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은 일, 사건, 사태를 뜻하는 ‘사事’와 물리적 대상을 뜻하는 ‘물物’의 결합으로 되어 있다. ‘물’이 정적이며 물리적인 단일성과 공간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사’는 동적이고 시간적이며 관계적인 양상이나 사태를 포함한다. 사물은 특정 공간을 점유하는 물리적 대상이지만 그것이 놓여 있는 맥락에 따라, 또 누가 그것을 사용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체로 변한다. 사물은 인간과 삶의 의미를 포괄하는 관계의 매개물이기도 한 것이다.

─함돈균, 『사물의 철학』, 7쪽

🔔다가오는 책

성큼, 와버린 소문들: 은희경 산문 『또 못 버린 물건들』

  지난 소문의 이름이 입추立秋였지만 진짜 가을의 시작은 처서라고들 하지요. 아니나 다를까 비 소식과 함께 거짓말처럼 뚝 떨어진 기온에 우선 에어컨부터 꺼보고요, 올여름 함께한 반소매 민소매 옷들과 작별 인사 앞두고는 적잖이 미적거리게도 됩니다.

  그런 김에 오늘은 딱 맞춤한 책, 다가올 난다의 책 이야기 먼저 해보려고요. 은희경 작가님이 12년 만에 선보이는 산문의 제목이 마침 『또 못 버린 물건들』인 거지요! 효율과는 하등 상관없지만, 함께한 시간과 삶의 궤적이 스며 있어 차마 쉽게 버릴 수 없는 물건들. 우리 모두에게 하나쯤 둘쯤, 어쩌면 ‘또’ 잔뜩 있을지도요. 술잔, 감자 칼, 구둣주걱, 우산, 달력… 은희경 작가님이 아이폰으로 직접 찍은 사진과 함께 사랑스럽고도 유머러스한 이 이야기들 읽다보면 그곳에 아주 사적인 기억과 현재, 그리하여 빚어나갈 미래의 시간이 함께 깃들어 있는 듯 애틋해지기도 합니다.

  끝내 버리지 못한 오래된 물건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이 피워낸 ‘다가오는’ 소문인 셈이네요. 하기야 여름옷들과 잠시 안녕 하는 환절기, 옷장 속 긴소매 옷들과 다시 만나는 때이기도 하니까요. 오랜 세월로 쌓아 오래 기다린 이야기, 계절처럼 소문처럼, 금세 다가올 테지요!

  함께한 시간과 삶의 궤적이 담겨 있어 쉽게 버릴 수 없는 물건들. 하지만 그런 물건들을 하나하나 간직하기에는 나의 살아온 시간이 짧지 않고 또 우리집이 그다지 넓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머지않아 작별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다. 나에게나 소중한 물건일 뿐이므로 그것들을 쓰레기봉투에 넣어 던지거나 내 소설 속 소년이 버린 침대처럼 폐기물 딱지를 붙인 채 빗속에 방치해야 할지도 모른다. 작별의 마지막은 어쩔 수 없이 단호하고 차가워야 하겠지. 하지만 그 물건들의 시작, 찬란했던 모습들, 나와의 인연, 내 곁에 있었던 시간과 그 덕분에 만들어진 즐겁거나 힘들었던 이야기의 파편들은 어딘가에 남아 내 인생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또 못 버린 물건들』(근간), 157~158쪽

🥼계절 하면 때, 때 하면 제철

처서에는 옷장 정리, 결국 또 못 버린 옷들

  각각의 절기마다 챙겨야 하는 것은 음식만이 아니죠. 망종에는 부지런히 씨를 뿌려야 하고 대서의 한낮에는 한껏 게으르게 낮잠을 자야 한다면, 처서에는 슬슬 다가올 가을을 준비하며 옷장 정리를 할 때. 여름 내내 한 번도 입지 않았던 티셔츠, 배 둘레가 더이상 견디지 못하는 반바지 들을 모두 옷장에서 꺼내야겠죠. 한동안 포화 상태의 옷장과 함께했기에 이번엔 야심차게 옷장의 1/3을 비우겠다고 목표를 세웠습니다. 본능적인 목표치였지만 다가올 계절과 새로운 인연(=새로 살 옷)을 위해 필요한 넉넉한 마음(=넉넉한 옷장)을 생각해보면 적당한 것 같기도 하고요.

  적절한 구실이 있으니 이참에 여름옷뿐 아니라 오랫동안 옷장에 잠들어 있던 옷가지를 함께 정리하는 것도 좋겠죠. 그렇지만 그렇게 버리려고 해도 버려지지 않는 옷들이 있습니다, 근 몇 년을 한 번도 입지 않았던 옷인데도요. 제게는 10년 전 여행을 가서 샀던 싸구려 무스탕 재킷, 외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트렌치코트, 한동안 아이들 애착 인형 수준으로 맨날 입고 다니던 반바지가 그런 옷들인데요. 마침 은희경 작가님이 제게 좋은 핑계를 만들어주시네요.

