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로 묶을 수 없는, '시인 아닌 시인' 앤 카슨 시, 에세이, 소설 넘나들며 장르 구속되지 않아 한 줄씩 읽다보면 있는 줄 몰랐던 상처도 아물게
(중략) 사실 카슨의 모든 글들은 시적인 에세이, 혹은 에세이적인 시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해 카슨은 전통적 의미에서의 시라는 장르에 구속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훌륭한 작가들이 다 그렇듯, 카슨은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장르인 것이다. 앤 카슨의 장르는 그냥 ‘앤 카슨’이다.
이런 사실을 더욱 명확히 인지하게 된 것은, 최근 몇 년간 카슨의 책을 여러 권 번역하고 나서다. 이를테면 ‘유리, 아이러니 그리고 신’이라는 책에는 흔히 카슨의 최고작이자 ‘시그니처 포엠’으로 불리는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데, 제목이 무려 ‘유리 에세이’다. ‘시그니처 포엠’인데 ‘에세이’라고? 그렇다. 그리고 원서 기준으로 무려 45페이지에 이르는 이 방대한 ‘구조물’은, 그 어떤 장르적 규정도 보란 듯이 비껴 나간다. 이를테면 실연당한 화자가 황야에서 혼자 사는 어머니를 찾아가는 것에서 시작하더니, 거기에 서서히 에밀리 브론테의 생애 및 작품에 관한 온갖 이야기들, 언니였던 샬럿 브론테와의 복잡한 관계까지 작품의 일부로 끼어드는 식이다.
(중략) “당신은 나를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들어요”라는 유명한 영화 대사를 흉내 내서 말하면, 카슨의 작품은 우리를 더 섬세한 사람, 더 지적인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든다. 갑자기 고대 그리스어를 공부하고 싶게 만들고, 헤겔을 읽고 싶게 만든다. 그것은 분명 노벨문학상이라는 이름의 무게에 걸맞은 희귀하고 소중한 재능이다.
노벨문학상 수상 덕분에 이러한 재능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마냥 기쁘고 설레는 마음이다. 카슨의 이번 수상은, 어쩌면 역대 노벨‘문학’상 가운데 가장 적절한 선택인지도 모르겠다. 카슨의 작품은 장르에 얽매일 필요 없이 그냥 ‘문학’이라고 불러도 좋을, 아니 꼭 그래야만 할, 정말 흔치 않은 경우 중 하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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