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책  

야생 종려나무  윌리엄 포크너, 민음사

영미소설/고전소설

비통함과 무(無)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비통함을 선택하겠어.


- 야생 종려나무 中
book

<야생 종려나무>는 서로 무관해 보이는 두 이야기, ‘야생 종려나무’와 ‘노인’을 교차해 보여주는 독특한 소설이에요. 언뜻 무관해 보이는 두 이야기는 자유와 욕망, 그리고 책임이라는 질문 앞에서 맞물려요.


‘야생 종려나무’ 에서는 젊은 의사 윌본이 샬럿과 사랑에 빠져 기존의 삶을 버리고 도피하지만, 가난과 현실의 벽에 부딪혀요. 한편 ‘노인’ 에서는 한 죄수가 대홍수 속에서 임산부를 구조하다 표류하며 탈옥 기회를 얻지만, 어떻게든 다시 자신을 옥죄는 감옥으로 돌아가려 하죠. 


'야생 종려나무’ 속 윌본은 모범적으로 살아왔지만, 정작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고민하고 선택해본 경험은 부족해요. 그러다 샬럿을 만나 처음으로 강렬한 욕망을 발견하고, 그 욕망을 삶의 일부가 아닌 전부로 만들어버리죠. 어쩌면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는 법, 욕망에 충실하되 선택에 책임지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을지도요. 

  

반면 ‘노인’ 이야기 속 죄수는 윌본과 정반대예요. 윌본은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책임을 회피하는 면모가 있지만, 죄수는 자유를 욕망하지 않으면서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을 다하죠. 자유를 감당하기보다 익숙한 감옥으로 강박적으로 돌아가려고 한다는 점에서, 죄수는 윌본보다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에요. 한 사람에게는 책임이 부족하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욕망이 부족한 셈이죠. 어쩌면 성숙한 삶이란 자신의 욕망을 알면서도 그 선택이 가져오는 현실을 책임지는 것이 아닐까 싶었어요. 


그러나 결국 기억은 늙어서 헉헉거리는 육체의 내부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기억은 논란의 여지 없이 분명하고도 조용하게 그의 손이 닿는 거리에 서 있었다. 종려나무의 잎이 서로 부딪히면서 희미하게 버석거리는 야생의 웅얼거림을 내고 기억에 종언을 고하지만, 윌본은 그것을 마주할 용기가 있었다.


- 야생 종려나무 中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마지막에 윌본이 내리는 선택이었어요. 샬럿을 잃고 모든 것이 무너진 뒤, 그는 ‘비통’과 ‘무(無)’ 사이에서 비통을 선택해요. 그녀를 잊고 고통에서 벗어나기보다, 고통스럽더라도 사랑했던 기억을 간직하기로 한 거죠. 아무것도 사랑하거나 욕망하지 않으면 상처받을 일도 없겠지만, 고통을 피하려다 삶의 의미까지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었어요.


결국 이 소설은 삶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삶의 의미까지 지우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것 같아요. 성숙한다는 것은 욕망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욕망하면서도 책임지는 것, 상처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상처받을 가능성을 알고도 사랑하는 것일 테니까요. 비통과 무 사이에서 비통을 선택한다는 것은 고통까지 포함된 삶을 선택한다는 뜻일 거예요. 상처가 두려워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실패가 두려워 선택을 미루지 않는 사람. 무엇보다 자신이 선택한 삶을 끝까지 책임지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지네요.👀


-에디터 민트 🌱
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민음사
소설/고전

이제 나한테 하찮고 의미없다는 것은 그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더 강력하고 더 의미심장하게 보여요.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 무의미의 축제 中

book
조금은 가볍게, 그렇지만 심오하게 '인생의 무의미'에를 생각해보고 싶다면 밀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를 추천해요. 

이 소설은 7개의 챕터로 나누어져 각각이 한 편의 짧은 희곡같이 읽히는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요. 주요 인물은 라몽, 알랭, 샤를, 칼리방으로, 소설 전체는 네 친구의 생각, 대화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죠. 

그래서 이 소설이 어떤 이야기냐, 라고 물으신다면 한마디로 정리할 방법은 마땅히 찾기 어려운 것 같아요. 그야말로 그 네 명이 우연히 보고 겪은 일화를 엮어냈을 뿐 에피소드 간 뾰족한 인과도 상관도 없어 보이거든요. 

아래에서 소설 안에서 읽은 일화 몇 개를 보여드릴게요. 절대 이야기의 의미를 찾으려 하지 말고 그냥 읽어 보세요. 
📎 알랭은 길거리에서 짧은 상의를 입은 여성의 배꼽을 보고, 자신이 여성의 배꼽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부터 태초에 배꼽을 통해 이어져 있었던 어머니와의 관계, 존재의 이유까지 사색하게 돼요. 
📎 다르델로는 건강검진에서 암을 의심하다 암이 아니라는 진단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우연히 만난 지인에게 자신이 암에 걸려 생일파티를 성대하게 하겠다는 이야기를 해요. 
📎 칼리방은 배우이지만 맡은 배역이 없어 파티에서 서빙을 하며, 괜히 엉터리 파키스탄어로 말하며 파키스탄인인 척을 해요. 그러다 포르투갈인을 만나 통하지 않는 언어로 이야기하는 중 서로 교감하고 있다는 묘한 느낌을 받죠. 

