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tter from London A Letter from London Letter#8 2020.6.12 2주 만에 보내는 편지입니다. 진작에 쓰기 시작했지만, 바깥세상의 변화에 저의 생각도 흔들리고 그때마다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다 보니 오늘 다시 백지를 엽니다. 2주 전 미국 미네소타의 폭력 경찰에 의해 조지 플로이드가 목숨을 잃었고 흑인 인권운동에 불이 붙었습니다. Black Lives Matter 운동이 시작된 것은 2013년이지만 이번 운동의 격렬함과 단단함은 실망하기 두려워 희망하지 않는 저도 희망을 품게 합니다. 주말엔 대형 집회 그리고 평일에는 크고 작은 집회가 미국, 영국, 아프리카, 유럽 전역으로 퍼지고 있습니다. 폭력 경찰로 시작된 운동은 경찰의 폭력적 진압으로 더욱 활활 타오릅니다. 나는 나의 위치에서 무엇을 할 수 있나. 생각해봅니다. 이 편지는 소소하고 가벼운 이야기를 쓰는 곳이었으나 자잘한 일상에 관해 쓰기에는 온 정신이 세상 밖으로 향해 있습니다. 이 시기에 편지를 쉬려고 했지만, 편지의 목적이 런던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고 제가 보고 듣는 것은 침묵할 수 없는 일이기에 편지로 기록을 남깁니다. 한국에서 미국의 폭력적인 시위를 우려의 목소리로 전달하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영국의 시위는 미국처럼 과잉진압을 할 정도로 격해지지 않지만 지난주 브리스톨의 시위대는 노예를 부리던 인물의 동상을 강에 내던졌습니다. 미국에서 가게를 부수고 영국 전역에서 노예 상인 동상을 파괴하는 행동은 비난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흑인 인권운동가들은 소상공인의 가게를 부수는 행위를 올바르지 않다고 말하지만, 흑인이 그동안 받은 폭력의 크기를 헤아려 본다면 지금은 그 행위를 비난할 시기가 아니라 원인에 집중하고 그것을 뿌리 뽑는 것이 먼저입니다. 인종차별로에서 자유롭지 못한 아시아인인 저도 흑인들이 겪어온 아픈 역사와 사회적으로 뿌리 깊게 자리 잡은 편견의 무게를 감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수백 년간 배에 짐짝처럼 실려 노예로 팔려 갔고 대가 없이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 이유 없이 학대와 죽임을 당했으며 심지어 그것이 불법화된 이후에도 구조적 인종차별을 통해 억압을 받았습니다. 흑인들이 겪는 구조적 인종차별은 개인이 개인을 차별하는 것을 넘어 사회의 구조 자체가 흑인을 차별하도록 설계되어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경찰이 언제든 자신에게 총을 쏠 수 있다는 두려움에 떨며 살아가야 하는 사회가 한국에서는 이해하기 힘들 수 있지만 사실입니다. 미국의 형사법 문제를 한국어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은 넷플릭스에서 Ava DuVernay 13th를 시청하는 것입니다. 며칠 전 오바마는 Medium을 통해 공개한 글에서 지금의 에너지를 시위에서뿐만 아니라 투표 같은 실질적으로 법을 바꾸고 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을 뽑는 행위에 동참하라고 말합니다. 결국, 법과 제도 그리고 이것을 만들고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바뀌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문화계에서는 문화 기관들, 특히 백인 위주의 스텝으로 구성되어있고 인종차별 문제가 보였던 곳이 젊은 아티스트와 예술 노동자들에 의해 변화를 요구받고 있습니다. 영향력 있는 인플루언서들은 문화 기관들이 어떤 성명문과 조직적 개편안을 내놓는지 엑셀 파일에 업데이트하고 이메일로 항의합니다. 흑인 또는 유색인종을 고용하고 진급시킬 구체적 계획과 인종차별을 위한 직원 교육을 강화하며 흑인 문화와 작가를 위한 기회를 얼마나 마련하겠다는 실질적인 계획을 황급히 마련하는 것을 보면서 통쾌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합니다. 할 수 있는 것을 안 했던 것일 뿐이었군요. 제가 일하고 있는 곳은 다양성이 존중되는 기관이지만 이 리스트를 피해갈 수 없고 매일 매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합니다. 