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네!"라고 생각하셨겠지만...
직장인에게는 앞으로 평생 여름방학이 없을 겁니다. 억울하고 원통함에 눈물이 날 것 같지만 꾹 참고 계속 씁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대신이라기엔 뭣 하지만, 어쨌든 여름방학에 대한 즐거운 추억들이 있습니다. 지난 주말 ‘초통령’이라고 불리는 아이돌 걸그룹 아이브의 콘서트에서 어떤 초등학생 팬이 이렇게 외쳤대요. “내 인생에서 보낸 최고의 방학이다~!!!!!!!!!!”
저는 어릴 때 썼던 일기를 다 버려서 정확히 어떤 방학이 제 인생 최고의 방학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 방학이 겨울방학이 아니라 여름방학이었을 거라는 점입니다. 벌써 입추가 지났다지만 아직도 무더운 여름의 한가운데, 오늘은 여름방학 이야기를 해보려고요.
저의 여름방학은 어떤 공간들의 연속입니다. 서울 북쪽을 오래 떠돌다가 가끔 동해로 달려가 점을 찍던 시간들입니다. 모스부호처럼 길고 짧은 점 찍기를 반복하다 보면 곧 개학이었어요. (ㅡㅡㅡ·ㅡㅡㅡㅡ··ㅡ) 개학 전날 잠자리에 누워 눈을 감으면 멀미가 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습니다. 빠트리고 안 한 방학숙제가 있을까봐 불안한 건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다시 정해진 장소로, 짧은 점들을 찍어야 하는 짜증과 조급함에 속이 뒤틀리는 거였을 수도 있겠네요. (ㅡ·····ㅡ·····)
 조금 전형적인 방학의 추억은 이런 것들입니다. 계곡과 바다로 떠나는 물놀이, 튜브에 둥둥 떠서 통째 들고 먹던 짭짤한 천도복숭아의 맛.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같은 장소로 놀러온 여러 가족의 부모들이 힘을 합쳐 돌을 쌓아서 계곡에 작은 댐을 만든 일. 그렇게 생긴 조그만 저수지에서 신나게 첨벙대던 기분. 매년 대관령 산꼭대기 휴게소에서 황태구이를 먹으면서 작년에 먹은 황태구이를 떠올리고, 내년에도 여기에서 황태구이를 먹을 수 있을 테니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일. (평생 한 가지 음식만 먹을 수 있다면 뭘로 하겠냐는 질문에 '천도복숭아'라고 대답해서 여럿 속터지게 했던 사건의 비하인드 스토리이지요…)

이건 아주 찰나에 불과했고, 저의 진짜 여름방학은 엄마 회사 사무실과 외할머니 댁에 있었습니다. 당시 ‘맞벌이 가정’의 초등학생들은 다 어디에 있었을까요. 다들 저처럼 늘 어딘가를 옮겨 다니는 모험을 했을까요? 
엄마가 10년 가까이 다녔던 회사는 방문판매로 유명한 코리아나 화장품이었습니다. 방문판매에 재능이 있었는지 꽤 오래 다니셨죠. 코리아나 화장품 노원지부(?) 사무실은 상계 백병원을 지나 노원 미도파 백화점 쪽 이면도로에 위치한 곳이었는데요. 이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지금 가보래도 찾아갈 수 있을 거 같은 기분입니다. 아침부터 책가방에 필요한 짐을 싸고, 엄마의 빨간 티코에 실려 사무실로 가는 길에는 큰 영화관도 있었고 2층 건물 전체를 쓰는 피자헛도 있었습니다. 그 피자헛에선 백병원 옥상에서 환자복을 입고 담배를 뻑뻑 피우는 나이롱 환자 아저씨들이 보였던 기억이 나네요. 
아무튼 기계식 주차장이 딸린 낡고 작은 그 건물에 코리아나 화장품이 있었습니다. 아마 지원팀을 비롯해 사무직을 위한 사무실은 따로 있었을 테고 우리는 방판 아주머니들의 베이스캠프 같은 곳으로 매일 출근했어요. 벽에는 이 달의 영업왕, 이 달의 판매 실적 그래프가 엄청나게 크게 붙어있고, 화이트보드가 있고, 뻥 뚫린 공간 한 구석 둥근 테이블이 저와 동생의 자리였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앉아서 책도 읽고 숙제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코리아나 월간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어요. 
월간지의 표지는 매번 코리아나 전속 모델이었는데, 그 얼굴이 채시라에서 김민희로 바뀌었던 충격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후 김민희에서 박진희로의 변화는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역시 첫사랑은 잊기 어려운 법인가 봐요. 저는 그 테이블에 앉아 채시라에서 김민희로, 김민희에서 박진희로 코리아나 전속 모델이 바뀌는 세월을 다 봤습니다. (이후로는 김하늘, 오연서 씨가 코리아나 모델이 되었다고 하네요.) 당연하게도 저는 그때 채시라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최장기 모델 기네스북에 오르심(진짜)  
지금 봐도 파격 기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름에도 늘 에어컨이 켜져 있어서 쾌적했던 그 곳에서는 늘 좋은 냄새가 났습니다. 코리아나의 스테디셀러 녹두 폼클렌징과 노란 온천수 가루의 향기, 비타민씨 함유를 강조한 엔시아가 처음 나왔을 때 맡았던 상큼한 향의 충격까지 엊그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예전엔 시트러스 이딴 거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화장품 향기가 달콤 포근하기만 했답니다^^) 또 그 둥근 테이블 유리의 차가움과 동시에 들려오는 몇십 명의 수다와 전화 통화 소리. 가끔 옆에 딸린 피부관리실-이라기보다는 피부관리 실습 교육장-에서 아줌마들하고 서로 얼굴에 모델링팩을 해주는 엄마를 구경하기도 했어요.


