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인소쥬방 대표 박차원 님ㅣ가을 별빛 따라 시간을 걷는 곳
▪️ 절기 이야기: 술을 빚는 마음
▪️ 인터뷰: 통인소쥬방 대표 박차원 님
▪️ 서촌의 시공간: 가을 별빛 따라 시간을 걷는 곳
✍️Editor’s note

밤 기온이 이슬점 이하로 내려가 풀잎에 이슬이 맺히는 백로(白露)입니다.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가을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시간이 잠시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마저 듭니다.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과 달리, 서촌의 시간은 늘 가을 구름처럼 천천히 흘러가는데요. 오늘은 서촌의 정취를 쏙 빼닮아 느리게 영글어가는 ‘통인소쥬방’과 ‘통인양조장’의 대표 박차원 님과 함께하려 합니다.


정성껏 빚은 술은 풀잎에 이슬이 맺혀 똑하고 떨어지듯 오랜 인고의 시간을 거쳐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이처럼 차원 님은 오랜 시간 이어갈 수 있는 일을 끊임없이 탐구하며 삶의 정수를 빚어내고 있습니다. (구)내외주가 부터 지금의 통인소쥬방까지 서촌에서 우리나라의 전통주와 풍류(流)문화를 이어 나가고 계시는 박차원 님을 만나보세요.

시집을 읽다가 마주한 평생직업
‘할머니가 되어서도 하면 좋은 직업이 뭘까?’에 대해 40대 초반부터 오랫동안 고민했어요. 오랜 시간 즐겁고 재미있게 살아가기 위해서 나이가 지긋이 들어서도 할 수 있는 일이 필요했죠. 세월이 지날수록 더 가치 있는 직업을 열심히 찾던 시기가 있었어요. 그 당시에 신경림 시인의 ‘노을 앞에서’라는 시를 읽었는데요. 시의 첫 줄에 ‘노파가 술을 거르고 있다’라는 문장을 읽는데 갑자기 노파가 술을 거르고 있고, 마당엔 빨랫줄에 빨래가 걸려 있고, 사람들이 어울리며 술을 마시는 장면들이 머릿속으로 지나가는 거예요. 문득 할머니가 되어서도 술을 빚으면 심심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술을 빚는 일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어요.

노을 앞에서

                                      신경림


노파가 술을 거르고 있다
굵은 삼베옷에 노을이 묻어 있다
나뭇잎 깔린 마당에 어른대는 긴 그림자
기침 소리, 밭은기침 소리들
두런두런 자욱한 설레임

모두가 어데로 가려는 걸까

마음이 반응한 대로 따라가다 보니

전통주를 정식으로 배우기 전에 술을 빚는 교육 과정에 참관한 적이 있었어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시루에 고두밥을 찌고, 상온에 식힌 고두밥을 옮겨 담는 과정들을 다 지켜봤죠. 분명 쌀로만 빚었는데도 뚜껑을 열어 향기를 맡으면 꽃 향, 과일 향 같이 다양한 향기가 나더라고요. 어떤 사람은 딸기 향이 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파인애플 향이 난다고 하는데 제 개인적인 해석으로는 개인의 기호에 따라 같은 술이라도 다 다른 향이 난다고 느끼는 것 같아요.


그날 밤, 천장을 바라보며 과연 이 일을 오래도록 즐겁게 할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그때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시루의 모습이 저에게 확신을 주었죠. "이 일이 바로 나에게 맞는 일이구나!" 설렘을 안고 시작한 일이 2005년부터 지금까지 쭉 이어져오고 있네요.

✍️Editor’s note

박차원 님의 전통주를 대하는 마음가짐은 누구보다 남달랐어요. 차원 님은 각양각색의 술 빚는 방식을 존중하고, 오랜 시간 숙련된 장인 정신과 함께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열린 마음을 갖고 있었죠. 이러한 마음 덕분에 우리는 옛 방식 그대로 빚은 전통주를 맛보고, 발효의 미학을 경험할 수 있는 듯 합니다. 서촌에서 차원 님의 술과 음식을 맛보는 것은 단순한 경험을 넘어, 서촌다운 풍류를 만드는 게 아닐까요?

