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함을 위한 이모지 2개

옛 단골 술집 ‘녹두호프’ 이야기. 대학교 2학년 때부터 다녔고, 졸업하고 그 동네를 떠나기 전까지 뻔질나게 드나든 술집이니 대략 7-8년 동안 단골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후로도 종종 찾았지만 아무래도 술집은 가까운 게 최고. 이사를 간 후로는 그 시절(?) 친구들과 그 시절(?) 추억을 되새기기 위해 만날 때, 아니면 이모 닭도리탕이 먹고 싶어서 미칠 것 같을 때만 갔던 것 같다.

녹두호프, 그러니까 녹홉에 얽힌 추억은 정말 많다. 우선 내가 본 생일파티 중 가장 성대했던 녹홉 이모 환갑잔치가 있다. 지상 1층으로 올라오는 나무 계단에서 뒤로 자빠져서 죽을 뻔했던 적도 있다. (물론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래서 살아 있는 것일 수도…) 수많은 웃음과 눈물, 만남과 고백과 이별과 또 눈물, 치정과 복수, … 첫 취업을 축하한 것도, 그로부터 3년 뒤 연봉 3천 돌파를 축하한 것도 녹홉에서였다. 살면서 처음으로 홍어를 먹은 것도, 홍어뿐만 아니라 수많은 남도 음식을 처음 먹은 곳도 녹홉이다. 어머니 날 낳으시고 녹홉 이모 날 기르셨네… 이 이야기를 다 하면 진짜 책 한 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오늘은 가장 최근 들렀던 녹홉 이야기부터 시작해보려고 한다.


얼마 전 친구가 단톡방에 기사 링크를 하나 공유했다. 사무실에서 눈물이 차오를까 봐 참느라 얼굴이 빨개졌다. 철거 및 원상 복구 비용 800만 원이 없어서 폐업을 못하고 있다는 게 진짜인가? 힘들어서 삶의 만족도가 30점이라고 하면서? 작년에만 허리 골절 2회? 모든 문장이 어질어질하다. 친구들하고 냅다 녹홉 갈 날짜를 정하고, 가서 폐업 상담 하고 오자고 결의를 다졌다.

떨리는 마음으로 입장한 녹홉은… 짜잔~ 제법 붐볐습니다~(^^) 놀랄 노. 나와 친구들이 졸업한 후로는 녹홉에 갈 때마다 다른 손님이 거의 없었다. 어쩌다 다른 일행이 손님으로 와도 다 아는 사람들인 그런 양상이었는데, 이번에는 정말 생전 처음 보는 얼굴들이 꽤 있었다. 다들 기사를 보고 충격 받아서 달려온 옛날 ‘애기들’이었다. 우리는 이모가 이 잠깐의 장사 잘됨에 취해 장사 안 접는다고 하면 어쩌나 조마조마하며 취재에 나섰다.

결론은 내년 6월 계약 만료까지 잘 버텨보고, 그 때 접고 싶으면 우리한테 말해라! 800만 원 모아줄게! 로 났다. 정말 다행이다. 녹홉을 드나들었거나 그랬으리라 추정되는 유명인들의 이름을 나열하며 이 녀석들한테 100만 원씩 후원 받고, 친구들한테 5만 원 10만 원씩 받고, 그래도 부족하면 녹두호프로 책 써서 펀딩하자, 까지 생각했던 나로서는 매우 행복한 마무리였다.

진짜 책을 써야 할 때를 대비해서 추억의 페이스북과 블로그, 티스토리를 오가며 자료를 모아봤다. 웬 애기들이 이모 환갑잔치 해준다고 설치고 있는데 자세히 보니까 나랑 친구들이었다.

