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비전 [풀칠 129호]

안녕하세요, 이번 주 풀칠 마감 당번 야망백수입니다. 한 주간 잘 지내셨나요?

오늘의 풀칠 주제는 ‘비전’입니다. 최근에 저는 ‘비전’이라는 말을 곱씹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지난주에 팀장이 됐거든요. 회사의 비전에 조금 더 참여해야 할 것 같고, 내가 맡은 팀의 비전도 그려야 할 것 같은 와중에, 제 삶의 비전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란 생각을 하는 나날입니다.

오늘 보내드리는 글은 오랜만에 대학 친구들을 만난 날 집에 돌아가 쓴 일기입니다. 일기를 쓰면서 한 때 비전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과거와 함께 지나가버렸음을 깨달았을 때에도, 그 풍경을 나눌 친구가 있다면 괜찮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오늘도 메일 열어주셔서,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대학 친구들과 한강을 보러갔다. 오랜만에 모이니 언제 이렇게 시간이 많이 흘렀나 싶었다. 시간이 많이 흐른만큼 각자 다른 속도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게 느껴져 생경했다. 누구는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고, 또 누구는공무원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며 퇴사를 꿈꾸고 있었다. 학교 다닐 때 제일 공부하기 싫어했던 친구는 대학원에 진학했는가하면 엠티에서 알콜 쓰레기에 지옥의 요리사로 악명을 떨쳤던 친구는 술집을 차렸다. 배우가 되겠다며 자퇴한 친구는 설거지로 연명하고 있었고 다른 꿈 없이 세계일주가 꿈이었던 나는 그냥 그런 회사에서 그냥 그런 일을 하고 있다. 한 때 같은 교실에서 같은 내용을 배웠다는게 믿겨지지 않을만큼 다른 길을 걷고 있는게 이상했고 이렇게나 다른 길을 걷고 있는데 한데 모여 같은 노을을 보고 있다는 게 또 이상했다.

먹고사는 근황을 나누고 나선 연애 근황을 나눌 차례였다. 우리는 다들 연애 앞에 진심이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들이었다. 여기엔 이별을 이유로 기말고사를 거부한 사람도 있었고 변심한 애인과 얼굴 보고 끝내겠단 이유 하나만으로 브라질로 여행을 간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들 달라져있었다. 연애를 대수롭지 않은 걸로 여기는 걸로 조금이나마 어른이 된 티를 내기로 다들 작정이라도 한 듯이 연애담을 말하는 얼굴은 조금씩 구겨져있었다. 그냥 만나지. 만날 사람이 없다. 동물도 배고프면 짝짓기를 안하는 법이라더라. 누구는 다음 연애가 왠지 마지막일 것 같아서 시작하고 싶지 않다고 하고 긴 연애를 얼마전에 끝낸 친구는 연애는 꼭 부의 연금술 같다고 했다. 반짝이던 사랑은 반드시 바래지는데, 바래진 감정을 다시 사랑으로 바꾸는 건 어떻게 해도 안되더라며. 가장 불순물이 많은 금속인 납을 가장 순수한 금으로 바꾸겠다는 미친 아이디어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었냐며. 전 애인을 좇는답시고 학점을 조지고 태평양을 건너기도 해봤지만 결국엔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지 않았냐며, 연금술에 성공한 사람은 한명도 없으므로 우리는 이제는 정신을 차리고 그냥 밥벌이에 집중해야한다고, 연금술보다 건실한 행복을 찾아내야만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해가 지는 동안 잠수교를 걸어서 건너며 우리 모두가 동의한 결론은 결국엔 연애는 어렵다였다. 20대 초반처럼 누군가와 진행 중인 연애가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연애라는 그 일을 어떻게 다뤄야할지 전혀 모르게된 것 같다는 느낌의 그런 어려움이었다.

잠수교를 걸어서 건너고 나니 다리가 아파 택시를 타기로 했다. 건대입구까지 택시를 타고 갔다가, 6명이 앉을 자리가 있는 술집이 건대입구엔 없어서 화양동으로 갔다. 화양동의 한 국밥집에서 국밥을 말아먹는데 친구 하나가 이런 말을 한다. 여기가 화양동인데, 너희 화양연화가 무슨 뜻인지 아냐고. 인생에서 한번있는 그런 꽃같은 시기를 화양연화라고 한댄다. 가장 빛나는 시기를 함께 보낸 친구들과 오랜만에 다시 모여, 서로 다른 길에서 헤메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연애는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대학가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이름이 화양동인 낡은 동네에서 국밥을 먹고 있으려니까 마치 서로가 서로의 화양연화가 지났다는 걸 보증하는 증인이 된 것 같았다. 우리는 모두 화양연화를 지나왔다. 인생에서 한 번 있는 그런 꽃 같은 시기를. 그러나 나는 다시 한번 겪고 싶다. 그럼 이전의 화양연화는 더 이상 화양연화가 아니게 되겠지만, 그것을 감수하고서라도 한번만 더 느껴보고 싶다. 나는 어제 화양동에서 국밥을 같이 먹었던 친구들 모두가 각자 자기 나름의 언어로 '한번만 더'를 외치며 국물을 삼켰으리라고 확신한다.

