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 거세되어야 할 마음
결에게,

안녕 결, 민경이야.

긴 추석 연휴를 끝내고 허둥지둥 사흘을 보냈더니 어느덧 또 주말이 코앞이야. 가깝지만, 우리 동네는 아닌 작은 공원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어. 당근(당근마켓 거래)을 하러 왔거든.


넉넉하게 도착해버려서 카페에서 시간을 좀 보내려고 했는데 농구장을 중심으로 듬성듬성 둥그렇게 놓인 벤치들이 마음에 들어서 이곳에 자리 잡았어. 농구장에는 아이들이 있어. 아이들은 지압 훌라후프를 한창 가지고 놀다가 이제 흥미를 잃었는지 바닥에 던져두고, 팔을 흐느적거리며 몸을 흔들고 있어. 투명 훌라후프를 하는 걸까? 그러다 서로를 가끔 껴안기도 해. 남자아이 둘과 여자아이 한 명인데, 여자아이 키가 머리 하나만큼 작아. 아마 남매와 남자아이의 친구로 이루어진 모임인 것 같아. 여섯 살이 겨우 되어 보이는데 표정이며 움직임, 풍기는 분위기까지 제각각인 게 조금 신기해. 앞으로 저 아이들은 어떤 시간을 보내며 또 어떻게 달라질까 궁금해져.

 

공원에 앉아 있으니 떠오르는 작품이 있어. 김지연 작가의 <공원에서>라는 단편 소설이야. 모두가 편안히 자연을 즐기며 심신을 정비하는 공원이라는 장소에서, 모르는 남성에게 폭행을 당한 여자가 그 소설의 주인공이야. 소설에서는 그 사건 이후 여자에게 공원이 어떤 장소가 되었는지를 섬세히 다뤄, 그 소설을 읽은 후로 나에게도 공원은 마냥 안전하고 푸른 곳이 아니게 되었지. 사실 소설에 묘사된 공원을 보면서 지금 이 공원을 떠올렸었거든, 그래서 아까 공원으로 들어서는데 기분이 조금 묘했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경계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기도 했고 말이야. 그래도 이렇게 앉아서 아이들을 보고 있으니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아.

 

*

 

오늘 출근길 내도록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어. 신당역에서 20대 여성 역무원이 화장실 순찰을 하다가 30대 남자에게 살해당했다는 기사를 보았거든. 그 기사를 읽을 때 내가 탄 열차는 한강을 지나고 있었어. 날씨가 흐려서 강의 물결이 적나라하게 일었는데, 그 결이 날카롭게 벼려있는 것처럼 느껴졌어. 그곳을 멍하니 보는데 그 강물을 그대로 삼킨 기분이 들었어. 속이 갈라지고 눈물이 날 것 같았어.

 

그리고 퇴근길, 새롭게 올라온 기사를 보는데 마음에 불길이 일었어. 가해자는 피해자를 수년간 스토킹하고, 불법 촬영물이 있다며 돈을 요구하고, 살해 협박을 했다고 해. 그 모든 범죄를 저지른 이가 어떻게 피해자에게 접근할 수 있었는지 이해되지 않았어. 가해자는 모든 이유가 자신에게 있음에도, 자신을 신고한 피해자에게 원한을 품고 계획범죄를 저질렀어. 가해자에게 느끼는 분노를 표현할 방법이 없어. 그리고 생을 마감한 여성 분의 명복을 빌 언어가 없어. 그래서 애꿎은 입술만 내내 씹었지.

 

그럼에도 편지에 이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원통하지만, 이와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길 바라기 때문이야.

 

불법촬영과 스토킹이라는 범죄를 저지르고도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자신에게 향해야 할 분노를 타인에게 표출한, 누군가의 목숨을 잃게 한 그 존재의 마음 구조가 전혀 이해되지 않아. 이해하고 싶지 않지만, 그럼에도 무엇이, 어떻게, 왜 그 존재가 그토록 유해한 마음 구조를 가지도록 만든 것인지 사회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나는 그 존재가 그런 마음을 갖게 된 게 ‘그래도 되었기’ 때문이라 생각해. 3년 전에, 한 링크를 건네받은 적이 있어.

 

대구 화장실 몰카 영상들이라면서, 괴롭겠지만 본인 또는 지인 중에 피해자가 있을지 모르니 확인해달라는 내용이었지. 링크를 클릭하니 덩그러니 놓인 변기를 섬네일로 가진 영상들이 있었어. 그곳이 너무 밝고 선명해서 도저히 재생 버튼을 누를 수가 없었다.

 

화장실 불법 촬영물들이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무의식적으로 눈을 가리고 살았었어. 믿기엔 너무 끔찍했으니까. 그래서 그 실체를 마주한 후에 오래도록 힘들었어. 화장실 안 나사로 뚫은 듯 파인 자리에 휴지를 끼워둔 사람들의 마음을 그제야 알게 되었어. 그리고 이제 내가 그런 사람이 되었지. 사실 내가 찍힌 영상 몇 개쯤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어. 그 믿음을 가진 후로는 어딘가 망가진 기분이 들기도, 무언가 나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포기한 기분이 들기도 했어. 지금도 이 사실을 의식할 때면 같은 기분이 반복돼.

 

그 링크를 열었을 때 가장 끔찍했던 건 말이야. 그것이 공유되는 속도였어. 그 영상들은 한 외국 SNS에 게시되어 있었는데 공유 버튼 옆에 숫자들이 기본으로 2,000이 넘었어. 누군가는 불법촬영물들을 판매한다며 다른 링크를 걸어놓기도 했지. 음, 누군가에게는 이게 놀이고, 유희고, 돈벌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많이 울었고, 그보다 더 오래 분노했어.