코리아나에서 엄마와 같은 ‘지부’였던 이승희 언니, 진선미 언니 얼굴도 아직 또렷합니다. 20년도 더 된 일인데 신기하죠. 기초 화장품 냄새와 함께 사람 얼굴이 떠오르다니요. (프루스트 당신이 맞았어…) 이승희 언니는 긴 머리를 올빽으로 딱 묶어서 포니테일을 늘어트리고 늘 바지 정장 셋업에 하이힐을 신었던 멋쟁이인데요. 눈도 크고 입술도 도톰해서 꼭 김혜수 같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입술 산을 강조해서 립 라이너를 그리는 데 열중하던 모습도 생각나고요. 진선미 언니는 하얗고 자그맣고 순하게 생겼는데 저의 운동회에 놀러와서 달리기를 1등했던 기억이 강렬합니다. 그런데, 그러고보니 그 언니가 저의 운동회에 왜 왔던 걸까요? 엄마 대신 참석했던 걸까요? 사실 우리 엄마가 메릴 스트립이었던 걸까요?

50년 만의 의문과 함께 저는 다시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다음 장소로 이동합니다. 그 옛날의 여름방학은 너무 길어서 매일 사무실로 따라 출근했다가는 엄마와 저 둘 중 하나는 미쳐버렸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골치였겠다 싶어요. 아무튼 각종 방학숙제 보따리와 짐을 잔뜩 짊어지고 옮겨간 곳은 외할머니 집입니다. 시골은 아니고 재개발 한참 전의 창동 어딘가예요.


그때 외할머니는 5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 쯤이셨을 것 같습니다. 참 젊으셨네요. 또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지만 정신을 차려봅니다. 할머니는 주택은행 구내식당에서 일하셨어요. 저와 동생은 할머니의 일터로 함께 출근했습니다. (출근 조기교육 미쳤죠?) 1층에서 일하는 은행 직원들이 2층의 구내식당으로 한바탕 몰려와 점심을 먹고 또 우르르 빠져나가면 그때부터 2층은 우리 세상이었습니다. 길고 큰 식당 테이블에 앉아 방학 숙제하기, 책 읽기, 식재료 다듬는 할머니 구경하기, 할머니 직장동료들이 다른 직원 욕하는 뒷담화 엿듣기 등등.

구내식당에서의 추억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뭐니뭐니해도 식당 청소용 대걸레 자루를 뿌갠 일입니다. 어찌나 당황스러웠는지 "앗!" 소리도 못 내고 그 자리에 굳고 말았는데요. 그때 저는 해리포터에 심취한 초딩이었기 때문에 마대자루를 보고 그냥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동생을 자루에 태우고 저는 손잡이 쪽을 잡은 채 질질 끌면 해리포터가 타는 빗자루 같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솔직히 저건 지금 생각해도 못 참는 게 맞다. 참고로 그때 저의 킥보드 이름은 님부스2001이었습니다. 파이어볼트는 너무 최신식 고급 제품이라 별로 안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성질 대단한 어린이지요.

파이어볼트를 거부했던 초딩은 자라서 6년째 아이폰XS를 씁니다

아무튼 저희가 뿌갠(…) 대걸레 자루는 할머니와 친했던 어떤 계장님이 처리해주었습니다. 덩치 좋은 아저씨였는데 밥 다 끝난 오후 3-4시쯤 슬쩍 구내식당에 올라와서는 “어머니 라면 한 개만 끓여주실 수 있나요?”를 자주 하곤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일하다 출출할 시간에 몰래 먹는 라면의 맛… 대걸레 30개는 사주고도 남았겠습니다.

