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착한 말만 해야 한다는 부담감

📧 비밀작전! 웹에서 편하게 읽어요~

👋🏻 저도 경제문외한이라 평소에 이해가 잘 안 되던 것들을 델타 월딩이 대신 질문해주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ESG가 제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큰 파워를 갖고 있구나, 그런데 개념 정립이나 가치관의 충돌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채로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한편으로 ESG에 대해서는 왠지 착하게만 말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에 반감이 들었던 터라 선데이 시소를 들으면서 왠지 속시원한 기분도 들었습니다.ㅎㅎ
사실 ESG 많이 들어는 봤어도 깊이 알아볼 정도로 흥미롭게 생각하던 주제는 아니어서.. 어제 선데이시소는 땡땡이칠까 생각도 했었는데요.
오전에 보내주신 비밀작전을 읽고 마음이 바뀌어서 듣게 되었는데 그러길 잘한 것 같아요. 두시간 반이 훌쩍 지나갔습니다!ㅎㅎ

😎 안녕하세요, 비밀요원님! 오랜만에 🧠별샛별이 인사드려요.

지난 일요일엔 박민경 신영자산운용 주식운용역과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정책들>이라는 주제로 선데이 시소를 진행했는데요. 피드백을 읽으며 “착한 말만 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저 역시 많이 공감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를 나눠보려 합니다.

많은 비밀요원님들이 이미 잘 알고 계시겠지만 저는 만30의 여름날, 생사를 오가는 큰 사고를 경험했습니다. 눈 떠보니 중환자실, 눈 떠보니 며칠의 시간이 흘러 있었다는… ㅎ

지금은 웃으며 말하지만 그땐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죠. 병원에선 본디 가장 심각한 상황을 염두에 둔다지만, 평생 침대에 누워 지낼 수도 있다고 강조합니다.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온 몸에 나 있는 구멍은 물론 없는 구멍까지 만들어 곳곳에 호스가 꽂혀 있었습니다. 척추에서부터 고관절까지 철심을 박는 대수술을 이틀에 걸쳐 진행했고 다리엔 30cm는 족히 넘을 고정핀이 열 몇 개나 관통하고 있더군요.

이런 느낌?

스위스의 초현실주의 화가이자 영화 <에이리언>과 <프로메테우스> 디자인을 담당했던 H.R.Giger의 작품인데요.

“doleo ergo sum” 고통받는다 고로 존재한다

상당히 기괴하고 공포스럽습니다. 이런 느낌이라면, 아일랜드계 영국 화가인 프랜시스 베이컨도 빼 놓을 수 없는데요.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작품이 폭력적인 게 아니다. 본디 삶이, 폭력적일 뿐이다.”

그만큼 절망적이었습니다.

내 나이 겨우 30에 평생 침대 밖을 나갈 수 없다니… 부모님은 죽지 않고 살아난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우셨지만 글쎄요. 음식을 먹는 것은 물론 생리 활동도 스스로 하지 못하는 나를 과연 인간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인지, 도대체 사람의 무엇이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답게’ 만드는 것인지 회의감이 끝도 없이 이어집니다.

지은 죄도 없이 벌 받는 기분입니다.

발끝에서 시작된 통증이 척추를 타고 대뇌를 강타할 때면 진통제 한 대면 이내 잠잠해질 고통임을 앎에도 그 짧은 시간은 그저 지옥, 초등학교 1학년 때 내 책상을 넘어온 짝꿍의 손등을 때린 일로 이제사 죄값을 치르는 것이라 신께 몸을 납짝 엎드려 회개기도를 드려야만 잠시나마 마음이 평온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지옥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었냐구요? 음… 못 벗어났습니다. 다행히 두 달 뒤부터 재활을 시작할 수 있었고 8개월의 병원생활 끝에 퇴원, 그러고도 2년 여를 더 목발을 짚고 다니며 요양을 한 후 다시 사회로 복귀한 뒤에도 전혀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갑작스레 발발하는 통증에 응급실에 실려가길 몇 번이었습니다. 나로 인함도 아니며, 내가 콘트롤조차 할 수 없는 그 무엇 때문에 시한폭탄을 껴안고 사는 느낌, 짐작이 가시나요? 그럼에도 원망조차 할 수 없습니다. 당장의 고통을 견디고 이겨내는 게 더 중요하니까요.

그때 알게 됐습니다. 전쟁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왜 사회에 적응을 잘 못하는지. 많은 이들이 저를 용기있고 대단하며 멋진 사람이라 말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집에서 요리는커녕 음식도 먹지 못했으니까요. 20개월을 일부러 찜질방에서 거주키도 했죠.

다만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레 옅어집니다. 사고가 난지 8년 쯤 지났을 때였나? 어느날 갑자기 따뜻한 차 한 잔 마시고 싶어지더군요. 그때 처음으로 집에서 물을 끓이며 아! 여기가 지구구나-

이토록 저는 나약하고 보잘 것 없는 보통 사람입니다.

↑ 최민식 사진작가 <1985년, 부산>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늘 나빴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부대끼는 삶에서만 체득할 수 있는 원초적 힘이랄까요. 병원에서 마주한 무수의 환우들이라든지, 20개월을 머물렀던 찜질방에서 조우했던 또 많은 사람들 덕분에 밑도 끝도 없이 잘 살고 싶다는 열망이 샘솟습니다.

