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내 서늘하고 어둑한 그곳은 멀찍이서 보면 책들의 무덤인가 싶기도 한데, 다가가 들여다보면 그보다는 불 꺼진 대기실에 더 가깝습니다. 이러저러한 핀잔(표지에 흠이 있다거나 책등이 구겨졌거나 박이나 코팅이 벗겨졌거나 등등)으로 대기실로 돌아온 이 친구들은 잔뜩 주눅이 들어 같은 처지들끼리 부대낀 채 시간과 어둠을 빨아들입니다. 꽤 오래도록 말이죠. 추석 직후 찾은 반품 창고의 많은 꾸러미들 가운데 매만지고 추스려 1번부터 9번까지를 무대에 올립니다. 새 주인을 만나 제 할 일을 해내길...
곧 마감하는 <나무의 맛> 저자 아르투르의 ‘맛을 표현하는 언어가 의외로 빈약하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진짜 끝내주는데, 어트케 표현할 길이 없네!” 하던 건강보조식품 광고가 떠올라요. <나무의 맛>은 유쾌하게 가볍게 창의적으로(?) 나무를 사랑하고 나무를 먹는 저자의 미식 여행기입니다. 소풍 갈 때 지하철, 기차, 비행기 등 이동하면서 읽기에 매우 잘 어울려요. 이제 가을이니까요.

고로쇠수액을 졸이면 메이플 시럽이 돼요(이론상으로는요)
🌱 죽순
불투명한 흰색 몸통에 빨갛고 파란 뚜껑이 달린 10리터 들이 약수통에 든 고로쇠수액을 드셔보신 분 계신가요? 저는 꽤 최근까지도 고로쇠수액을 접했습니다. 이물질이 덜 걸러진 듯한 뿌연 물을 “건강에 좋다”는 권유에 한 사발씩 받아 마셨는데요, 김 빠진 밀키스에 물을 탄 맛이라 제 취향은 아니에요. MSG에 익숙한 혀가 ‘천연’의 맛을 몰라서일지도요.🙈
<뉴욕 타임스> 2009년 3월 6일 자에 “한국의 음료는 단풍나무에 있다”(In South Korea, Drinks are on the maple trees)라는 기사로도 소개된 고로쇠수액. 기사 제목에서 스포된 것처럼 고로쇠나무는 단풍나무과입니다. 그러니 살살 졸이면 우리가 아는 메이플 시럽이 될지도요!
찐득하고 다디단 메이플 시럽의 원조는 설탕단풍나무 수액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름만으로도 왜 시럽의 원료가 됐는지 알 것 같죠? 수액을 채취하려면 줄기에 상처를 내야 하기 때문에 오래 성장해 직경이 일정 정도 이상인 것을 고른대요. 업자들은 설탕단풍나무 숲 하나를 통째로 사용합니다. 나무에서 나무로 이어진 관을 타고 수액이 모이면, 펄펄 끓여 캐러멜화를 거치죠. 천연 수액 40리터에서 겨우 1리터만 시럽이 됩니다.
<나무의 맛> 저자는 캐나다에 있는 ‘슈거 문’ 농장을 찾아 메이플 시럽 장인을 만나 이 모든 과정을 생생하게 듣고 봅니다. 그가 생산한 시럽은 황금빛이고, 크리미하면서 상큼하면서, 꽃 향기가 감도는 고급 다크 초콜릿과 밀크 커피, 바닐라, 캐러멜 향이 어우러진 복합적인 단맛이 난다고 해요. 
출간을 앞둔 <나무의 맛>을 편집하면서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맛을 표현하는 단어가 생각보다 다양하지 않다는 것이었어요. 저자도 인정하지만, 결국 낯선 맛을 설명하기 위해 수차례 가공을 거쳐 탄생한 식품들에 빗대는 것이 최선이었죠. 
음상어가 발달한 아프리카 가나의 ‘시우’(Siwu)어에는 “생강처럼 입에서 청량하게 느껴지는”이라는 뜻의 saaa(싸아아)라는 단어가 있다고 해요. 한국어의 형용사 ‘싸하다’가 딱! <나무의 맛> 저자가 한국어를 알았다면 더 풍부한 표현이 가능했을까요? 구독자 여러분만 아는 ‘맛 단어’가 있다면 알려주세요!

