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기 다른 예술 작품 속 여러 겹의 사회상 구스타프 클림트의 '죽음과 삶'(1910~1916). 사진 레오폴트미술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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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오스트리아 빈.
전통적인 아카데미 예술이 아닌 ‘새로운 예술’을 꿈꾸는 사람들이 모여 ‘빈 분리파’를 결성하고 구스타프 클림트를 대표로 선출합니다.
여기엔 건축가 요셉 호프만, 디자이너 콜로먼 모저도 함께 있었죠.
‘시대에 맞는 예술’을 보여주겠다는 이들의 꿈은 20년도 이어지지 못하고 잿더미가 됩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각기 다른 꿈을 꾸었던 대도시 빈.
이곳의 예술 작품과 그 안에 담긴 여러 겹의 사회상을 소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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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아침의 연못'(1899). 사진 레오폴트미술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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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예술가들이 새로운 예술을 모색한 된 계기는 프랑스의 아방가르드 예술이었습니다.
다만 이들이 추구했던 예술은 ‘신성한 봄’(빈 분리파가 발간한 저널)이라는 말처럼 다소 모호합니다.
같은 시기 후기 인상파 작가인 세잔이나 고갱이 개인의 내면으로 파고들어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었다면, 클림트의 작품은 장식적인 경향이 강합니다.
키스, 연인, 삶과 죽음 같은 소재는 추상적이고 드라마틱하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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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의 '희망 II'.(1907~1908) 사진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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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불과 몇십년 전까지만 해도 클림트는 미술사에서 변방의 독특한 취향으로 여겨졌고 오히려 오스카 코코슈카의 표현주의가 더 인정받았습니다.
1986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1900년대 빈을 조명했을 땐 건축과 디자인을 먼저 소개한 다음, 회화를 다뤘으니까요.
그러나 최근 빈 모더니즘에 대한 관심과 함께 클림트에 대한 다른 해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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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내셔널갤러리가 2013년 전시에서 주목한 것은 초상화입니다. 이 전시의 출발은 클림트가 1888년 그린 ‘옛 부르크극장의 오디토리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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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클림트가 그린 ‘옛 부르크 극장의 오디토리움’. 그림 속 인물들의 얼굴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도록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다. 사진 오스트리아 빈박물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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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부르크극장은 당시 빈의 신흥 중산층에게 중요한 공간이었는데요. 황제 및 상류층과 중산층이 한데 모이는 몇 안 되는 공간이 바로 이곳이었기 때문입니다.
클림트의 그림은 극장의 무대가 아니라 객석에 앉은 사람들을 단체 사진처럼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여기서 중요한 건 극장의 콘텐츠가 아니라 ‘누가 여기에 앉아 있느냐’. 이 그림의 목적은 황제와 함께 공연을 관람하는 ‘이너서클’을 인증하는 ‘인증샷’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당시 빈은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이끌고 있었지만, 그 제국은 헝가리와 타협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그 안에는 루마니아, 체코, 폴란드, 독일, 이탈리아 등 다양한 출신의 인구가 각자의 언어와 종교 인정을 요구하고 있는, 겉모습은 제국이지만 절충적인 대도시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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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클림트 '헤르미네 갈리아 초상'(1904). 사진 영국 런던 내셔널갤러리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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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신흥 중산층은 초상화로 신선한 취향과 계급을 과시하려 했습니다. 이를 가장 탁월하게 충족해 준 화가 중 한 명은 클림트였고요.
즉 인상파의 화법은 가져오되, 왕정을 인정하지 않는 급진성은 제외하고, 상류층 취향과 적당히 타협하고 싶었던 빈 중산층의 욕망을 클림트의 회화가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미의식은 다른 한쪽에서 반발을 일으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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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가 참여한다면 나는 전시하지 않겠다!”
이 말은 클림트가 최고 인기 작가였을 때 20대 작가인 리하르트 게르스틀이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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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하르트 게르스틀의 자화상(1904). 사진 레오폴트미술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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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스틀은 푸른색을 배경으로 한 자화상을 비롯해 뛰어난 초상화를 남겼죠. 그는 아널드 쇤베르크의 음악을 알아보고 가까이 지내며 그림을 가르쳐주기도 하고, 그의 초상도 그렸는데요.
