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시.사 레터 89회 (2022.0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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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번역가 정수윤입니다. 번역은 매일 자기 자신을 배신하는 일입니다. 나의 진심이나 진짜 하고 싶은 말 같은 건 꽁꽁 숨기고 마치 내 자아가 원저자인 양 행세하며 세상에 글을 토해내는 일이니까요. 즐겁습니다. 싫은 건 아니에요. 다만 이런 변태적인 성향의 직업, 내가 아닌 남이 되어 살아가는 일이 날 미치게 만드는 건 아닐까? 진짜 나를 영원히 찾을 수 없는 미로 속에 가둬버리고, 나는 평생토록 타인의 가면을 쓴 채 더듬더듬 흑과 백의 그물 속을 헤매며 살아야 하는 건 아닐까? 덜컥 두려워져 집어든 시집이 있습니다. 완전히 자기 자신을 써내려간, 시인의 펄떡펄떡 살아 숨쉬는 심장이 내 손에 잡힐 듯한 날것의 시들. 너무 멋있잖아?! 아니 맛있다고 해야 하나. 진짜 살아 있는 언어를 보았다고 느껴서, 눈물이 날 것 같고, 속이 후련해지고, 그리하여 내가 나를 잊어버리는 건 아닐까 두려워질 때 품에 끌어안고 웃거나 울거나 자야지 생각한 시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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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윤 번역가가 사랑하는 첫번째 시💘
바가지 머리 (박세랑, 『뚱한 펭귄처럼 걸어가다 장대비 맞았어』)
누가 내 머리 좀 먹음직스럽게 깎아주세요 재봉을 잘못한 인형이거든요 표정이 굳은 식빵이라서 아무한테도 안 팔리거든요 집집마다 걸쳐놓은 애인들은 우주로 이사갔나봐 필요할 땐 주파수가 안 잡히거든요 밀린 공과금에 목구멍이 꽉 막힌 하수도에 눈앞이 빙글빙글 돌거든요 배고파서 만두 소세지 유부남을 한꺼번에 우물거리며 시식 코너를 한 바퀴 빙 돌고 나면 배짱이 두둑해져요 콩팥에 붙은 혹덩이처럼 덜렁덜렁 달고 다니기 불편한 남자들 골라먹는 재미가 있어요 두부처럼 하얗고 깍듯한 애인 건져먹을 건덕지도 없어서 맹탕인 애인 누가 싫증나서 내다버린 의자 위에 올라타 찌그덕삐그덕 밤새도록 놀다가 추락했는데 또 밑바닥이네? 바닥을 벗어나면 더 캄캄한 밑바닥이 기다리는데요 발냄새 나서 걷어찼더니 입냄새 나는 두꺼비가 종일 들러붙는데요 빨랫줄에서 떨어진 불알을 달고 허겁지겁 쫓아오는 남자들 살려고 열심히 쫓아가다보면 개처럼 쫓겨날 일도 생겨날 텐데 뻐끔뻐끔 이산화탄소나 내뿜으면서 공기를 탁하게 만들고 있어요 콘크리트처럼 겹겹이 쌓아올린 하늘을 구경하다 돋보기로 지붕들을 태워먹어요 쭈글쭈글 헐렁한 입술보다 츄파춥스가 훨씬 달콤할 텐데 머리가 뻗친 잡초들은 여기저기 짓밟혀도 잘만 클 텐데 찢긴 낙하산을 타고 싹둑싹둑 날아다니다
씨익 웃고,
버르장머리 없이 살아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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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제 헤어스타일은 언제나 바가지 머리였습니다. 할머니는 문자 그대로 바가지를 제 머리에 덮어씌우고 바가지 끝으로 비어져나온 머리칼을 잘라주셨습니다. 너덧 살 무렵엔 진짜 박을 잘라 만든 생 바가지였고, 초등학교 들어가서는 안쪽으로 빨래판 같은 줄무늬가 들어간 주황색 플라스틱 바가지였어요. 그러고 보니 요즘은 둘 다 잘 눈에 띄지 않네요. 그땐 참 흔했는데. 지금 흔한 것들도 우리가 더 늙어지면 사라지겠죠. 아무튼 이 시를 읽는데, 저는 제 어린 시절이 떠올랐어요. 특히 이 부분, 씨익 웃고, 버르장머리 없이 살아야지. 왜냐면 저는 대단히 버르장머리가 있는 아이였기에. 그보다는 사람들 눈에 띄고 싶지 않고, 어른이 정한 규격을 벗어나고 싶지 않고, 그걸 벗어나 마주하게 될 크고 검은 가위가 너무 무섭고. 겁쟁이. “긴 머리를 하고 다니면 위험하단다.” 엄마는 왜 제게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저는 왜 남자 어른이 무섭다고 생각했을까요? 아무튼 요즘 저는 비틀어지고 싶고, 캄캄한 밑바닥이 두렵지 않고, 남들이 꺼려하는 것을 우적우적 씹고, 씨익 웃으며, 버르장머리 없이 살고 싶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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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간 우.시.사. 소식🤍
"2023년에도, 시도 때도 없이 우리는 詩를 사랑해."
