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없이 깨끗하게 책을 보는 걸 선호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손때를 묻히며 책을 읽는다
안녕하세요. 정민호입니다.
최근 친구와 만나서 대화하다가 놀란 일이 있습니다. 영화와 애니메이션에 일가견이 있는 친구였는데요. 그의 말을 듣고 보니, 함께 아는 지인들 중에도 ‘덕력’ 있는 친구들이 여럿 있었어요. 저는 그들의 ‘덕력’을 알아보지 못한 거죠. 그중에는 자신의 ‘덕력’을 숨기는 데 능하다고 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마니아들끼리 통하고 보이는 게 있었다는 사실에 배신감까지 느껴질 지경이었습니다.
또 저를 놀라게 한 얘기는 그가 주변 사람들 일상에는 별 관심이 없고, 오직 그들의 문화적 취향에만 관심이 있다는 말이었어요. 저와 연락할 때마다 영화 신작에 관해 얘기하는 것도, 제가 영화를 보러 갈 때만 크게 궁금해하는 것도 그제야 다 이해가 되었습니다. 제가 모르던 세상과 그 친구에 대해서 조금 더 알게 된 것 같았습니다.
문화적 취향이 꼭 일상과 구분되는 건 아닐 겁니다. 기사를 보니 어느 인터넷은행은 고객들의 ‘도서 구매 내역’을 신용 평가에 활용한다고 해요. 책을 자주 사는지, 한 권당 가격은 얼마인지, 특정 분야 책 구입 기록 등 정보를 이용해 긍정적으로 반영한대요. 책을 사서 보는 사람들은 대출금을 연체하지 않을 가능성, 일상적인 생활 패턴을 유지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크다고 예상하는 것이겠죠.
저도 요새 사람들이 어떤 책을 읽는지, 어떻게 읽는지 궁금해하며 지냅니다. 뉴스레터에 실을 이야기를 찾아다니는 중이랍니다. 피드백 많이 남겨주세요. 함께 나눌 만한 이야기는 뉴스레터에 소개할게요.
오늘은 각자의 방식으로 책을 읽는 분들의 글을 보내드립니다.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책을 공유하며 생각을 나누고 두터운 신뢰를 쌓아나가는 이하나 선생님의 이야기. 7년째 〈가스펠투데이〉에 서평을 연재하고 있는 황재혁 목사님의 기고를 함께 보내드려요. 오늘도 재밌게 보시고, 즐거운 한 주 보내시길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
|
〈서사의 서사〉 4호, 면지에 대한 글을 읽다가 문득 떠오르는 이가 있었다. 책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친구인데, 꼭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내게 책을 선물한다. 자주 “언니, 이 책 읽어봤어요? 언니가 좋아할 것 같아서요”라며 자신이 즐겁게 읽은 책을 추천하거나 빌려주기도 한다. 그래서 내 책장에는 그녀의 흔적이 묻어있는 책들이 있고, 그녀의 책장에는 내 책들이 가득 자리 잡고 있다.
그녀는 책을 선물할 때 맨 앞장(이라고 지칭하던 면지)에 짧은 메시지를 써주곤 한다. 책 제목과 메시지만 읽어도 그 책을 건네는 마음을 알 수 있다. 최근에는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서》(봄날의책)를 선물로 받았다. 그때 나는 갑상선 수술을 앞두고 있었다.
사람마다 독서 습관이 다르다. 흔적 없이 깨끗하게 보는 걸 선호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마음에 울림이 있고 기억하고 싶은 문장에 밑줄을 치거나 인덱스 탭을 붙이는 등 손때를 묻히며 본다. 내게 책을 주는 친구도 그런 편이다. 그녀가 읽은 책을 빌려보면 중간중간 글에 대한 생각이나 저자에게 던지는 질문을 적어놓은 흔적과 만난다. 그걸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ㅋㅋㅋㅋㅋ’라고 써놓은 걸 보면서 나도 따라서 킥킥 웃기도 하고 꾹꾹 눌러 쓴 문장을 조용히 소리 내어 읽어보기도 한다.
|
|
|
작년엔 주중에 사용하지 않는 교회 공간을 책방으로 만들어 1년 동안 운영했었다(우리의책방). 교회 성도들이 개인 소장 도서를 가져와 비치해두고 누구나 밑줄 치거나 메모를 남기며 읽을 수 있는 콘셉트의 책방이었다. 겉장에 붙은 작은 메모지를 읽어보면 그 책을 추천하는 이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꼭 마주 보고 앉아 이야기하지 않아도 책을 통해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소통할 수 있었던 것 같다. |
|
|
지난주에는 큰딸이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를 쓱 내밀었다. ‘뒤쪽 면지’에 책에 대한 자기 생각을 기록했다며, 엄마도 읽고 그 옆에 생각을 남겨주었으면 좋겠다는 요청이었다. 밑줄 친 문장과 메모를 보면서 사춘기 딸아이의 고민이 무엇인지, 어떤 생각들이 아이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책을 읽고 나니 아이와 대화하며 함께 읽은 느낌이 들었다.