한 방울을 얻기 위한 기다림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술을 빚다 보니 익숙해졌지만, 그만큼 더 깊은 정성을 다하게 돼요. 할머니들의 요리가 늘 맛있는 이유는 바로 자연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고 요리에 담아냈기 때문이잖아요. 술도 마찬가지예요. 계절의 변화에 따라 온도, 습도가 달라지니 그에 맞는 방법으로 술을 빚는 거죠. 자연의 순리를 이해하고, 재료 본연의 특성을 살려 술을 빚어야 맛이 살아나는 듯 해요.

예전에 술을 빚기 시작할 때는 술독을 끌어안고서는 ‘잘 부탁해!’ 하며 두드려주기도 했어요. 왜냐하면 이게 제 힘으로 하는 게 아니고 효모 종류인 미생물들이 일을 할 수 있도록 제가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요즘에도 ‘잘 좀 부탁해!’ 하고 얘기하면서 미생물들이 술을 다 빚어줄 때까지 수시로 상태를 확인해 주고 북돋아 주고 천천히 기다려주고 있어요. 요새는 뭐든 빠르게 결과를 알고 싶어 하는 시대잖아요. 하지만 술을 그렇지 않거든요. 술을 빚는 과정을 통해 기다림의 미학을 배우는 거죠. 제가 살아보니 있는 그대로, 자연스러운 게 가장 좋더라고요.

누가 만드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맛

술이라는 게 누가 빚느냐에 따라 맛도 달라져요. 술을 빚는 사람의 손 온도와 미생물의 작용이 상관관계가 있거든요. 손이 따뜻하면 발효가 빨리 되고, 술 반죽을 치대는 과정에서 얼마나 힘을 주느냐에 따라서도 맛이 달라질 수 밖에 없어요. 집마다 만드는 고추장, 된장, 김치 맛이 다 다르듯이 술을 빚을 때에 똑같은 재료를 넣어 만들고, 비율도 맞춰 넣고, 발효하는 시간마저 같더라도 만든 이에 따라 맛이 달라지죠. 

서촌에서 느껴지는 정취

옛부터 궁중에는 술을 빚던 부서와 공간이 따로 있었다고 해요. 술을 빚던 사람과 공간이 있던 역사적인 장소 서촌에서 제가 전통주를 만들면 잘 어우러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처음 서촌에 왔던 2014년부터 지금까지 서촌 골목을 걸을 때면, 마치 한 폭의 그림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묘한 기분을 느껴요. 서촌만의 분위기가 있다고 해야 할까요?

옛 것을 취하고 또 이어 나가며 

통인소쥬방의 '소쥬방'은 궁궐 부엌을 의미해요. 이때의 ‘쥬’는 ‘주’의 옛 표기법이고요. 그래서인지 통인소쥬방의 음식이 임금님께 내어 드리던 수랏상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그런 개념은 아니예요. 궁중 음식보다는 격식이 간소화된 형태지만, 각 지방에서 나고 자란 최고의 식재료들과 특산물로 채워진 굉장히 격조 높은 한상차림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돼요. 통인소쥬방에서는 나의 가족들, 또는 귀한 손님들께 대접하는 마음으로 신선한 식재료들을 직접 손질하고 요리하여 좋은 술과 함께 즐길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하고 있어요.

손님에게 내어드리는 정성

옛날에는 손님을 맞이할 때, 꼭 식사와 함께 집에서 빚은 술을 대접하는 문화가 있었어요. 마치 김치 맛이 집집마다 다르듯, 각 가정마다 전해 내려오는 독특한 술 맛이 있었죠. 또 집안의 형편에 따라 다양한 재료를 활용해 빚은 술을 손님의 취향에 맞게 내어 드렸다고 해요. 통인소쥬방은 바로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아,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취향에 맞는 술을 즐길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하고 있어요.

