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낮의 일을 할 만큼 했는데도 어쩐지 책상을 뜨기가 어려워 그대로 턱을 괴고 쏟아지는 잠에 흐트러지던 차였습니다. 저녁 빛으로 푸르게 잠긴 창문에 스산하게 비쳐 보이던 사람의 그림자는 내가 아닌 다른 이처럼 보였습니다. 눈코입이 없고 흐릿하게 보이는 모양이 꽤 마음에 들었어요.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득, 저 흐릿한 사람이 하는 오피스는 어떨까... 생각에 닿았습니다. 틈만 나면 반대편의 서사로 머릿속이 뭉게뭉게 해지는 일 — 해가 저물 무렵 불이 켜지는 작은 오피스의 꿈 — 어릴 때부터의 버릇이 그날따라 먹먹해지도록 이어지며 넓고도 길게 저녁을 펼쳐냈습니다.
Soir(스와)는 프랑스의 고어로 '저녁, 밤, 황혼의 때'를 뜻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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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par David Friedrich. Two Men Contemplating the Moon, ca. 1825–30. Oil on canvas. 34.9 x 43.8 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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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아라비를 이끌며 일하고 있는 이혜원이라고 합니다.
낮에 허물어진 생각을 다시금 차근차근 세울 수 있는 저녁, 솔직하지 않은 맞다 아니다로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 어떤 일이건 중요도를 넘어... 시간을 넉넉히 쓸 수 있는 저녁,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과 이마를 맞대고 멀어지지 않는 저녁의 꿈으로 이루어진 스와의 오피스에서 첫 번째 인사를 건넵니다.
준비호를 써 내려가며 예전 처음으로 작은 작업실을 서순라길 가운데에 얻고 하나씩 기물을 친구와 만들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은행나무잎이 가득 날리는 종묘 담벼락을 마주한 다섯 평 남짓의 1층의 공간이었는데 꿈에서 본 것처럼 아름다운 모습에 이끌려 공간에 꼭 맞는 작은 가구들을 만들며 덜컥 문을 열었습니다. 종이 접듯이 판을 자르고 못으로 고정하고 좋아하는 황동을 길게 끊어 선을 그으며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나사못의 다양한 머리 모양이라든지 목재의 다채롭고 예쁜 브라운 등 재료가 지닌 아름다움에 처음 눈을 뜰 무렵이었습니다. 당시 함께 나무를 주문하고 조립하며 가구를 만들어 준 소중한 벗은 이후 멋진 인테리어/건축 디자이너로 성장하여 서울에서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준비 중인 < 작은, 태양의 빛을 닮은, 내장 모양의 > 편에서 함께 만들었던 집기와 기물들 기록도 조금 풀어볼 예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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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reau by Jacques Adnet. Metal desk with original faux textured leather fabric cover, made in France circa 1950.
자끄 애드넷의 탁월한 디자인을 보며 시대를 휘감는 듯한 아우라를 느낍니다. 공방이니 산업이니, 디자인의 어떤 '주의'라는 것을 우습게 만드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일까, 내다보는 것만큼 당시 속한 세계에 대한 깊은 애정과 헌신을 느낄 수 있어 제가 손꼽아 좋아하는 디자이너 중의 한 명입니다. |
Jacques Adnet (20 April 1900 – 29 October 19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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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야행성이라거나, 자정 넘어 영감이 샘솟는 타입의 디자이너가 아닙니다. 또 아침형 인간이라거나 새벽바람부터 요가를 하고 명상에 드는 현대인이 아닙니다. 때로 며칠 동안 먹지도 자지도 못하며 일에 빠져서 살고, 그저 먹고 놀면서 아무런 일 안 할 때도 많습니다. 하루 만에 모든 것을 생각해 내기도, 용기 있게 발표해 버리기도, 몇 달이고 머릿속이 멍하게 멍텅구리인 채 낙담하기도 잦습니다. 규격화하는 것에 실패해서 어디에 끼지 못하는 부품, 또는 깨어버리기에는 너무 무거운 도자기, 속이 비쳐서 겉에 입기에는 애매한, 효율이라고는 없는 인간이라고 스스로를 바보라고 생각할 때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참, 어떻게 돌아가는 걸까 신비롭기 짝이 없는 회사, 아라비를 시작하여 팀을 모아 조직을 꾸려나가면서 좋아하는 일을 하며 오늘에도 살아남아 있습니다. 살아남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아마도, 유의미한, 그리고 고유한 것에 대한 열망으로 이 세계에 속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또 서울이라는 도시에 반하고, 서울 사람들을 너무나 사랑하게 되어서 여기에서 살며 일하는 것만으로 기적이라는 느낌이 들 때가 많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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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맹민화 포토그래퍼와 일하다가 찍힌 한 컷. 또 친구이자 좋아하는 작가인 이광호가 찍어 준 사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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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와, 저녁의 오피스는 아라비가 없다면, 잦은 야근에 지치지 않았더라면... 또 복잡하고도 거대한 도시인 서울에서, 믿을 만한 동료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작전입니다. 이 믿는다는 말로 준비호를 여는 오늘의 인사를 맺습니다. 스와는 저녁에 여는 드나들 수 있는 공간으로써,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이 되고 싶습니다. 날씨가 좋았던 노동절에, 드디어 보낼 수 있어 설레이고 기쁩니다. 아, 벌써 깜깜해진 저녁입니다!
2024년 5월 1일, 이혜원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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