책은 그 자체로 소중하지만, 읽힐 때 내 사유의 재료가 되고 나를 채워가는 경험이 된다. 그리고 누군가와 책을 공유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사유 과정을 지켜보게 되기도 한다. 파란 색연필을 사용하는 남편의 밑줄은 주로 객관적 팩트에 그어지고, 사춘기 딸아이의 밑줄과 메모에는 인간관계와 타인을 바라보는 자신에 대한 성찰이 담겨있다. 그뿐 아니라 예전에 읽은 책을 다시 보면, 과거 내 상황과 고민이 보이고 성장한 현재의 나를 비교할 수도 있다. 과거의 나와 마주하는 기분이랄까. 나에게 독서는 글을 이해하는 활동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글을 쓴 작가를 경험하는 것, 그리고 그 경험을 앞서 한 사람들의 사유 과정을 경험하는 일이다.
요즘에는 전자책이나 오디오북 등 다양한 방법으로 글을 읽는다. 그럼에도 나에게 종이책이 여전히 매력적인 건 책장을 넘기는 소리와 연필로 밑줄을 그을 때의 느낌, 시공간을 뛰어넘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흔적들 때문이다.
이하나 멋진 남편과 세 딸아이 루아, 로이, 라엘 그리고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 건강한 교회를 세워가고 있다. 커피, 책과 여행, 사람들을 만나고 낯선 나를 발견하는 것을 사랑한다.
|
|
|
올해 2024년은 목회자 저널 〈가스펠투데이〉에 ‘독서순례’를 처음 연재한 지 7년째 되는 해다. 내 컴퓨터의 ‘독서순례’ 폴더를 뒤져보니 여태껏 기고한 170개 정도의 서평이 조용히 잠자고 있었다. ‘독서순례’ 연재를 시작하고 나는 한 번 혼인을 했고, 두 아이를 낳았으며, 세 번 교회 사역지를 옮겼고, 네 번 이사를 했다. 누군가는 이렇게 꾸준히 서평을 기고한 걸 보고, 내가 막중한 사명감에 사로잡혔거나 언론사에서 원고료를 풍족히 챙겨줄 거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애석하게도 현실은 정반대다. 나는 매번 간신히 마감을 지켰고, 언론사는 경영난으로 몇 년간 원고료를 거의 지급하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2018년에 나와 함께 시작한 창간기자 중에 지금까지 글을 쓰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그들은 다 어디 가고 왜 나만 남아서 여전히 글을 쓰는 걸까?
나의 독서 연대기에서 일종의 원역사에 해당하는 시기는 내가 군대에 있을 때이다. 2007년 4월 20일 김포의 어느 공군 방공포 부대로 자대 배치를 받은 나는 2009년 3월 22일 만기로 전역할 때까지 약 2년간 독서노트를 썼다. 군 복무 중에 총 153권의 책을 읽었는데, 한 권씩 읽을 때마다 노트에 책 제목과 날짜를 적고 짧은 소감을 남겼다. 그 노트는 지금도 서재 책꽂이에 비밀스럽게 숨겨져있다. 독서노트의 앞면과 뒷면에는 당시 〈국방일보〉에서 오려 붙인 소녀시대 티파니 사진이 아직도 남아있다. 티파니를 닮은 나의 배우자 모르게 독서노트를 펴서 내용을 살펴봤다.
|
|
|
자대 배치 후 가장 먼저 읽은 책은 앨빈 토플러의 《부의 미래》(청림출판)였고, 전역 직전 읽은 책은 매트 레드맨의 《하나님 앞에 선 예배자》(죠이선교회)였다. 나는 군 복무 시기에 직속 선임이 왜 그토록 나를 괴롭혔는지 몰랐는데,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자대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참이 내무실에서 눈치도 없이 《부의 미래》를 읽고 있으니, 어느 선임이 그 후임을 좋아했을까.
돌이켜보면 내게 서평 쓰기는 사명감이나 금전적 보상이 없더라도 그냥 하는 일이었다. 그저 좋아서 하는 일이었기에, 타인의 관심과 격려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별일 없이 계속 책을 읽고 서평을 쓰고 싶다. 최근에 TV 프로그램 〈싱어게인3 무명가수전〉이 가수 홍이삭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방송 초창기 홍이삭은 자신을 ‘가수 생활의 유통기한을 알고 싶은 가수’라고 소개했는데, 이번 우승으로 유통기한이 무한대인 가수임을 스스로 증명했다. 나도 홍이삭처럼 유통기한을 알고 싶다. 독서순례자로서 나의 유통기한이 언제까지일까. 바라기는 주님 품에 안길 때까지 독서순례자로 살고 싶다. 아니 주님 품에 안기고 나서도 독서순례자로 살고 싶다. “천국이 있다면 그곳은 책으로 가득 찬 도서관일 것”이라고 한 소설가 보르헤스의 말대로라면, 독서순례자로서 나의 유통기한도 끝이 없으리라 믿는다.