‘절판’ 책들 구해 왔어요(feat. 중쇄를 기다리(지 않)는 마음 2탄)
🦻 팔랑
해마다 두어 차례, 때로는 서너 차례 그곳에 갑니다. 책들이 제할일을 다하지 못한 채 돌아와 쓸쓸히 누운 자리. 거의 매번 사방이 그득하게 차 있는데도 텅빈 듯 한여름조차 을씨년스럽고 서늘한 그곳은 반품창고입니다. 전국 각지의 서점으로 이사를 갔다가 그곳에서 제집을 찾아가지 못하고 결국 되돌아온 책들은 제각기 다른 모양새로 돌아옵니다. 말쑥하게 상처 하나 없이 돌아온 이가 있는가 하면, 이리 뜯기고 저리 뜯긴 채 허물어진 모습도 드물지 않습니다. 이것은 유물인가, 싶을 정도로 지난한 개인사를 떠듬거려야 기억이 올라오는 옛 책들도 간혹 만납니다. 
혹여나 이 글을 보는 서점인이 계시다면, ‘너무 늦지 않은 반품’을 부탁드려요. 품절의 공백을 중쇄로 메우기란 녹록지 않고, 맞춤하게 돌아오는 반품들은 때로 옛 친구처럼 안쓰럽고 반갑습니다. 

오늘은 꽤 오래 ‘품절’의 늪에 빠져 있는 책들 가운데 닦고 문지르고 새옷을 입혀 새 집으로 보낼 만한 책들을 소개합니다. 입양을 원하시는 분들은 마티 메일(matibook@naver.com)로 뜻을 보내주세요. 정가의 90%, 발송료는 저희가 부담해 보내드립니다. 

 푸르트벵글러 3부 
독일에서 ‘최고의 평전상’을 수상한 이 책은 마티 첫 시리즈 ‘파우스트의 거래 3부작’의 세 번째 타이틀입니다. (첫 책은 알베르트 슈페어의 회고록 <기억>, 두 번째는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이었어요.) 나치와 불화하고 괴벨스에 타협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끝까지 망명하지 않았던, 독일이 ‘국가 자산’으로 취급했던 푸르트벵글러의 일대기가 정치적 소용돌이와 함께 파란하게 드러납니다. 종전 후 군수 물자를 제조하던 공장 노동자들 앞에서 지휘한 ‘합창’은, 수많은 9번들 가운데 여전히 막강한 힘을 지닙니다. 

박해천 선생님이 총괄 기획하고 문화 연구자, 도시계획 및 부동산 연구자, 디자이너, 데이터 분석가가 함께 작업한 인천의 ‘도시 문화 분석 보고서’입니다. 각종 데이터와 자료들이 방대하고, 170*240mm로 판형도 크고 분량이 408쪽에 이르는데, 17,000원입니다. 이 책은 대표적으로 초판 부수 결정 실패에 해당하는데요, 잠시잠깐 유통하고 오래오래 품절인 책이지요. 

얼마나 맘 편하게 걸어다닐 수 있는지, 그 척도를 나타내는 ‘워커빌리티’가 그 도시의 흥망성쇠를 좌우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서울의 ‘워커빌리티’는 몇점이나 될까요? 만점짜리 워터빌리티 도시를 향한 10단계를 분석합니다. 

이 책의 부제는 ‘우파는 부도덕하고 좌파는 무능하다?’입니다. (이번 대선 주자들을 보면, 이 선입견조차 고급스럽게 느껴질 정도입네요.) 이 저자들의 전작은 <혁명을 팝니다>였고, 신작은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입니다. 전반적으로 날카롭고 위트가 넘칩니다. 

정림건축문화재단이 기획하고 꾸리는 ‘건축신문 시리즈’ 가운데 23호입니다. 품절 문의가 가장 많은 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3부를 귀하게 모셔왔어요:-) 

쑥스럽지만, 마티의 첫 책이랍니다. 애초에는, <사랑과 죽음의 교향곡>이라는 제목으로 만들었다가, 몇 년 후에 <구스타프 말러>로 바꾸어 개정해 냈어요. 2005년 우수교양도서로 선정되었었습니다. 객관적 자료와 문헌들로 씌어진 평전이 아닌, 말러에게 평생의 벗이자 음악적 동료였던 발터가 바로 옆에서 바라보고 교류했던 말러를 떠올린 회고록이라고 하는 편이 더 잘 맞을 것 같습니다. 