저는 이 기관이 다양성과 사회 문제를 위해 해온 일을 알고 있고 자랑스럽지만, 우리가 더 할 수 있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면 비난을 받고 해결해보고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돈도 없고 고작 다섯 명이 일하는 이 작은 기관에서 덩치 큰 미술관이 내놓는 야심 찬 계획 같은 것을 흉내도 낼 수 없으니 우리는 그동안 사회의 중요한 가치를 지키려 해오던 일을 멈추지 않고 계속합니다. Black Lives Matter은 다른 인종의 인권을 배제하는 운동이 아니라 흑인의 인권을 찾는 운동입니다. 그러므로 BLM 운동은 이미 흑인을 포함한 모든 인종이 존엄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All Lives Matter는 흑인 인권운동에 반발하는 백인 우월주의자에 의해 사용되는 맞불 집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흑인 인권운동을 지지하는 것은 흑인을 포함한 모든 유색인종이 평등하게 대우받기를 위해 운동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흑인 인권 운동을 지지하는 것은 흑인의 억압을 방관해온 아시아인이 그것을 인정하고 반성하며 되풀이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흑인 인권 운동을 지지하는 것은 흑인과 관련된 운동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역으로 차별하고 비인간적으로 부려먹는 이주노동자를 대하는 인식과 제도를 바꾸려는 운동으로 뻗어 나가는 것이고 아직도 갈 길이 먼 여성 평등 운동도 확장하는 일입니다. 흑인 인권운동을 지지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단 한 번이라도 다른 인종을 비하하고 편견의 시선으로 본 적은 없는지 솔직하게 반성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인종차별에 대해 예민하고 심도 있는 교육을 받기는 힘듭니다. 다른 인종과 부딪히며 옳고 그른 것을 몸으로 배울 기회가 거의 없고 부조리를 알아채기에는 소수인의 목소리가 너무 작습니다. 우리는 중국인을 폄하하고 인도네시아, 필리핀인을 노예처럼 부려먹으며 흑인을 무시하고 백인을 떠받들다가도 뒤에서는 욕을 하는 것이 나쁜 행동이라고 배우지 않습니다. 인종차별에 무감각한 한국에서 종종 듣게 되는 인종차별적 발언은 비수가 되어 등에 꽂힙니다. 그들이 좋은 사람인 것을 아는 나는 말문이 막혀버립니다. 저도 인종차별을 당하면서 혹은 목격하면서 방관자였던 적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입을 열지 못해 울화가 터질 때마다 작은 변화의 힘을 상기하고 조금씩 용기를 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종차별에 대항하려면 목이 막히고 눈물부터 차오르는 것은 체화된 백인 우월주의와 아시아인의 애매한 위치 그리고 흑인 문화에 아직도 무지한 것이 부끄럽고 혼란스럽기 때문입니다. 어리지만 의사를 날카롭게 발언하고 세상의 부조리를 논리정연하게 꼬집는 사상가와 운동가들을 보면 저의 어눌한 말투와 예쁘게 포장하려 애쓴 흔적이 가득한 글이 부끄럽습니다. 편지에도 소개한 적이 있는 요하나 헤드바의 글에서 그는 질병과 혁명의 언어는 단순함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고 했습니다. 질병과 혁명이라는 다급한 상황에서 언어는 의사전달이라는 목적을 가진 간결하고 효율적인 도구입니다. 오늘의 편지는 투박하게 내뱉은 말이라 이런 글을 보내는 것이 민망하지만 침묵하는 사람이 되지 않고 흑인 인권운동에 한 발짝이라도 더 보탬이 되어 보고자 쓰고 보냅니다. Black Lives Matter와 관련해서 공유하고 싶은 예술이 정말 많지만, 한글 자막 혹은 번역이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특히 제가 추천하고 싶은 여러 흑인 여성의 문학과 시가 번역본이 없다는 점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흑인 서사를 말하거나 흑인 배우가 주연인 영과는 상을 받아도 망하는 곳이 한국이라고 들었습니다. 그와중에 박스오피스 1위가 성범죄자인 우디 앨런의 신작인 것은 자세히 들여다보고 문제점을 파악해야 할 중요한 사회적 현상입니다. 흑인 인권운동과 관련된 영상이나 글은 앞으로 편지에 꾸준히 소개하겠습니다. 오늘은 글이 길어 니나 시몬의 라이브 영상을 공유합니다.
스트리밍으로 기부하기 이 영상을 스트리밍하며 발생하는 광고 수익이 모두 BLM의 후원금으로 쓰여집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