 

왜 모를까. 어떻게 그런 걸 아무렇지 않게 소비할까? 묻는다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이야기로 답하고 싶어. 무시할 수 없는 숫자의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그걸 보니까. 공유하고, 팔기도 하고, 농담도 하면서 재미있어하니까. 수치심이나 죄책감이 발동될 구석이 없지. 스토킹도 마찬가지야. 스토킹을 사랑의 열정으로 해석한 오랜 역사가 있으니까.

 

이 사건이 단순히 자극적인 기삿거리가 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 또한 가해자를 악마화하며 특수한 사건으로 축소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해. 우리가 간과했던 것들이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가져왔는지 아프게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해. 제대로 된 법적, 사회적 잣대가 세워진 폭력적인 욕망을 거세할 수 있는 생리를 가진 사회를 원해. 미처 없애지 못한 유해한 마음에 피해를 입은 모든 사람의 명복을 빌어.

 

*

 

그래서 결아, 오늘은 네게 이 질문을 건네고 싶어. 네가 생각하는 유해한 마음이 무엇인지 궁금해. 이어져서는 안 될, 거세되어야 할 어떤 마음 말이야.

 

*

 

나는 아직 그 공원 벤치에 앉아 있어.

편지를 쓰는 동안 열이 올랐는지 이마에 땀방울이 조금 맺혔어. 농구장에 있던 아이들은 저녁을 먹으러 갔는지 보이지 않고, 이제 세 살이 조금 더 되어 보이는 아기가 비눗방울 놀이를 하고 있어. 편지를 쓰는 동안에 흰 강아지 두 마리가 잠시 다가온 일이 있었는데, 내게 간식이 없다는 걸 알아차리고 금세 떠났지. 잠깐 마주한 그 무구한 눈동자가 위의 편지를 쓰는 와중에도 나를 살짝 미소 짓게 했어.


이제 그 작은 아기가 지압 훌라후프를 집어 들었어. 그걸 바닥에 질질 끌고 다니며 신난 듯 웃고 있어. 사람들은 같은 방향으로 걸으며 퇴근길을 재촉하고 있고, 올려다본 몇몇 나무에는 벌써 단풍이 어렴풋이 스며들어 있어. 그럼 세상은 아름다운 것만 같은데,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럼에도 눈앞의 아름다움을 부러 부정할 필요는 없겠지.

 

괴롭지만은 않은 날들을 보내길 바라며,

이만 줄일게.



2022.09.18. 민경
추신. 오랜만에 꽃을 샀어, 그 사진을 함께 동봉할게.
답장은 여기로 보내주면 돼,
보내준 답장은 우리 모두 볼 수 있다는 점 기억해줘.
모두들 너의 마음을 궁금해하고 있으니까.
#25-2. 지난주에 받은 답장을 나눌게. 원하는 장례식 풍경에 대해 물었어.
"나는 꼬박 백 여 일을 울었었다."

모 가수의 노래를 듣고있다
‘죽어도 좋을 순간이야’!
내 삶에 죽어도 좋을 순간이 있었나?
그런 순간이 온다면 아무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겠지?

바쁘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과거를 되돌아 본다든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계획하는 것이 쉽지가 않은 것 같아. 오직 현재만 살 뿐일 것 같은데 결국은 끝 날이 오리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또한 아무도 없잖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번 주 네 편지의 질문이 충격적이기만 하다. 한번도 상상해 보지 않았고 생각조차 하기 싫은 풍경이라서 사실 일주일 내도록 몹시 고통스러웠어.

나는 ‘죽음’을 늦게 치루었어. 결혼하고도 한참 지나서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죽음’이란 것이 망자와 우리를 갈라 세운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었지. ‘죽음’을 마주할 준비도 경험도 없이 갑자기 아버지가 우리 곁을 떠나가 버려서 나는 꼬박 백 여 일을 울었었다. 남은 알뜰히 챙기면서 가족에는 소홀하여 나는 끝끝내 아버지하고 대화다운 대화를 한번도 나누어 본 적 없을 만큼 소원하였지만 백 여 일을 끊임없이 울었어. 하늘을 쳐다보아도 눈물이 나고 나뭇가지나 새를 쳐다보아도, 아무런 생각 없이 있을 때에도, 누우면 베갯 닛이 젖도록 꿈에서도 울었었던 것 같아. 가족의 상실은 그렇게 슬프더라.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차고 넘치도록 ‘사랑한다’ 말해 두어야 할까? 아니면 차라리 사랑하지 말아야 할까? 나는 왔다가 간 흔적이 남지 않도록 치우고 정리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은연 중에 나의 부재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닐까? 나의 빈자리를 느낄 만큼의 비중은 하나도 없기를 늘 바래 왔던 것 같아. 하지만 나를 소중히 여겼던 소수의 이들을 위해서 죽어도 좋을 순간을 영원으로 남기고 가고 싶어.

내가 가수라면 무대에서 노래하며 춤추며, 내가 운동선수라면 그라운드에서, 그런데 나는 평범한 주부인데 어떻게 해야 하지?
내 질문이 너를 일주일 동안 괴롭게 했다니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어. 힘든 질문을 건네받았다면 부러 곱씹지 말고 스쳐 보내는 것도 방법일 것 같아. 그럼에도 답장은 잘 읽었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관계들이 어쩔 수 없이 많은 것 같아, 부재를 숨길 수 없는 그런 관계들 말이야. 나는 나의 흔적을(아마 대부분이 글이겠지.) 그들에게 선물처럼 남겨두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해. 너도 네가 원하는 방식으로 부재를 준비할 수 있길 혹은 준비하지 않기를 선택하길 바랄게.

*이 편지를 전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이곳 주소를 통해 전해줘
*혹시 편지를 그만 받아보고 싶다면, 여기를 눌러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