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데브스>(DEVS)라는 제목의 미국 드라마를 흥미롭게 봤었습니다. 가상의 미국 실리콘밸리 최고의 정보통신(IT) 기업 ‘아마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일종의 ‘에스에프(SF) 서스펜스’ 드라마입니다. 아마야에는 ‘데브스’라는 극비 부서가 있는데, 이 부서는 양자컴퓨터 개발에 성공해 이를 활용해 과거와 미래를 자유자재로 시뮬레이션하는 지경에까지 이릅니다. 이들의 시스템은 2000년 전 예수의 실제 음성을 재생해낼 정도로, 또 누군가 죽는 미래를 상세하게 다 알고 있을 정도로 강력합니다.
이론적으로 ‘초기조건’과 ‘규칙’을 알면 현실을 재현(시뮬레이션)해낼 수 있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을지니, 그 이유를 밝히며 끝없이 거슬러 올라가면 모든 것의 출발점, 곧 ‘부동의 원동자’인 신(DEUS)에 닿을 수 있다는 발상입니다. 드라마 속 극비 부서의 이름이 ‘데브스’인 것은 바로 이를 겨냥한 것이겠죠. 드라마는 이처럼 도저히 도망칠 수 없는 ‘결정론’이 지배하는 세계를 제시한 뒤, 등장인물들에게 그럼에도 ‘자유의지’를 믿을 것인지 잔혹하게 추궁합니다.
과학기술이 지금보다 여러 단계 더 도약해서 원자 단위로까지 현실의 모든 것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해진다면, 드라마 속에서 벌어진 상황들은 과연 현실이 될까요? 인간은 우주의 기원까지 밝혀낸 뒤 의기양양하게 스스로 신이라 선포하게 될까요, 아니면 우리 역시 다른 누군가의 시뮬레이션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좌절하게 될까요? 되레 중요한 것은 신의 ‘목적’이 무엇인가 묻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존재 그 자체가 신의 목적이라면 누가 신이냐가 과연 중요할까요.
|
|
|
스탈린은 히틀러와 함께 20세기 잔혹 통치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1930년대 중반 대숙청 당시 그는 자국민 수십만명을 학살한 폭군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나치 패망을 이끈 연합국 지도자의 일원이었고 2차대전 뒤에는 미국 패권에 맞서 소련과 전 세계 사회주의의 토대를 다진 유능한 정치인이기도 했습니다. 그에 관한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가운데 그의 독서 편력을 근거로 스탈린의 엇갈리는 면모를 통합하고자 하는 책이 나왔습니다. <스탈린의 전쟁>이라는 책으로 한국 독자들에게도 알려진 소련사가 제프리 로버츠 아일랜드 코크대 명예교수의 신작 <스탈린의 서재>가 그것입니다.
|
|
|
지은이는 스탈린의 장서, 특히 그 책들을 읽으며 그가 남긴 언어 및 비언어 표시들을 분석해 스탈린의 이념과 감정, 내면과 행동을 추적한 독특한 방식의 전기를 썼습니다. 스탈린은 어려서부터 열렬한 독서가였고, 1917년 혁명 이후부터는 꾸준하게 장서를 모았습니다. 청년기에 급진 서점과 비밀 독서 모임을 통해 혁명가의 길에 들어선 그는 집권 이후에도 마르크스-레닌주의 학습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장서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문학 고전들이었고, 비문학서 가운데서는 레닌의 책이 가장 많았습니다. 그는 레닌을 숭배했고 레닌의 말을 인용하기를 즐겨 했습니다. 스탈린은 자신의 정적이었던 트로츠키의 책들 역시 탐독했는데, 그 책들에는 비판의 표시와 함께 동의 표시를 한 곳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는 또 독일 재상 비스마르크와 미국 헌법 등도 공부 삼아 읽었다고 합니다. 스탈린이 읽은 책들, 그가 책에 남긴 표시들을 통해 독서가이자 지식인 스탈린의 새로운 면모를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
|
|
|
🐟현대사에서 스탈린만큼 복합적인 인물이 또 있을까요? 스탈린과 러시아혁명 이후를 다룬 책을 다룬 글들을 몇 편 함께 소개합니다. 스탈린의 젊은 시절을 다룬 <젊은 스탈린>, 스탈린 시대 폭정 아래 살았던 평범한 사람들을 다룬 <속삭이는 사회>, 레닌과 스탈린 사이의 연속성에 주목한 러시아혁명사 <러시아혁명 1917~1938>입니다.
|
|
|
인간은 가보지도 않은 별과 은하, 광대한 우주에 대해 어떻게 지금처럼 많은 것을 알게 되었을까요. 현실 세계를 가상의 환경에 구현하는 ‘시뮬레이션’이란 방법 덕분입니다. 19세기 날씨 예측을 위해 만들어진 시뮬레이션이 컴퓨터의 발달과 맞물려 우주의 다양한 현상과 그 기원까지 탐구하는 방법이 된 것이죠. 그 결과 우리는 직접 본 적도 감지한 적도 없지만 우주공간 대부분에 ‘암흑물질’이란 게 넓게 퍼져 있다는 것을 알고, 138억년 전 빅뱅 이후 초기 우주가 어땠을지 그려보기도 합니다. 영국 우주론학자 앤드루 폰첸이 쓴 <상자 속 우주>는 ‘우주론 시뮬레이션’의 역사와 쟁점을 흥미롭게 이야기해줍니다.