파주 : 얼마 전까지도 저는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솔직히 저에게 영광의 시대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당시엔 행복을 느끼는 빈도도, 강도도 최저점을 찍을 때였거든요. 친구의 말마따나 나이가 들면서 행복의 역치만 높아졌기 때문이었을까요. 그때의 저는 과거에 차올랐던 기쁨과 행복감을 추억하며 그것을 다시금 느껴보고 싶다는 욕망으로 가득했습니다. 봄비를 맞으며 내일을 생각 않고 즐겼던 락 페스티벌, 난생 처음 경험하는 오마카세의 충격… 뭐 그런 것들이요.

하지만 요즘 들어 그때의 순간들이 화양연화가 아니라 추억미화라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돌이켜보니 과거의 순간보다 지금이 압도적으로 행복하거든요. 늘 0으로 수렴해 가던 통장 잔고도, 타인의 눈치를 지나치게 살피던 성격도, 늘 불안으로 점철됐던 하루도 이제 그립지 않습니다. 많지는 않지만 조금씩 돈을 모아가는 재미도 쏠쏠하게 느끼고, 아끼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정성을 쏟는 내향적인 성격도 썩 나쁘지만은 않은 거 같고요. 결정적으로 이제 더이상 하루하루가 불안하지 않습니다. 다년 간 겪은 좌충우돌로 인해 어쩌다 사건사고가 벌어진다고 해도 수습하면 그뿐, 이라고 믿게 되었거든요. 아, 어쩌면 지금이 저의 화양연화일 지도 모른단 생각이 드네요. 풀칠러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죠? 저는 지금입니다!

아매오 : “지금보다 더 어렸을 적, 그러니까 고등학생 또는 대학생이던 무렵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얼마 전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꽤 당황했던 것 같습니다. 딱히 할 말이 없는데… 그냥 살던 대로 살라고 할 것 같은데요? 뭐 그렇게 둘러댔죠. 지금 다시 대답해도 괜찮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고등학생 때는 뭘 잘 몰라서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했습니다. 그런데 수능을 망쳐도 삶은 그럭저럭 이어지더군요. 그래서 더는 그렇게 살지 않기로 했습니다. 덕분에 대학생 때는 현재에 충실했습니다. 하지만 그것 또한 뭘 잘 모른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다가올 현실이라는 점에서 미래를 등한시 해서는 안 됐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과거를 잘 보고 미래를 가늠하며 현재를 이어나갑니다. 하지만 고등학생 때의 제가 있고 대학생 때의 제가 있기에 지금의 제가 있는 게 이 세계의 진실입니다. 솔직히 말해 저는 최선을 다하지 않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습니다. 지금 보니 아니었던 것 뿐이죠. 그러니 그냥 살던 대로 살라고, 지금 생각하는 대로 생각하고 믿는 대로 믿으라고 말할 것 같습니다. 어찌 됐든 결국 너는 내가 될 테니까.”

무라카미 하루키 또한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라는 책에서 이런 문장을 적었습니다.

“하지만 그 작품을 써낸 시점에는 틀림없이 그보다 더 잘 쓰는 건 나로서는 못 했을 것이다, 라고 기본적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그 시점에 전력을 다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쏟아붓고 싶은 만큼 긴 시간을 쏟아부었고, 내가 가진 에너지를 아낌없이 투자해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말하자면 ‘총력전’을 온 힘을 다해 치른 것입니다. 그러한 ‘모조리 쏟아부었다’는 실감이 지금도 내게 남아 있습니다.”

매순간 최선을 다한다면 나의 화양연화는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일 겁니다. 그렇다면 제 인생 전체가 화양연화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남들이 보기엔 어떨지 모르지만 적어도 저 자신은 행복할 테니까요. 만약 제 행복을 바라는 누군가 있다면, 아마 그 사람도 행복하게 해주겠죠. 그렇다면 정말로, 확실히, 그것이야말로 화양연화일 것입니다.

마감도비 : 2021년 여름쯤이었을 겁니다. 일이 너무 바쁜 나머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내 인생은 이렇게 다 가겠구나. 일만 하다가 낭비해버렸구나. 이미 목은 굽어버렸는데 곧 허리도 굽겠구나. 불행한 사람은 현 상태가 지속될 걸로 굳게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으니 유난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도 업무가 너무 많고 심리적 부담 때문에 힘들어했으니까요.