지난주 목요일에 박준 시인의 동네 라이브가 있었습니다. 재미있게 시청하셨나요? 해당 라이브는 26일 목요일에 문학동네 인스타그램에 업로드 될 예정입니다:) 더불어 앞으로 진행될 라이브 일정도 공유드려요!
2/2(목) 고명재 X 박연준
2/9(목) 양안다 X 박연준
2/16(목) 주하림 X 조대한
2/23(목) 안미옥 X 조대한
2월 2일부터, 매주 목요일 오후 7시 30분!
시인들의 인스타그램 라이브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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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윤 번역가가 사랑하는 두번째 시💘
누가 너를 이토록 잘라놓았니 (박세랑, 『뚱한 펭귄처럼 걸어가다 장대비 맞았어』)
응급실에서 눈을 뜬 아침, 절망이 동공을 힘껏 긋고 지나가는데 등이 구부정한 아버지가 곧 사라질 것처럼 희미한 표정으로 내 곁에 앉아 있다 얘야 무엇이 왜 이토록…… 너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니 병실 침대맡에서 아버지의 눈빛이 흐릿하게 묻고 있다 아버지 달이 자꾸만 커지는 게 무서워서요 새벽녘에 커다란 보름달이 목을 졸라댔거든요 자세히 보니 달은 창백하게 얼어붙은 내 과거의 눈동자였어요 그걸 쳐다보고 있자니 동공이 깨질 듯이 쓰라려서요 싸늘하게 겪은 일과 시퍼렇게 당한 일 사이에 걸터앉아서 손목을 사각사각 깎아냈을 뿐인걸요 연필 가루처럼 떨어지던 피가 어느새 통통한 벌레로 변하더니 바닥을 기어다니던데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기어이 발설하기 위해서 뾰족하게 깎아지른 손목으로 나는 또박또박 상처를 기록합니다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존재들만 골라가며 사랑했어요 나를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을 불쌍해서 좀 안아줬더니 결국엔 뺨을 치고 주먹을 날리던걸요 만삭처럼 부풀어오르는 비명 속에서 폭력은 예고 없이 태어나 칭얼대고요 어르고 달래던 결핍은 무럭무럭 자라나 손목을 토막 내는 취미가 생겨버렸죠 꿈틀꿈틀 한 손으로 이렇게 아버지 곁을 기어다니면 되잖아요 창가에 서린 입김처럼 하얗게 내려앉은 아버지는 닦으면 닦을수록 흐릿하게 지워지는데 방안에서 너덜대는 손목을 기어이 발견해 병원에 실어나를 때마다 아버지의 눈빛이 자꾸 묻는다 무엇이 왜 이토록…… 너를 사랑하지 않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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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오래전 친했던 사람의 부고를 들었습니다. 스무 살 언저리 무렵에 같은 친구, 같은 술안주, 같은 노래를 공유하며 걱정 없이 깔깔 함께 웃었던 아름다웠던 그 사람. 그사이에 서로 멀어져 간간이 소식만 전해 듣던 그 사람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는 슬픈 소식. 무엇이 그 사람을 그토록 잘라놓았을까요. 무엇이 왜 그토록…… 그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들었을까요. 그리고 결심의 순간에는 또 얼마나 무서웠을까, 외로웠을까.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없지만, 혹시라도 마지막 순간 직전에 우연히 길에서 마주쳐서, 옛 생각에 반갑게 손을 흔들며, 그리고 술 한잔 정도를 기울이며, 알코올이 한 모금만 들어가도 얼굴이 발그레하게 달아오르던 그 사람의 이야기를 밤새 들어줄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그 사람은 찢어지지 않고 살 수 있었을까. 슬픔은 토해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데. 고통은 발설을 통하여 또 다른 힘을 얻는데. 혹은 스스로 ‘뾰족하게 깎아지른 손목’으로, ‘또박또박 상처를 기록’했더라면……, 그 사람은 그 사람을 다시 사랑할 수 있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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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 시믈리에는 영상제작사 화인컷 권밀 피디입니다. 영화, 드라마 기획 PD와 시나리오 작가로 일하고 있는 권밀 피디가 고른 두 편의 시는 무엇일까요? 다음주 수요일을 기대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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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시사>의 시믈리에가 되어주실 분 🙋♀️💛
<우시사> 독자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시가 있다면 아래 링크의 양식을 작성해 제출해주세요. 차곡차곡 쌓아두었다가 하나씩 꺼내어 <우시사> 독자분들께 대신 소개해드릴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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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 <우시사>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의견💌
💬 힐링됩니다. 문장 하나하나 아름다워요.
💬 어제 '어른다움'에 대한 책을 읽었습니다. 덕분에 오늘 우사시가 제 맞춤 내용인듯 놀라고 반갑게 여전히 부끄러워하며 읽었습니다. 소개해주신 시집도 시인도 감사하고 장강명 작가도 더 좋아졌습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의견 주신 모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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