이 날 고시촌 바닥에서 술 냄새가 진동했다고 함. (기억 안 남)  
2015년, '녹홉이모 환갑잔치 준비위원회 위원장' 시절

이 때는 애기였지만 지금은 다들 찌들었는데 아직도 우리한테 애기라고 해주는 사람은 각자의 할머니랑 이모밖에 없다. 이번에 다시 모인 애기들은 간도 늙어서 술은 7병밖에 못 먹었지만, 많이 팔아주자는 일념으로 배가 찢어지게 먹었는데도 9만원이 나왔다. 거기에 이모 용돈을 보태 15만 원을 계산하고 나왔는데 어디 가서 이 돈으로 이렇게 가오를 부릴까 생각하니 또 웃겼다.


이모는 참 착하고 순하고 바보 같은 사람이다. 장사를 그렇게 오래 한 사람치고 정말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할까. 보통 교사나 교수들 중에 이런 캐릭터가 많다. 한평생을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학생들만 만나면서 살다보니 묘하게 현실 감각을 잃은 사람들. 이모가 그런 사람이다. 평생을 학생 손님 - 이모 말로는 ‘애기들’ - 만 상대하다가 영원히 학생처럼 순진한 채로 남은 사람.

어쩌다 '학사 주점'을 그리워하는 교수를 데리고 녹홉에 가면 우리는 이모, 이 분 교수님이니까 바가지 씌워요! 했다. 이모는 거지 학생 손님을 제외한 모두에게 낯을 가려서 한번도 유들대며 바가지 씌우는 데 성공한 적이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눈물나게 답답한 일이다. 이렇게 이모가 먹여 기른 애기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비정한 사회인이 된 지 오래지만 이모는 그 애기들이 내놓는 용돈의 액수로 “돈 많이 버는 훌륭한 사람 되었”는지 “요즘도 회사가 많이 힘”든지 가늠할 뿐이다.

그럼에도 나와 친구들은 이모를 ‘자본주의가 (잘못) 낳은 (따뜻한) 괴물’이라고 부르곤 했다. 이모의 애정의 척도는 오로지 이 놈이 녹홉에 얼마나 자주 와서 얼마나 많은 돈을 쓰는지로만 측정되었기 때문이다. 주 4회 이상 출석에 올 때마다 멀쩡한 안주를 한 개 이상 시킨다? 그 녀석은 이모의 사랑을 듬뿍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술 버릇이 고약하고 재수가 없는 놈이라도… 이모의 이런 따뜻한 자낳괴 면모가 빛났던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연애를 시작할 때마다 상대방을 녹홉으로 데려가 이모에게 선보이고 허락(?)을 받고는 했다. 그중 가장 떨렸던 맞선은 수많은 남자친구를 지나 처음으로 여자친구를 녹홉에 데려갔을 때였다. 그 전에 친구들한테 “야 이모 퀴어 프렌들리임?” 같은 쓰잘데기 없는 질문을 던졌지만 누구도 답은 몰랐다. 대망의 그날, 이모가 나를 꼭~ 껴안더니, “아이고~ 우리 미내가 동성 연애자가 되었냐~?” 하면서 활짝 웃었다. 여자친구가 미리 준비한 20만 원의 용돈 봉투 덕분이었다. 우리는 그날 필요 이상의 축복과 칭찬과 대접을 받았다. 그날 녹홉은 서울 시내 그 어느 곳보다 퀴어 프렌들리한 술집이 었다. 그리고 나와 친구들은 깨달았다. 이모는 돈 앞에서 누구보다 열린 사람이구나! 이제는 “이모 퀴어 프렌들리임?”이라는 질문에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다. “돈 많이 쓰면…”


그렇다고 이모가 정말 돈에 미친 사람은 아니다. 이모는 본인의 (친)딸이 요즘 학생들 문신하는 거 좋아 보이지 않더라고 던진 한 마디에, 우리 애기들이 얼마나 이쁘고 착한지 아냐며 뚝딱 손목을 휘감는 덩굴식물 문신을 새겨버린 사람이다. 그때 이모의 나이 아마도 63세… 아무리 허리가 아프고 온몸이 쑤셔도 “정 때문에”, “애기들이 이뻐서” 장사를 그만두지 못한다고 하는 사람이 녹홉 이모 김례숙 씨다.