황재혁 함께하는교회 예수마을(서울시 관악구)의 청년부 목사. 2018년에 목회자 저널 〈가스펠투데이〉의 창간기자로 합류하여 ‘독서순례’와 ‘설교자의 리딩누크’를 연재하고 있다. 독서 중에 발견한 빛나는 구슬을 하나로 꿰어 《교회 교향곡》(바람이불어오는곳 출간 예정)을 썼다.
|
|
|
지난 호 의견💌
🗣️ 정다운 번역가님의 글은 이전부터 좋아해 왔습니다. 번역의 수고(보람) 덕분에 제가 쾌락을 누리고 있다는 게 새삼 감사하고, 그 수고의 마음이 뭔지 알기에 친근하기도 했어요. 차보람 신부님의 글은 밀도가 높아서 아주 천천히 우물거리며 읽었습니다. 한동안 로완을 열심히 읽다가 최근의 몇 권에 손을 못 대고 있었는데, 《상처 입은 앎》을 어서 펼쳐보고 싶은 마음이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어 온 강동석 기자님의 궤적들이 저랑 겹치는 면이 많아서 신기하고 반가웠습니다. 저도 금장 주해 성서는 핸드폰으로 찍어서 읽거든요. 취리히판이나 ESV 스터디 바이블은 꽤 아쉬웠고요. 봄이다 버전은 좋다는 평을 몇 번 들었는데, 이참에 모아볼까 싶습니다. 결국 또 장바구니가 무거워지네요. 책만큼 즐거운 소비가 있을까요.
🗣️ 번역자가 책을 더 잘 음미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 서평자와 저자의 인연을 엮어서 써 내려간 덕에 새로운 서사가 된 서평. 남들은 성경 공부(연구)를 어떻게, 어떤 책의 도움을 받아서 하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잘 파고든 연대기. 다음 호도 기대됩니다.
🗣️ 이번 호엔 강 기자님의 성서 주석 연대기(?)가 특히 인상 깊었습니다. 제가 주석을 만난 시기와 순서가 비슷해서 무척 공감됐고 놀랐습니다. 결국 해설 성경(및 주석)을 찾는다는 건 성서의 세계를 더욱 알고 싶어하는 열망 때문일 텐데요. 아마 많은 사람이 종착역에 이르러서는 자기 삶에 주어진 과제를 자신의 언어(와 성서해석으로)로 풀어가는 과제를 당면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연대기 시리즈 너무 재밌습니다. '나의 최애 신학자 연대기' 국내, 해외편 같은 것도 있으면 재밌을 것 같네요.
🗣️ 마침 성경 읽기에 도움이 되는 내용이라 글에 나와있는 책들을 서점에서 살펴보고 구입하려 합니다. 감사해요!
🗣️ 강동석 형제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저의 성경읽기 서사와 비슷해서 놀랐네요. 마지막 글귀. 성경책이란 거듭 낯설게 읽어야 하는 법이다.라는 말. 정말 공감합니다. 감사합니다.
🗣️ 강동석 기자님의 글을 재미있게 읽었어요. 덕분에 '봄이다프로젝트'라는 출판사도 알게 되었네요. '교양인을위한성경' 시리즈도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성경을 읽는 방법, 횟수나 그 정도에 대한 고민이 많습니다. 지금 다니는 교회에서는 매일 큐티를 하는 것을 강조하는데, 저에겐 잘 와닿지 않아서요. 큐티에 대한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본 글도 써주시면 좋겠어요.
🗣️ 에디터님, 일러스트 작가님과 저 혼자 내적 친밀감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친근감 있는 어투의 뉴스레터 너무 좋습니다. 매번 꽤 많은 텍스트로 여러 스피커의 이야기를 담아주셔서 읽는 재미가 있으면서도, 지속 가능한 분량인지 걱정(?)이 살짝 됩니다. 섭외의 대왕이신가요? 대단합니다! 아무튼 이러한 제 취향저격 뉴스레터가 탄생하게 되어 기쁘다는 말씀을 드려봅니다! 화이팅~! 아, 김근주 교수님의 성경책이 있다니 궁금해지네요. 로완 윌리엄스의 은퇴식 이야기도 흥미로웠어요.
|
|
|
〈서사의 서사〉 뉴스레터는 일주일에 한 편씩 발행됩니다. 아래 ‘구독하기’ 버튼을 누르시면 놓치지 않고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다음 주에도 유익한 이야기로 찾아뵐게요.
|
|
|
오늘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구독자님의 의견이 궁금해요!
〈서사의 서사〉에 바라는 점이나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피드백을 남겨주세요.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