훗날 제 삶을 돌이켜 봤을 때, 후회보다는 열정을 다했던 삶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매 순간 최선을 다하며 살되, 내 삶에 여백을 두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10년 동안 술 만드는 일에 몰두했던 경험은 저에게 값진 자산이 되었지만, 동시에 쉼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해줬어요. 지금도 틈틈이 혼자 여행을 떠나, 다시금 삶의 에너지를 충전하곤 해요. 일에 매몰되는 것에서 벗어나 몸과 마음을 주기적으로 환기하며 사는 게 좋더라고요.

✍️Editor’s note

술을 빚는 과정은 하나부터 열까지 체력적으로 고되고, 과정 중에 하나라도 삐끗하면 처음으로 다시 되돌아가야 하는 일이라고 해요. 차원 님이 이 모든 과정을 오롯이 인내하고, 술이 발효되는 시간을 지나 손님상에 올라가기까지 얼마나 많은 정성을 쏟아붓는지 새삼 알게 되는 시간이었어요.

 

이슬이 한 방울씩 맺히듯 술이 빚어지는 과정이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 그 어떤 것보다 값지게 돌아오는 것처럼 묵직한 기다림의 미학을 마음속에 새기며 더 서촌의 열다섯 번째 이야기를 마칩니다.

Editor. 조아림
🔍 서촌 문화 | 경복궁 별빛야행 | 가을 별빛 따라 시간을 걷는 곳

높아지는 하늘, 짙어지는 별밤. 서촌의 가을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마주할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 있죠. 가을밤에 더 아름답게 빛나는 경복궁입니다. 오는 9월 11일부터 경복궁 야간개장이 시작되는데요. 야간개장과 더불어 한 달여 동안에는 경복궁 소주방에서 궁중의 수라상을 경험하고 국악 공연을 즐길 수 있는 ‘경복궁 별빛야행’이 진행될 예정이에요. 벌써 많은 분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아 현재는 일반(잔여) 예매만 가능하고 해요. 별빛야행이 매진일 경우 옆 동네 창덕궁의 달빛기행도 함께 추천드립니다. 은은한 별빛 아래 궁궐 가장 깊은 곳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떠신가요?


📍 경복궁 별빛야행 | 경복궁 소주방
🌙 2024년 9월 11일(수) ~ 10월 6일(일)

사진출처 | 국가유산진흥원

 🔍 서촌 가게 | 서촌 방앗간집 | 정성을 빚는 방앗간

오늘은 술을 빚는 마음에 대해 들어 보았습니다. 백로의 이야기를 들으며 음식이나 형태를 만든다는 의미의 ‘빚다’라는 단어가 오늘 더 따뜻하게 느껴졌어요. 단순히 만들고 제조하는 것보다 만든 이의 정성과 받는 이의 설렘이 글자에서도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달까요. 백로에 소개해 드릴 서촌 가게는 이 따스한 단어에 잘 맞는 또 다른 음식에 대한 곳인데요. 바로 참새도 지나칠 수 없다는 서촌 방앗간이랍니다. 이른 아침부터 고소한 냄새와 알록달록한 떡으로 가득한 우리 동네 방앗간. 햇빛과 바람의 결실, 그리고 이웃의 정성이 넘치게 담긴 서촌 방앗간에서 이번 가을, 꽉 찬 올해의 결실을 음미해 보세요.


📍 신진떡방앗간 | 통인동 93-1

📍 효자떡집 | 통인동 96-2

📍 충남떡방앗간 | 통인동 10-3

📍 오성떡집 | 체부동 57

사진출처 | 충남떡방앗간

글 | 최연우 

the seochon 16호는 9월 22일 추분(秋分)

님을 찾아갑니다.


백로의 인사는 김태운 님의 시와 함께 끝마칩니다.

그럼 돌아오는 절기에 또 만나요.

이슬점

                           김태운

가을엔 다들 눈물을 갈아끼운다
어쩐지 너무 많은 감정의 계절을 지나왔다

이제 밤에 쓰는 차가운 가슴에 이슬 맺히고 
가로등 불빛은 입을 다물기 시작할 것이다

공기 중에 나의 밀도가 낮아진다
잠시 숨을 참고
가능한 한 멀리 내다본다
거기, 가닿지 않을 미래

정수리로 떨어지는 체념 한 방울
님, 오늘의 the seochon은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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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 휴먼 콘텐츠 <더 서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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