주방 청소까지 다 마치고 나면 할머니의 퇴근 시간입니다. 할머니 집이 있는 골목에는 멀끔한 주택도 몇 개는 있었지만, 그 길에 제일 많은 건 가내 공장이었습니다. 양말 공장, 고무줄 공장, 고무장갑 공장이라고 부르던 그곳들은 더 정확히 말하면 제품을 포장하는 작업장이었어요. 할머니는 골목에 있는 양말 작업장에서도 일했습니다. 공장에서 나온 양말들은 왜인지 모르게 다 뒤집어져 있는데, 뒤집어진 양말들을 마네킹 발 같이 생긴 플라스틱 거치대에 쑥 끼워서 다시 뒤집어주고 100족씩 포장하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할머니가 거기서 일하는 게 싫었는데, 그 작업장에서는 간식도 못 얻어먹고 자리 깔고 숙제도 못 하고 그냥 가만히 먼지 구경하면서 앉아 있기만 해야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밖에서 보면 그 공장들하고 구분 안 되던 할머니 집은 옛날 방앗간 같은 데 딸린 가겟방을 대충 수리해놓은 꼴이었습니다. 진짜 옛날 샷시 미닫이문에 자물쇠 하나 걸어둔, 양 손을 샷시에 끼우고 온 몸으로 드르륵 끼익 밀고 들어가면 바로 시멘트 바닥이 나오는 곳. 현관 겸 시멘트 복도를 지나야 부엌이 나오는 곳, 거길 지나야 생활 공간이 나오는 곳이 할머니 집이었어요. 생활 공간과 분리된 시멘트 바닥 쪽 한 켠에 수세식 화장실이 있었지만? 함정은 물을 내리는 장치가 없어서 옆에 있는 바가지로 물을 퍼서 부어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참 열악한데, 그땐 또 그런 생각을 못했네요. 왜냐면 그 시간은 여름방학 모험 중 한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선풍기 하나가 다인 집안은 덥고 답답해서, 외할머니와 우리는 자주 집 밖 골목길로 나갔습니다. 골목길이라도 차 두 대는 넉넉히 다닐 폭이었는데요. 그 한 켠에 돗자리를 깔고 냅다 엎드려 또 방학숙제를 했어요. 지금 제가 아는 한자는 다 그때 길바닥에 배 깔고 외운 것들입니다.

할머니가 일을 안 하는 날에는 횡단보도 큰길 건너 뒷산에 놀러가기도 했습니다. 거기서 아카시아 꽃 따먹는 법도 배우고, 풀피리 부는 법도 배우고, 돗자리 펴고 또 숙제를 했네요… 이 정도면 숙제에 미친 아이인 것 같습니다. 여름방학 이야기 중이었지만 여기서는 살짝 겨울방학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겨울엔 할머니가 어디선가 비료포대 같은 걸 구해와서, 눈 쌓인 뒷산 언덕에서 질릴 때까지 썰매를 탔거든요.

그리고 할머니의 창동 집에는 왠지 케이블 방송이 나왔습니다. 집에서는 맨날 공중파만 보다가 방학 때만 볼 수 있는 케이블 방송이 어찌나 재밌었는지 모릅니다. 엠넷에서는 ‘신비’라는 가수의 <Darling> 뮤직비디오를 너무 많이 틀어줘서 게임 애니메이션을 다 외울 지경이었어요. (그래도 계속 봄) 제가 진짜 좋아한 건 당연히 투니버스였는데요. 밤마다 심슨을 보느라 졸음을 참고 참고 또 참곤 했습니다. 또 할머니랑 같이 보는 전원일기, 전설의 고향, 용의 눈물은 왜 이렇게 재밌었을까요?


이렇게 한참을 쓰고 보니 직장인에게는 여름방학이 없는 게 맞는 거 같습니다. 이제 제 몸뚱이는 휴식을 원하지만 정신은 더 이상 어리지 못해서, 지금의 저라면 여기저기 옮겨다녀야 했던 저 여름방학을 천덕꾸러기 취급 받는다며 슬퍼할 게 분명하니까요. 지금 방학 같은 걸 줘봤자 술 실컷 먹고 숙취에나 시달리고 갑자기 넷플릭스 정주행 한다고 밤낮 바뀌는 게 다겠죠. 아무래도 여름방학은 영원히 행복했던 기억으로, 느리게 흐르던 시간과 그리 덥지 않았던 따가운 햇빛 정도로 남겨두는 게 좋을 듯합니다. 우리한테는 연차와 주말과 스스로를 돌보고 먹일 능력이 (이젠) 있잖아요.

    
이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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