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대답하는 상대가 있긴 있었구나! 이런 느낌입니다.
JUL 24, 2026
번쩍 유레카를 외칠 만큼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거나, 인생을 바꿀 것처럼 강렬한 장면을 마주한다고 해도 계속해서 곱씹지 않으면 서서히 스러지기 마련입니다. 하나의 계기로 사람이 바뀌기는 영화 속 이야기만큼이나 드물고, 당연하게도 순간의 충격은 시간에 무뎌집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오스트리아에서 돌아온 다음, 서서히 마음이 가라앉고 있음을 애써 부정하고 있었습니다. 연달아 이어진 큰 일정들 사이에 마음을 챙기지 못한 탓이었어요. 그렇지만 겉으로 부정하고 있었을 뿐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행동을 숨길 수는 없었습니다. 그나마 잠깐 지나는 터널임을 인지하고 있어서 다행이었죠. 그래도 하루를 잘 보냈다는 기분보다 오늘도 내일도 같은 시간 안에 갇힌 제자리걸음 같다고 느끼기는 역시나 쉽지 않더라고요.

그러다 6월 16일에 퍼뜩 눈이 떠졌습니다. 이 마음가짐으로는 기껏 결심한 홀로서기 도전이 죽도 밥도 되기 전에 사그라들 것 같았어요. 눈치채지 못하게 아주 작게 타협하기 시작한 나를 발견하고 스스로에게 조용히 실망하던 참이었고요. ‘이제 정말 바꿀 때가 됐다’ 이 문장이 머릿속에 전광판처럼 펼쳐지던 새벽, 잠을 이루지 못하고 책상에 앉았습니다. 그날, 아침이 올 때까지 어지럽던 생각들을 종이에 옮겨 적으며 마음을 다시 끌어올리고 나니 6시간이 지나 있었습니다. 외부에서 온 전환이 아니라서 오히려 간절했는데요, 이것마저 먹히지 않으면 그야말로 안 되는 게 아닐까 겁이 났거든요.
그렇다고 대단하게 뭘 딱히 바꾼 건 아닙니다. 하루의 시간 관리와 회고법을 손보고, 중요해 보이는 것들 때문에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미루는 현상과 싸우기로 한 정도에요.

그날 이후 6장의 주간 일정표를 넘기면서, 그리고 이렇게 님에게 편지를 쓰면서 다시 되돌아봅니다. 6주 전에 비해 마음이 느슨해졌나? 어쩌면요. 느슨하게 저한테 스며들었다고 할까요. 새벽 세 시 반에 죽죽 글을 적어 나가던 6월 16일의 감정을 그대로 간직할 수는 없으니까요. 불씨가 꺼지지 않게 아주 짧게라도 그때의 글을 돌이켜 보는 정도면 충분한 것 같아요. 

그리고 그사이 새로운 일들이 줄줄이 생기고 있습니다. 열심히 문을 두드리고 있는데, 아직 문이 열린 건 아니지만 인터폰에 얼굴이 비친 정도랄까요. 오, 대답하는 상대가 있긴 있었구나! 이런 느낌입니다. 문이 활짝 열리지는 않았지만, 작은 신호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시 움직일 힘이 생겼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날은 남은 리코타 소스를 처리하기 위해 파스타를 만들었습니다. 메뉴 큐레이션 업무를 하면서 샘플링을 하다가 리코타 치즈 소스가 너무 많이 남았거든요. 처음이라 양을 가늠하지 못하고 모자라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또 너무 많이 만들어버린 거 있죠. 바로 차갑게 서브해야 맛있는 소스로 만든 건데, 또 집에는 마땅히 찍어 먹을 게 없어서 그냥 파스타에 넣어보기로 했습니다. 파스타는 뭐든 맛있잖아요.

마늘과 파를 약불에 볶아 향을 내고, 리코타 치즈 소스를 죽 짜서 파스타를 볶았습니다. 꾸덕한 질감으로 만든 거라 파스타와도 쫀쫀하게 엮일 줄 알았더니 웬걸, 열에 그대로 녹아버려서 묽은 크림소스가 되어버린 거 있죠. 어쩐지 느끼할 것 같아서 레몬 제스트를 올려봤는데 따뜻한 리코타 소스와 잘 어우러졌어요. 크림처럼 묵직한 맛은 없지만 그래도 파스타 면발에 착 감기더라구요.

생각해 보면 이번 파스타도 그랬습니다. 실패라고 하기엔 맛있었고, 성공이라고 하기엔 예상과는 달랐습니다. 그저 남은 것을 다른 방식으로 이어 붙인 한 끼였을 뿐인데 의외로 만족스러웠어요. 요즘의 하루도 딱 그 정도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거창하게 달라지는 것보다, 남은 마음을 그날그날 다른 방식으로 이어 붙이는 일. 어쩌면 결국 불씨를 지키는 일도 거창한 사건보다는 이런 사소한 반복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남은 소스로 파스타를 만들고, 짧게라도 예전의 글을 다시 읽고, 내일 해야 할 일을 적어두는 일.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달라지기보다 이런 것들 사이에서 조금씩 방향을 틀어 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리코타 소스 파스타
 재료 [1인분 기준]

(필수)
파스타 1인분
리코타 100g
그릭요거트 20g
다진마늘 1작은스푼
레몬
올리브오일
소금
후추
만드는 법

1. 파스타 면은 패키지에 적힌 시간만큼 삶아줍니다.
2. 리코타와 그릭요거트, 레몬 제스트와 소금을 잘 섞어서 리코타 소스를 만듭니다.
3. 팬에 올리브오일을 두르고 약불에 슬라이스한 마늘과 파를 볶아서 향을 냅니다.
4. 면수와 리코타 소스, 파스타를 한번에 넣고 면에 소스가 코팅되도록 잘 볶아줍니다.
5. 다시 레몬 제스트를 올리고 후추를 뿌리면 완성!
님, 오늘의 파스타는 어떠셨나요?
너무 길었나요? 레시피가 부실했나요?
듣고 싶은 내용이 있나요?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다음 레터에 반영해 답장할게요.
제가 궁금하다면 아래에서 더 확인할 수 있어요!
R.DAM
artist.rda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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