그때와 비교해 지금이라고 일이 줄어든 건 아닙니다. 회사에서 사람을 충원해준 것도 아니죠. 오히려 연차가 쌓였으니 더 고품질의 업무 결과를 요구하기도 합니다. 화가 날 지경이죠. 우울증 대신 홧병을 얻었습니다. 그렇다고 화양연화가 이미 지나 시들어버린 꽃처럼 모가지를 젖힌 채로 울고 있기만 한 건 아닙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어떻게든 하루는 즐겁기도 하고 유쾌하기도 하고 감정으로 충만하기도 하더라구요. 생존 본능일까요, 일을 안 할 수도, 줄일 수도 없다면 시간을 잘게 나눠 기쁜 일 한줌, 웃을 일 한줌 비상식량처럼 챙겨야 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물론 미봉책일 뿐 언젠가는 회사와 담판을 짓거나 떠나야겠지요.

그래도 내 인생이 끝나버렸다는 생각에서는 벗어나게 됐습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꽃은 아직 피어 있더라구요. 너무 진부한 말이지만 인생이 꽃이라면 자세히 보아야 할 필요도 있을 거 같습니다. 내가 지각할 수 있는 경험과 감정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는 걸 느끼게 되니까요. 정확하진 않습니다만, 영화 <키즈 리턴>에 나오는 대사처럼 사실은 이제 시작인 걸지도 모릅니다.

*넷 다 대전에 연고가 있습니다. 요것은 조롱이라기보단 자조입니다. 한화이글스 화이팅!

▲ 이불킥

4년차 풀칠러, Business Developer

마감도비 : 어떤 일을 하고 있나?

풀칠러 : 크리에이티브 분야 교육플랫폼에서 일한다. 교육프로그램을 기획하고, 회사의 전략을 책임지고 있다.

마감도비 : 어쩌다 그 일을 하게 됐나?

풀칠러 : 주인의식을 갖고 일하는 편이다. 남의 회사에서 주인의식을 갖고 일하는 게 좀 이상한 것 같아서 지금은 직접 만든 회사를 위해 일하고 있다.

마감도비 : 언제까지 그 일을 할 것 같나?

풀칠러 : 요즘 경제 상황을 체감하고 있다. 스타트업 혹한기라는 말이 딱 맞다. 매달 남은 수명을 체크 하고 있다. 그래도 회사의 흥망성쇠중에 ‘흥’은 맛보고, 가능하다면 ‘성’까지도 함께 하고싶다.

마감도비 : 본인의 비전을 공유하기 위한 노하우가 있나?

풀칠러 : 비전 공유에 젬병이다. 배울 수 있다면 배우고 싶다.

마감도비 : 이번 호 주제는 '비전'이다. 최근 본 비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내용이 있나.

풀칠러 :기억에 남는 비전이라... 요즘 비트코인이 반등하던데. 일론 머스크의 미래를 바라보는 시각이 생각난다. (대충 잘 없다는 뜻…)

풀칠러A

덧붙이는 풀칠에 있는 ‘커리어 키메라’라는 표현이 기억에 오래 남네요. 오랜만에 적확하게 절 표현한 말을 만났어요. 저 또한 기괴한 커리어 누더기 생명체인데요. 스타트업에서는 뜻밖에 커리어 키메라가 전천후로 활약할 수 있다는 기쁨과, 지금 나의 작고 소중한 스타트업이 크면 키메라는 용도를 잃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동시에 있는 저의 풀칠... 매일…

파주

‘키메라’를 검색해 보니 ‘하나의 생물체 안에 유전 형질이 다른 세포가 함께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고 하네요. 사진을 보니 더 가관입니다. 얼굴에는 사자의 대가리가 궁둥이 쪽에는 뱀의 머리가, 어깻죽지엔느 염소의 얼굴이 솟아있더라고요. 저는 그저 경력이 엉킬대로 엉킨 스스로를 자조하려고 했던 것뿐인데, 키메라라는 존재가 막상 보니 겁나 강해보이더라고요.

참, 말이 길어졌네요. 전문성에 대한 고민이 들 때면 저는 이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냉정한 프로의 세계에서도 식스맨이나 멀티 플레이어라는 존재가 있지 않느냐고. 그리고 오히려 강팀일수록 어떤 자리에서도 준수한 수준으로 해낼 수 있는 능력이 각광받지 않나요. 오늘도 그런 말로 스스로를 세뇌하며 이너피스를 하곤 합니다. 이것은 갈비인가 통닭인가… 나는 마케터인가 에디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