사실 병원에서의 몰골은 제가 가장 처참했지만, 상태는 제가 가장 나았습니다.

제 또래의 군인이 있었어요. 세 아이의 아버지였고, 배우자가 저와 동갑이라 금세 친해졌죠. 그는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경추 신경이 끊어졌고, 목 아래로 온 몸이 마비되어 숨 쉬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아니, 경추 환자는 목 근육도 마비되기에 숨 쉬기조차 버거운 경우가 많습니다. 신경이 끊어지면 수술로도 회복이 안 됩니다. 그리고 그는 수술도 하지 못한 채 전동 휠체어에 익숙해지는 재활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한 공간에 있지만 우리의 미래는 너무나도 다릅니다. 아프다고 징징대는 것도 그곳에선 호사였죠. 그가 말하더군요. 수술이라도 받은 제가 부럽다고. 제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입니다.

자신은 여타 경추 환자들과 달리 숨도 잘 쉬고 발성도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잘 나와 다행이라고, 그래서 재활의 희망을 찾는다고. 목도 혼자 가눌 수 없는 그가 그럼에도 걸어는 다닐 수 있는 제게 숨이라도 잘 쉴 수 있어 다행이라며,

희망을 읊조립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주말이었습니다. 차례로 11살, 6살, 3살 난 그의 아이들이 병원에 면회를 왔습니다. 첫째는 병원 휴게실에 마련된 풍금을 연주하고 있었고, 둘째와 할머니는 막내의 인형옷을 입히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자신만 할 일이 없어진 막내는 그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병실로 달려 나가며 이렇게 소리칩니다.

“아빠, 안아 주세요”

↑ Duane Michals <The Bogeyman>(1973)

병원에선 제 또래의 부모들을 대상으로 주기적으로 집단상담을 진행했는데요. 겨우 20대 초반이었습니다. 중증뇌졸증 환자 어머니의 이 말에 모든 부모가 부둥켜 안고 울었답니다.

“제 소원은 저보다 제 아이가 먼저 죽는 거에요”

야전병원에서 홀로 살아 돌아온 느낌입니다.

↑ 유현경 <나는 잘 모르겠어요 - 어른세계>(2010)

저는 제 손으로 돈을 벌기 시작한 후로 월급의 5~8% 가량을 기부하는 걸 원칙으로 삼아 왔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지 얼마 안 됐을 땐 친구들과 모교에 소소한 장학기금을 만들어 현재도 유지하고 있죠. 그래서 사회로 복귀한 뒤엔 나만의 후원 목록에 장애 관련 단체 하나를 추가했으며, 이러한 기부의 인연들로 노무현재단과 인터뷰를 갖기도 했는데요.

그러나 기부에만 그쳐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몇 년 간 사회와 단절된 채 살았지만 여전히 심장이 뜨거운 30대입니다. 정의롭고 가치있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온 몸 바쳐 헌신하고 싶습니다.

말도 잘 하고 글도 잘 쓴다는 강점을 살려 좀 더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일을 찾자! 그래서 장애강사 교육 코스에 등록했습니다.

실은 저도 지체장애 4급으로 분류됩니다. 더이상은 목발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지만 블루아워 등을 통해 오프에서 만난 비밀요원님들은 잘 아실 겁니다. 제가 다리를 살짝 접니다. 왼쪽발이 산산조각난 후 다시 접합했기에 병원에선 그 발로 걸어다니는 게 기적이라 말할 정도죠. 제가 이토록 열심히 산들강을 걸어 다니는 이유도 언제 다시 못 걷게 될 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입니다.

↑ 헤몽 페네 <늦어서 미안해요. 당신의 꿈속으로 달려오던 중 은하수에서 그만 길이 막혔어요.>(1985)

장애강사 교육을 받으며 정말 행복했습니다. 드디어 나도 보람찬 일을 할 수 있으리라는 자부심도 생기고, 병원에서 늘 함께 했던 친구들을 다시 만난 듯한 반가움도 있었습니다.

한국의 장애 관련 정책 변천사를 비롯해, 현재 무엇이 왜 쟁점인지도 구체적으로 알게 됩니다. 제일 좋았던 건 이 복잡한 얘기들을 쉽게 풀어내는 방법론을 고민하며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시연강의도 무사히 끝내고 다음 날이면 수료증을 받습니다. 무급자원봉사일 지라도 어디든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 우리를 가르쳤던 교수님에게서 전화가 옵니다.

미안하지만, 제게는 장애강사 수료증을 줄 수 없다구요.

저는 한참을 아무 말을 할 수 없었고, 그는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어 그래서 더 미안하다 말합니다.(그는 진심으로 제게 미안해 했습니다.)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잘 압니다. 어느 정도 짐작도 했습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하필이면 추운 겨울이었고, 까닭없이 서러워지더군요. 화도 나지만, 누구에게 화를 내야 하는 걸까요? 그리고 화를 낸들 뭐가 달라질까요? 내가 나약하고 보잘 것 없는 보통 사람이듯이 그들 역시 보통의 사람일 뿐인 것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