  물건들을 버릴 수 없게 만드는 데에는 거기 깃든 나의 시간도 한몫을 차지한다. 물건에는 그것을 살 때의 나, 그것을 쓸 때의 나, 그리고 그때 곁에 있었던 사람들의 기억이 담겨 있으며 나는 그 시간을 존중하고 싶은 것이다.

─『또 못 버린 물건들』(근간), 153~154쪽

  작가님의 응원(?)에 힘입어, 1/3이라는 앞선 목표치를 길잡이 삼아 저는 이번에 옷장을 이렇게 정리해볼까 해요. 옷장의 1/3은 지금 내 손이 가는 옷들을 위한 자리, 1/3은 앞으로 새로 들일 옷들을 위한 빈자리, 그리고 나머지 1/3은 나의 시간이 깃들어 있는 옷들을 위한 자리로.

🔎책이라는 만듦새, 우리의 만짐새

난다는 책을 뜯어…

  물론 마침내 가닥 잡힌 듯싶어도, 어떤 장식도 없이 오롯이 제목과 이름만으로 풀어야 할 디자인, 걸친 옷 없는 ‘맨몸’으로 승부해야 하니까요, 그 기획에 걸맞은 종이, 또 딱 맞는 제목을 결정하기까지 고민 더 길어집니다. 반농반진, “또 ____” 하고 길어진 제목 속 ‘언더바’가 그래서였으려나요? (교정지에 은희경 작가님이 직접 써주신바, 요 언더바 작가님의 ‘최애’ 문장부호라고! 😮)

  아무려나 마침내 만난 제목 ‘또 ____ 못 버린 물건들’ 그리고 레더라이크. 그 포슬 또 포근한 감촉 잘 느낄 수 있도록 따로 코팅을 하지 않았는데요, 요 종이 무두질 잘 먹은 가죽처럼 물에도 오염에도 강하다고 하니까요, 부러 만지고 자주 만나주시면 한답니다.

  또하나 이번 책의 숨은 포인트는 남방색 헤드밴드! 양장 제본한 책의 ‘머리’에는 접착 부분을 보강하면서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마감을 위해 다양한 색상의 헤드밴드를 삽입하는데요, 책이라는 화룡의 점정인 이 부속, 그래서 우리말로는 ‘꽃천’이라 부른다네요. 단정하고 우아하도록 미니멀한 표지를 기획했지만 끝내, 또 못 버린 난다의 디테일 욕심… 부디 숨어 있는 푸른 꽃 한번 들여봐주셔요! (오늘 알게 된 그 이름 불러주시면… 내게로 와 꽃이 될지도… 😏)

👨‍👩‍👦‍👦 아주 사적인 난다의 오늘

또 사버린 책들

  난다 가족들이 직접 말하는 아주 사적인 난다의 근황, 오늘은 권현승 편집자가 가져왔습니다. 레터 주제에 맞게 사놓고도 또 사고 또 사는 책 이야기라는데...?

  좋아해서 더 잘 잃어버리는 책들이 있다. 맞다, ‘좋아함에도’가 아니라 ‘좋아해서’ 더 잘 잃어버리는 책들이다.

  분실을 원인에 따라 분류해보자면, 첫번째, 책장에서 꺼내 시도 때도 없이 들고 다니면서 읽다가 잃어버린다. 인도 배낭여행에 가져갔다가 이렇게 이성복 시인의 산문집을 잃어버렸다. 두번째는 좀더 ‘무의식적’인데, 더 많이 읽혔으면 좋겠어서 사람들에게 추천을 해주고 열변을 토하다가 아예 책을 (빌려)주고는 그 사실을 잊어버린다. 그 사실은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증언(“그때 빌려준 책 아직 나한테 있는데”)이나 우연찮게 찍힌 친구의 책장 사진을 통해 알게 된다(“어, 너도 이 책 가지고 있네” “네가 준 건데?” “어…?”). 잃어버린지도 모르고, 심지어 애초에 산 사실도 잊어버린 나는 이 책들을 ‘또 사버린다’. 세번째가 되면 상황은 미스터리해진다. 책은 종종 ‘그냥’ 사라져버린다. 가지고 나가지도 않았고 빌려주지도 않았는데 집안에서 감쪽같이 사라진다. 온갖 곳을 뒤져봐도 책은 나타나지 않는다. 놀랍게도 이런 책들은 다 내가 좋아하는 책들이다. 그러니까 대충 ‘내가 좋아해서 이 책들이 사라졌다’라는 억지 논리를 펴봐도 되지 않을까.

  ‘좋아한다’는 것 외에 이런 책들의 공통점은 모두 나와 오랫동안 함께한 책이라는 점이다. 사실 그 시간 동안 나는 이 책들을 거의 다시 펴보지 않는다. 그래도 그 책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나와 함께 살아간다. 나는 대충 이런 상상을 해본다. 굳이 다시 펴보지 않지만 내 마음 한편에 자리를 마련해주자 책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사라진다. 시간이 흘러 나는 다시 보기 위해 그 책들을 사고 책들은 다시 내게 온다. 그리고 반복. 그렇게 사라지고 또다시 오면서 이 책들은 점점 나와 뗄 수 없는 사이가 된다.