 시차적 관점 6부 
스타 지젝의 수많은 책 가운데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1989),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1993), <까다로운 주체>(1999)의 뒤를 잇는 주저이며 스스로 대작(Magnum Opus)라고 칭한 대표적인 저술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두껍’습니다! 

대중음악 이론 연구자인 송화숙 선생님과 연구 동료분들의 세미나를 통해 번역 출간된 책입니다. 저자 키스 니거스(Keith Negus)는 음악학과 사회학 연구를 통해 대중음악의 상업성, 소비성이라는 기존 논의 범주에서 벗어나, 대중음악이 어떻게 매개되는지를 미디어, 테크놀로지, 역사, 지리, 정치 등으로 폭넓게 논의합니다.

1992년 BBC의 유서 깊은 강연 시리즈인 리스 강연에 초청받은 에드워드 사이드는 강연 주제로 “지식인의 표상”(Representations of the Intellectual)을 선택합니다. “문명의 충돌”, “역사의 종말” 같은 수사가 난무하며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주의와 회의주의가 팽배하던 시기, 그는 수많은 시청자를 확보한 강연을 통해 최신 이론도 고담준론도 아닌, 지극히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지식인이란 누구인가?” “지식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였지요. 지식인이라는 호칭이 더는 명예와 책임감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냉소와 비아냥을 불러일으키는 시대, 지식인의 표상을 묻는 것은 비판의 가능성을 묻는 일이었습니다. 에드워드 사이드 선집 가운데 중쇄를 찍지 못해 가장 마음이 아픈, 그리고 가장 자주 문의를 받는 책입니다. 딱 1부 찾아냈어요.

❝ 갖고 있는 책 중에 제일 비싼 책 #1 

❝ Baroque 
🔇 모베
갖고 있는 책 중에 가장 비싼 책을 소개해 달라는 구독자 피드백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사무실과 집 책장에 꽂힌 책 가운데 비싸게 산 책 몇 권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새 책과 중고를 가리지 않고요.

첫 책은 2012년 독일 쾰른 근교 라인브라이트바흐에 있는 울만(ullman) 출판사에서 펴낸 Baroque (바로크)입니다. 가로 30, 세로 41, 두께 7 센티미터로 굉장히 큰 책입니다. 가름끈이 웬만한 책등 두께입니다.

이 책을 기획한 프리랜서 에디터인 롤프 토만(Rolf Toman)은 이렇게 크고 무거운 예술책들을 여럿 엮어냈습니다. 이 책의 특징은 단연 압도적인 사진입니다. 글도 제법 있습니다만, 대형 서적 전용 거치대가 없이 이 정도 책을 펴놓고 읽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암부와 명부를 동시에 포착하는(또는 따로 찍어 합성하는) 디지털 시대의 사진술 덕에 직접 가서 봐도 볼 수 없는 바로크 예술의 디테일들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페이지를 접어 넣은 부분을 펼치면 가로 115 센티미터의 사진이 펼쳐집니다.  

가격은 덩치에 비해 그렇게 비싸지는 않다고 해야 할까요. 영국 아마존에서 145파운드(약 24만원)에 판매 중입니다.

❝ 부산 서점들과 커피와 돼지국밥과 대나무 
🌱 죽순
응달은 선선하고 양달은 후끈한 9월 말,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 북토크가 부산의 음악 서점 스테레오북스에서 있었습니다. 서핑하러 온 친구를 꾀어 부산 서점을 돌기로 작정하고, 책방한탸에서 시작해 책방동주, 비온후책방, f1963, 스테레오북스에 들렀어요. 우연히 들른+현지인이 추천해준+택시기사님이 권한 맛집과 명소도 있으니 찬찬히 즐겨주세요.