북플러님, 아무리 읽어도 유독 잘 이해되지 않는 작품이 있나요? 사실 저는 이 책이 그랬어요. 분명 문장 하나 하나, 에피소드 하나 하나 뭔가 심오한 느낌인데, 그래서 이게 무슨 이야기지? 라고 반추하면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웠거든요. (사실 초독할 때 끝이 허무했어요...)

그런데 재독하며 작가는 이 다양한 단막극들을 통해 인생에서 하나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행위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들은 끝없이 고뇌하며 존재의 이유, 인생의 진리를 알아내는 데 시간을 쏟지만 사실 인생의 본질은 정해진 의미가 없는 순간들의 연속이란 것이죠. 틈만 나면 정답 없는 생각을 하는 제게 '뭘 그리 고민해~' 라고 어깨를 털어주는 듯한 느낌이었달까요.

그래서인지 초독하며 허무감을 느꼈다면 재독할 땐 약간의 자유를 느꼈어요. 책 제목 그대로 '무의미 축제'인 이야기 속에서 제 나름대로 이야기를 즐기고 해석하면 그만이란 생각이 들었거든요. 제가 지금껏 한 권의 책에서 하나의 메시지, 하나의 의미를 정리해 북플러님에게 전해왔다면 오늘만큼은 그냥 이 책을 조금은 두서 없이 꺼내보았어요. 연말 앞두고 생각이 많아지는 시기라면, 이 책으로 인생의 무게를 살짝 덜어내 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 에디터 영원 🌳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김영민, 사회평론
에세이
일로부터 벗어나야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을 즐길 수 있어야 구원이 있다... 단지 팔기 위해 허겁지겁하는 노동이 아니라 실생활에 필요한 좋은 물건을 만들기 위한 공들인 노력 그리하여 일상의 디테일이 깃든 작은 예술과 그 아름다움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할 거라는 말이다. 


-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中

book
친구 한 명은 체력이나 감정 소모가 덜 해서 지속 가능한 일에 종사하고 있지만, 권태에 괴로워해요. 저는 굉장한 업무 강도에 시달리지만 연봉상승률이 높고요. 서로 고통의 핑퐁을 하다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삶이란 (적어도 일에 관해선) 잔잔히 오래 가는 치통과 중증 외상, 둘 중 하나의 고통을 무조건 골라야 하는 치킨게임인 것인가...

그러다 이 책을 만났는데요, 괴로워하면서도 퇴근하면 유튜브와 침대라는 유혹에 휘둘리고 마는 제게 사유를 떠먹여 주는 느낌이었어요. 게다가 텍스트는 김영민 교수님만의 풍자적 유머로 차 있어요. 팔딱이는 구어가 인상적이고요.
내세에 대한 믿음이 없기에, 많은 이들이 채 100년도 못 되는 인생의 외로움과 덧없음을 견딜 수 없다. 자신이 순간을 살다 가는 불나방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참을 수 없기에, 자기 닮은 자식을 상상한다. 너는 내 자식이란다. 너와 나는 한 배를 탔단다. 정체성을 공유한단다.

통찰에 유머를 곁들인 문장을 보고 나면 정신의 눈이 확 뜨이는데요, '정체성은 시간을 견디기 위한 허구다' 편의 위 표현이 그랬어요. 인간은 자산을 매입하고 자식을 낳으며 이승에 뿌리박고 싶어 하지만, 그건 이승에서 모든 걸 이뤄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란 건데요. 시간에 종속돼 견디지 않아도 될 고통을 짊어지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자는 경고죠. 짧은 인생에 집착하지 말고, 시야를 인생 이전과 이후까지 넓혀보길 김 교수님은 권해요.

장자는 대꾸한다. 사람이 죽으면 태어나기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법이라고. 태어나기 전이나 죽은 뒤나 모두 삶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고. 태어나기 이전 상태에 대해 슬퍼한 적이 있냐고. 태어나기 이전 상태에 대해 슬퍼한 적이 없는데, 왜 죽었다고 새삼 슬퍼하느냐고.
 
지루하고 긴 삶을 그대로 느끼면서, 때로 일순간 몰입하면서 팔딱이는 인생의 맥을 고찰해보라고도 제안해요. '느린 것이 삶의 레시피다' 편에서는 이른바 느린 영화 중 하나인 <퍼스트 카우(2019)>를 예로 드는데요(영화 공부를 하신 이력이 있어서인지 대중예술 관련 레퍼런스가 상당히 풍부해서 또 재밌습니다🧐). '사태의 진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천천히 보아야 한다'라면서 '서둘러 판단하지 않고 구체적인 양상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것, 그것은 신산한 삶의 시간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레시피이기도 하다'고 말해요.

어딘가에서 '진짜 자유는 생각의 자유'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요, 책을 읽고 불쑥 그 말이 떠올랐어요. 쳇바퀴 속에서 권태롭든, 굵은 덩어리를 삶에 욱여넣고 있든 삶을 견디는 모두에게 이 책을 추천해요. 생각의 자유가 북플러님을 건져주리라 믿어요🙏 


-에디터 나기🌙

bookplatter.lette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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