|
|
|
시뮬레이션은 현실 속 모든 것을 똑같이 재현하는 방식으로 이뤄지진 않는다고 합니다.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너무 비생산적이기 때문이죠. 되레 현실을 어떻게 과감하게 단순화시키는가가 종종 시뮬레이션의 성패를 좌우했다고 합니다. ‘서브 그리드’라는 개념도 기억해둘 만합니다. 현실을 단순화시키면 미시적 규모지만 핵심적인 현상을 놓치기 쉽습니다. 서브 그리드는 그에 해당하는 요인들에만 별도의 규칙을 적용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시뮬레이션의 효율성을 높여주지만 인위적인 개입으로 인해 시뮬레이션 전체의 규칙성을 흔드는 요소가 되기도 한답니다. 암흑물질, 암흑에너지의 발견, 은하의 생성과 소멸, 블랙홀, 양자역학과 우주의 기원, 나아가 '우리 역시 누군가의 시뮬레이션일지 모른다' 등 우주에 대한 온갖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결국 작은 ‘상자 속’에서 발견됐다니, 정말 재밌지 않습니까.
|
|
|
🐟시뮬레이션을 통해 우주의 움직임을 그려낸 영상은 숨막힐 듯 아름답습니다. 또 그런 장면은 실제 관찰된 것과 다름없던 것으로 확인되기도 하죠. 백문이 불여일견, 몇 가지 우주 시뮬레이션 영상들을 함께 공유합니다.
|
|
|
1970년초만 해도 시집은 자비로 내거나 시인들이 계를 부어 한정판 500권 정도를 발간하는 식이었습니다. 이런 도식을 깨는 데 '창비시선'의 구실이 큽니다. 국내 최초의 신작 시선집으로 ‘시집 1만부 시대’를 궤도에 올린 창비시선이 반세기 거쳐 이달 500번째 시집을 독자 앞에 상재했습니다. 1975년 3월 첫 시집 ‘농무’로부터 정확히는 49년 만입니다. 이를 기념해 두 권이 시선집이 출간됐습니다. 2016년 9월 창비시선 401번부터 최근의 499번까지 시인별 시 한편씩 아흔 꼭지를 엮은 기념시선집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이 그중 하납니다. 1948년생 시인 김용택(401번)부터 2000년생 한재범 시인(499)까지, 80년대생 안희연·황인찬 시인이 추렸습니다. 주제 없이 모았는데 또 하나의 시의 숲을 이뤘습니다.
|
|
|
특별시선집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도 함께 나왔습니다. 400번대 시인들의 창비시선 속 애송시 74편이 엮였습니다. 판매금지되었던 ‘국토서시’ 조태일(2번)부터 신동엽(20), 김남주(72), 나희덕(125), 안도현(163), 허수경(203), 정호승(235), 진은영(349) 등을 다시 만납니다. 반세기 시의 자취를 압축한달까요. 당시 시집 500원의 시대에서 500번째 시집을 상상했을까요. 무엇보다 ‘시집 1만부 시대’를 맞고선 돌고 돌아 다시 1만부는 기적쯤 되고 마는 시대를 상상이나 했을까요. 시인은 시로 전망할 뿐입니다. “기차를 세우는 힘, 그 힘으로 기차는 달린다/ 시간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미래로 간다/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 그로 인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안다/ 무엇이 되지 않을 이유, 그 힘으로 나는 내가 된다/ 세상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달린다/ 정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가 달리는 이유를 안다/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기념시선집에 다시 실린 백무산의 시(‘정지의 힘’)로 시 독자의 안부를 여쭙습니다.
|
|
|
시몬 베유(1909~1943)는 서른네 해의 짧은 삶을 불꽃처럼 살다 간 프랑스의 여성 철학자입니다. 베유의 사상은 종교적 신비주의와 정치적 행동주의의 결합 속에서 영글었는데요, 그런 점에서 통상의 사상들과 사뭇 다른 성격을 지녔습니다. <쿠튀리에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는 근년에 들어와 다시 조명받고 있는 베유의 사상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글 모음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부터 1943년 사이에, 그러니까 베유의 삶이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던 시기에 쓴 글들 가운데 종교와 신앙에 대한 베유의 통찰이 담긴 글 여섯 편이 묶였습니다. 이 글 속에서 베유의 영성적 사유는 당대 유럽 정치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가고, 새로운 세계를 향한 열망으로 이어집니다.