#책방한탸
2008년 문을 연 인문 서점이에요. '문사철'의 기운이 느껴지는 이곳에서 <헤겔 독해 입문> 편집을 시작하기 전에 공부해야 할 것 같아 이사야 벌린의 <낭만주의의 뿌리>와 칼 슈미트의 <정치적 낭만주의>를 골랐습니다. 벌린의 책은 구간이 있지만 새 마음으로 시작하고 싶어서 그만.. 한탸의 공간은 작지만 독자들과 함께 공부하고 이야기 나누는 탁자만은 컸어요. 흔쾌히 내놓은 자리라는 느낌. 오래 앉아 있어도 결코 타박받지 않을 것 같은 느낌. 
덧: 인도의 미술가들이 그리고 책 전체를 실크 스크린 기법으로 인쇄한 <나무들의 밤>을 친구가 손에 들었을 때 "그거 4만 천 원짜리야"라고 '경고'했는데요, 결국 생일선물로 사 주고 말았습니다.
덧: 책방 한탸의 '한탸'는 보후밀 흐라발의 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의 주인공 이름이에요.

#책방동주
한탸와 같은 해에 문을 연 책방동주는 과학 전문 서점이에요. 협소하지만 생물, 우주, 물리, 수학 책이 자기 자리에 안착해 있죠. 과학도들에게 인문서를 권하고픈 대표님은 철학 입문서와 사회과학서 몇 권도 쟁쟁한 과학서들 사이에 꽂아두셨더라고요. 저는 이곳에서 금을 '바른' 책 한 권을 샀습니다. 더스토리에서 나온 <월든>의 특별판인데요, 언젠가 제작에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고 업어 왔습니다.

#motto coffee
어깨가 슬슬 무거워져 잠깐 앉아서 쉬려고 들어갔다가, 고소하고 쌉싸름하면서 진득하나 끝맛이 텁텁하진 않은 룽고에 반했습니다. 다음에 또 갈 거예요.

#비온후책방
비온후출판사에서 운영하는 책방. 요리책부터 에세이, 그림책, 예술책이 골고루 포진해 있어요. 오랜만에 그림책들을 만나서 몽글몽글해진 기분으로 책방을 떠다녔던 것 같아요. 하지만 골라 온 책은 워크룸프레스의 <첫 번째 팝 아트 시대>. 

#f1963
고려제강 수영공장을 리모델링한 F1963은 서점과 예술 서적을 소장한 도서관, 화원, 카페 등이 한곳에 있는 복합문화공간입니다. 조병수 건축가의 작업이라고 합니다. 공장의 뼈대는 그대로지만, 실내의  장식과 쓰임은 완전히 달라져 흥미로웠어요. 예스24 서점 뒷문으로 나가면 마주칠 수 있는 정원도 근사합니다.

#스테레오북스
이날의 목표 스테레오북스에 도착한 건 저녁 6시 50분.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의 저자 채혜원 선생님과 반갑게 인사 나눈 후, 책들을 구경하고 친구와 서로 선물하자며 프루트벵글러의 <음과 말>을 샀어요. 몇 년 전 제주 여행 때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주고받은 후 마련한 작은 이벤트입니다. 같은 책을 간직하는 여행, 괜찮지 않나요?
북토크를 무사히 마치고 나가는데 대표님이 식당 두 곳을 추천해주셨어요. 수변최고돼지국밥과 국제밀면. 국밥집은 무조건 아침 8시에는 가야 한다고, 점심 때는 기다림이 길다고 팁을 주셨죠. 다음 날 7시 40분 수변최고돼지국밥으로 향했고, 든든하게 배를 채웠습니다. 아침 안 먹는 사람인데, 국밥 한 그릇을 싹싹 비우고 나왔더랬죠. 

#아홉산숲길 (사진)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450년 동안 조림했다는 아홉산숲길에 들러 산책했어요. 몇 달 전 친구가 택시기사님께 추천받은 곳이었어요. 대나무 숲이 어찌나 빽빽한지 저 안쪽은 빛이 들어가지 못해 캄캄하더라고요. 멋들어진 적송의 자태에 폰을 꺼내든 저는... 이제 나이 든 걸까요? 이른 시간에 가시길 추천 드려요. 11시쯤엔 벌써 사람들이 몰려서 한가한 산책을 즐기긴 어려울지도 몰라요.
이번 주 마티의 각주* 어떠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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