  그래서 난 책을 잃어버리는 걸, 친구들한테 (빌려)주는 걸 아쉬워하지 않는다. 그런 책들은 또 살 만한 것들이니까.

  (그러니까 이 글은 본격적으로 도서 구매를 권장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좋아하는 책이라면 여러 번 사라는, 여러 권 사서 주변 사람들한테 나눠주라는, 출판편집자가 쓴 글로선 굉장히 속 보이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 5분 만에 5문 5답

권현승 편집자와 함께, 우문즉답

  오늘 우문즉답은 소문난다의 필진과 나눠보려고요. 두 에디터의 사무적인 듯 사적인, 상당히 사소한 일상 되겠습니다.

권현승 편집자(권) 그리고 김동휘 편집자(휘)

우문 ①

휘:  벌써 네번째 소문난다인데, 이번 뉴스레터 준비는 어땠어?

권:  이번엔 절기 이야기에다 ‘물건들’이라는 테마를 추가해봤잖아. 기존엔 한 코너씩 따로 썼었는데 전체 그림을 상상하면서 이야기해보는 건 또 새로웠어. 주제가 주제인지라 사적인 얘기도 하게 되는데, 혹시 너무 TMI가 될 수도 있으니까 적당한 선을 찾으려고 신경 쓰는 경험도 새로웠고.

휘:  또 새로워버린 업무가 됐네…

우문 ②

휘:  물건 얘기나 좀더 해볼까? 가지고 있는 것들 중 가장 오래된 물건은?

권:  내가 빈티지 옷들을 좋아하니까, 50년 넘은 옷도 종종 있는데… 아, 거의 매일 차고 다니는 목걸이. 100년 됐다고 하는데 사실관계는 확인 안 됨. 수박빈티지라고, 신사동에 있는 빈티지 숍에서 샀어. 한마디로 소개하라고? 음… 어떤 취향의 사람이어도, 언제 들러도 하나쯤은 살 게 있는 가게? 아, 이 목걸이는 일본 오사카에서 공수해왔다는데 마음에 들어서 색깔별로 하나씩 사다보니까 벌써 4개인가 5개인가…

휘: 결국 또 사버린 목걸이들…

우문 ③

휘:  그럼 반대로 최근에 버린 물건이 있다면?

권:  몇 달 사이 책이랑 옷을 엄청 많이 버렸지. 가장 많이 가진 물건들이기도 하고, 공간도 많이 차지하는 것들이잖아. 근데 문제는 그사이 또 그만큼 채워져서 다시 버려야 함…

휘:  이쯤 되면 못 버린 건 물건이 아니라 버릇이 아닐까…

우문 ④

휘:  아까 사놓고 또 사버린 책들 이야기했잖아, 어떤 책들인지?

권:  음… 이제니 시인 시집들? 또 사게 되는 3가지 이유를 거의 다 충족한다고 봐야… 지금 기억나는 건 태국 빠이에 여행 갔다가 잃어버리고 다시 산 거. 다행히 『아마도 아프리카』는 살아서 돌아왔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가 사라져… 돌아가심. 어디서 뭐 하다 잃어버렸냐고? 그걸 모르니까 잃어버린 거 아닐까?

휘:  그러게… 아무래도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우문 ⑤

휘:  5분 안에 5문 5답인데 벌써 6분 넘어버렸네. 그럼 마지막 질문, 지금 집에 가고 싶나요?

권:  지금 집인데요?

휘:  원래 집에 있어도 집에 가고 싶은 거 아닙니까?

• 8월 31일:  『돈이 아닌 것들을 버는 가게』 |  『이 고도를 사랑한다』(걸어본다02 경주) 

• 9월 6일: 『짐승일기』 | 『순간의 철학』

🚪닫는 문

머무는 계절에게

  다가올 가을을 꿈꾸며 여러 가지 사물들을 놓고 꾸며보았던 이번 소문난다, 어떠셨나요? 변화가 일어나는 계절에는 언제나 새로움에 대한 설렘과 지난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 공존하죠. 그런데 ‘여름을 처분한다’라는 뜻으로 소개해드렸던 처서處暑, 이 ‘처處’라는 한자의 뜻에는 ‘머무르다’라는 뜻도 있다는 걸 아셨나요? 여름은 사실 처분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바로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이죠. 우리가 계절을 돌고 돌아 다시 만나게 될 그 순간까지요.

  머물 시간과 다가올 시간 모두와 함께하는 늦여름, 초가을이 되시길요!

백로白露에 돌아올게요. 또 만나요! 🤗

• 『또 못 버린 물건들』 출간 전, 매일 아침 은희경 소설가의 문장을 보내드려요.(8/28~9/1) 1000명 선정, 신청은 8/25까지, 요 링크에서 👉🏻 문장 배달 신청하기
  
  
• 난다 여름 시 학교가 어느새 마지막 강의만 남겨두고 있어요. 8/26 신형철 평론가의 강연으로 계절 학교 종강! 소량의 잔여석 티켓은 8/24 오후 5시 오픈됩니다. 👉🏻 여름 시 학교 잔여석 예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