|
|
|
베유의 삶은 한편의 강렬한 드라마를 떠올리게 합니다. 1909년 파리의 유대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베유는 일찍부터 철학에 관심을 보였고 19살에 파리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고등사범 교장이던 셀레스탱 부글레는 베유를 가리켜 “아나키스트와 수도승의 혼합”이라고 규정했는데, 이 규정은 미래의 베유를 그대로 예견한 것이라고 할 만합니다.
|
|
|
제조업은 우리나라의 중요한 밑천입니다. 한국은 국민총생산(GDP)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27%에 육박하는데, 이 비중이 한국보다 높은 국가는 아일랜드밖에 없다고 합니다. 총고용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도 25%에 달합니다. 그런 제조업이 위기에 처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2015~2018년 제조업 구조조정의 영향입니다. 조선, 자동차, 석유화학산업을 모두 품은 대표적인 '산업도시' 울산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 등으로 제조업과 산업도시를 연결해 연구해온 사회학자 양승훈 경남대 교수는 새 책 <울산 디스토피아,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에서 울산이 마주한 위기가 무엇인지, 위기의 배경에는 무엇이 있는지 등을 파고듭니다.
|
|
|
지은이는 이대로라면 2030년 울산은 저물어가는 장년 퇴직자의 도시, 젊은이가 외면하는 청년 비정규직 도시, 연구소가 떠난 도시, 대학이 떠난 도시가 될 것이라 예견합니다. 그 배경에는 제조업 강국의 성공을 이끌어온 동력이 더이상 작동하기 어려워진 상황이 있습니다. 지은이는 이 상황을 '노동의 공간 분업과 생산성 동맹의 와해'라는 말로 짚습니다. 연구 및 기획 기능의 분리, 노동시장의 이중구조화, '산업 가부장제' 등에 따라 앞으로 울산은 '하청 생산기지'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고진로 전략'을 제안합니다. 산업도시와 숙련 노동자를 포기하지 않고 기존 공장과 제조 생태계에 기반을 둔 '생산성 동맹'을 다시 건설해야만 제조업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는 진단입니다.
|
|
|
성평등, 다양성의 가치가 실린 어린이청소년 책을 '불순불온' 서적이라며 도서관에서 빼라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여전합니다. 사실상 '검열'과 다름없는 이런 협박 앞에서도 여러 작가와 출판인들은 현장에서 다양성의 가치를 담은 좋은 어린이청소년 책들을 꾸준히 펴내고 있습니다. 그런 책들을 발견해내고 널리 알리는 데 주력해왔던 '나다움' 북클럽은 올해에도 <오늘의 어린이책> 3호를 출간했습니다. 주체성, 몸의 이해, 일의 세계, 가족, 사회적 약자, 표현, 젠더 다양성, 사회적 인정, 안전, 연대라는 열 가지 주제 아래에 '성평등 어린이청소년책' 85권을 꼽았습니다. 어떤 책들이 추천됐는지, '나다움' 북클럽이 직접 소개합니다.
|
|
|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는 몸과 그런 몸들이 오는 책방
비건책방 |
|
|
"나는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인간이 가진 애초의 설계를 믿는 편이다. 타인은 지옥이고 우리는 절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어서 한 사람을 안다는 건 지옥이 하나 더 늘어나는 것이다. 다만, 인간이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게 이 세계에서 우리가 절멸하지 않은 이유였을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행복보다 고통을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다. 그 능력은 우리를 ‘연민’과 ‘연대’로 이어지도록 만들었다.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다 보면 타인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이 점점 더 확장된다. 너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 되고 내가 고통스러운 것이 견디기 힘들어서 함께 옆에 있어 주고 싶거나 싸우고 싶어지는 순간이 많아진다."
👉기사보기 |
|
|
사월
셔츠를 펼친다
손가락이 바깥으로 휘어 있다
바람이 빈 곳으로 달려 들어간다
땅이 자꾸 끓는다
땅이 밤마다 몽둥이다
눕지 못해 딱딱해진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걷는다
차례로 서서 뒤척인다
나는 자주 물을 마셨다
불에 탄 자리는 짙은 색
불에 탄 자리는 짙은 옷
뒤섞여 있는 것들은
사람에게서 멀리 걸어 나온 발
빈집을 비닐에 넣는 동안
하늘이 처음인 구름 행렬
접어 놓은 지 오래된 슬픔은 못 입는다
📖마윤지의 시집, <개구리극장>(민음사)에서 |
|
|
이번 주 반올림(#)책은 어떠셨나요?
좋았던 점, 아쉬웠던 점 등 기탄없이 의견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
|
<한겨레>를 정기구독하시면, 매주 토요일 아침 충실하게 만들어진 북섹션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후원회원 '벗'으로 함께해 주시면, 더 좋은 기사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
|
|
※ 반복적으로 전달되다보니 반올림(#)책이 스팸메일이나 프로모션함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용하시는 전자우편 서비스에서 반올림책 bookbang@hani.co.kr을 주소록에 추가해주시면 반올림(#)책을 더 쉽게 챙겨볼 수 있습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