르는 아시 하우스를 선율로 만나보세요.

AROUND Wallpaper ― Vol.93 작업실에서(In Workroom)

 

어라운드가 만들고 누빈 모든 것에는 평범한 하루에서 특별함을 발견하는 시선이 녹아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여러분의 일상에도 자연스레 스며들길 바라며, ‘AROUND Wallpaper라는 이름으로 배경 화면을 준비했습니다. 아래 버튼을 누르면 어라운드 최신호 ‘Vol.93 작업실에서(In Workroom)’의 모습이 담긴 휴대폰 배경 화면용 이미지를 만나볼 수 있답니다. 고요한 작업실에서 어라운드를 펼쳐보는 듯한 감각을 여러분께 매 순간 선물 할게요.

절기 따라 걷기

계절을 한 편의 글로 실감해 보는 건 어떨까요? 바로 어제는 길었던 밤이 낮과 보폭을 맞춘 춘분(春分)이었어요. 절기를 느끼는 일은 삶을 자연스러운 방향으로 이끌어 주는, 오래되었지만 새로운 세계의 초대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스물네 번의 절기가 찾아올 때마다 오전 10시, AROUND Naver Post를 클릭하세요. 최예슬의 연재 ‘절기 따라 걷기’와 함께 이맘때를 바라봅니다.


어째 아직도 춥거나 비가 오는지, 봄은 아직 멀었는지 볼멘소리가 나옵니다. 하지만 이 변덕스러움도 결국은 봄의 모습이지요. 계절은 가위로 툭 잘라 이어 붙인 게 아니라 다채로운 매일 속에서 뭉근하게 무르익으니까요. 계절의 갈피를 잡기 어려운 날 덕에 마침내 포근한 봄이 왔을 때 더욱 반갑게 느껴지는 듯 합니다. 봄이 더욱 무르익을 다음 뉴스레터에서는 어라운드 식구들 취향과 더불어, 어라운드 매거진 94호 신간 소식을 안고 찾아올게요. 그럼, 다다음주 목요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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