쇤베르크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클림트의 작품은 예술성이 부족하다고 느껴진 듯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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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코코슈카가 그린 로테 프란초스의 초상(1909) 사진 필립스컬렉션 제공. Acquired 1941; © 2022 Foundation Oskar Kokoschka /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 ProLitteris, Züric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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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슈카가 클림트를 ‘대도시 스타일리스트’라고 말했다는 기록도 있는데요.
이렇게 클림트가 대도시에서 인정받으려는 중산층의 욕망에 충실했다면, 그의 다음 세대 젊은 작가들(게르스틀, 코코슈카, 에곤 실레)가 빈에서 본 것은 그러한 욕망이 낳은 어두운 그림자였습니다.
빈은 도시화가 이뤄진 링슈트라세 지역의 땅 위로는 새로운 건축과 화려한 일상이 펼쳐졌죠. 그런데 이곳의 지하에는 ‘두더지 인간’들이 살고 있고, 그 외곽에는 ‘홍등가’로 불리는 성매매 지역이 크게 발달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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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빈의 거대한 하수구를 배경으로 한 장면이 나오는 영화 '제3의 사나이'(1949). 오손 웰스가 출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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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더지 인간’은 일자리를 구하러 도시에 왔지만, 집이 부족해 지하 하수구에서 살았던 이민자들을 가리킵니다.
1880~1890년에 인구가 두 배로 증가한 빈에서 이민자들은 열악한 환경에 시달렸고, 이러한 실태를 고발하는 다큐멘터리 사진집이 빈에서 세계 최초로 발표되기도 했죠.
실레의 적나라한 누드는 주체할 수 없이 폭발하는 욕망의 단면을 암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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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실레의 '고개를 숙인 자화상'(1912). 사진 레오폴트미술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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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짧은 기간 안에 폭발적으로 분출된 욕망은 클림트의 ‘탐미주의’나, 빈 분리파 건축가들의 ‘총체 예술’, 혹은 실레와 코코슈카의 표현주의 어느 한 쪽으로도 정리되지 못한 채 전쟁으로 막을 내립니다.
이후 빈은 반유대주의, 사회주의(레드 비엔나), 나치즘 등 극단을 오가며 소용돌이에 휩싸였고요.
그런 격동기를 앞둔 빈의 모습이 최근 현대 사회의 출발로 여겨지며 연구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예술가들의 작품들은 같은 도시 안의 너무나 다른 모습을 표현하며 여러 가치가 혼재했던 빈의 모습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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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어질 듯한 마음을 느끼지 못한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뭉크의 절규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외침입니다. 그림을 볼 때면 바로 내 마음 같아 저절로 넋을 잃고 빠져 하염없이 바라봅니다. 그리고 나는 후련함에 안도합니다.
👉 좋은 예술 작품이 만들어주는 '카타르시스'가 예술의 존재 이유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이 낳은 절규했던 천재 이상의 말이 떠오르네요."나 자신을 전자의 원자로 하라" 날 격변시키고 혼동시키는 전자들 가운데에서 언제나 홀로 꿋꿋이 버텨내는 원자로..더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필연적 운명을 가진 천재들은 절규할수밖에 없나봅니다. 엄청난 힘을 가진 원자기에...(임효진)
👉 이상의 말에 대해 알지 못했는데, 전자와 원자 비유가 절묘하고 흥미롭네요.
🔸뭉크의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저는 어렸는데요. 울렁거리는 기분이 들고 노을이 우울해보이고 -저는 노을이 아름답다고 느끼거든요- 사람도 위잉하고 너울대는게 참 그랬습니다. 그다지 좋아하는 미술 작품은 아니었지요. 하지만, 예술에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다는 것은 크나큰 창작성을 인정받는 것이고, 그것도 아주 독특하기 때문에 유일하다는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키티구구) 👉 같은 노을을 보고도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생각과 감정을 느낄 것 같습니다. 평소에 느끼기 어려운 것을 다른 사람의 세계로 들어가 느껴보는 것도 소중한 경험인 듯 합니다.
🔸 막연한 뭉크의 절규를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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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영감 한 스푼'이 전해드릴 소식은 여기까지입니다.
저의 인스타그램(@mini.kimi)으로도 감상, 의견, 공유 등등의 이야기 나누어주세요.
한 해 동안 재밌게 읽어주신 구독자 여러분, 감사드립니다. :)
내년에도 미술 속 여러 이야기를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행복한 새해 맞으세요!
김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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