4인 가족이 치킨 한 마리를 다 못 먹고, 반찬 그릇에 밥을 담아 먹는 집안에서 자란 나에게 ‘남도 손맛’과 인심을 알려준 사람도 이모다. 신림동 고시촌이 사람으로 바글대고, 늘 학생 손님이 붐비고, 신입생 환영회 같은 게 있었던 때는 손님과 함께 녹홉의 식자재도 끊이지 않고 들락댔다. 매생이떡국, 홍어 삼합, 진도 홍주, 전 찌개, 또 지금은 기억 나지 않는 온갖 음식을 다 녹홉에서 처음 먹었다.

돈 없던 학생 시절 안주 하나를 시켜서 물을 부어 다시 끓이고, 거기에 밥도 볶고, 냄비 바닥이 뚫어져라 박박 긁어서 먹었다… 는 이야기는 녹홉에서 통하지 않는다. 아무리 배가 너무 부르다고 해도 빈 속에 술 마시면 속 버린다고 안주를 무한 리필해주는 이모가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녹홉에 열심히 다닐 때 인생 최고 몸무게를 찍었다. 일주일에 3~4일을, 저녁부터 새벽까지 한 자리에 눌러 앉아 먹는 데만 썼으니 살이 안 찔 수 없었겠지. 요즘은 그렇게 먹을 시간도 소화력도 없다.

우리랑 술 조지게 먹던 시절의 이모. 귀여움. 

그때 이모는 지금보다 훨씬 건강해서, 우리랑 같이 불법 실내흡연도 하고(^^;) 맥주랑 청하도 엄청나게 마셨다. 이모는 맨날 그때가 참 재미있었다고 하는데 나도 그때가 참 재미있었다. 아무 약속이 없는 날에도 녹홉에 가면 꼭 와서 놀고 있는 친구들이 있었다. 아예 이모랑 둘이 술 먹으면서 아는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친구도 있었다. 어떤 날은 그렇게 합석에 합석에 합석… 을 거쳐 거의 스무 명짜리 술자리가 된 적도 있다. 나는 그날 웃다가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오늘을 아주 오래오래 기억할 거라고.

요즘 녹홉에서는 민중가요가 나오지 않고, 요즘 녹홉에는 에어컨과 비건 메뉴도 있고, 요즘 이모는 예전처럼 우리랑 같이 술을 먹지 못하지만, 녹홉 닭도리탕은 그때랑 똑같이 맛있고 녹홉 강아지 솔이는 여전히 귀엽다. 우리가, 그리고 이모가 5년만 젊었어도 절대 가게 닫지 말라고 앞으로 맨날 와서 술 사먹겠다고 난리를 피웠겠지만 이제 우리는 이모가 문 닫고 싶으면 닫는 거니까 800만 원 필요하면 말하라고 이야기하는 어른이 되었다. 물론 정 돈 없으면 매일 다같이 녹홉으로 퇴근해서 셀프 철거 하자는 이야기도 했다… 아무튼 이런 일로 슬프거나 쓸쓸해지지 않는 걸 보니 이모의 ‘애기들’이 이제 진짜 어른이 되었나보다. 새로운 단골 술집은 계속 생기겠지만 녹홉 같은 곳은 앞으로도 영원히 녹홉밖에 없을 거다. 녹홉과 이모의 한 시절을 함께 했다는 게 뿌듯하고 영광이다. 남은 시간을 힘껏 즐겨야겠다.


[추천합니다😎]
  • 사범대 노래패 길 & 법대 노래패 동맥, <이 길의 전부> 링크

자료를 찾다가 발견한 (있는 줄도 몰랐던) 영상입니다. 화질이 안 좋아서 누가 누군지도 모르겠으니 공유해도 괜찮겠죠. 이모 환갑잔치의 수많은 코너 중 두 번째 하이라이트 정도일 듯합니다. 첫 번째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해도 위 사진에 담긴 선물(현금) 전달식이었으니까요... <이 길의 전부> 그때나 지금이나 저의 최애 민중가요(ㅋㅋ)인데 라이브로 들으니 더 좋네요. 꼭 끝까지 들어보시길! 

이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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