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 속에 살아 있는 여인들 1 " 박명인
발행일자: 2022-10-07
Vol. no 20 

명화속에 살아 있는 여인들 I

폴린느와 캐서린

 

by 박명인(한국미학연구소장, 아티파이 고문)


밀레는(1814-1875년) 1월, 60세로 타계했으며 렘브란트 보다는 200여 년 후에 태어났다. 이때가 나폴레옹이 패배해서 엘바섬(Elba Island)으로 간 해였다.


밀레는 농업을 경영하는 가정의 8명의 형제 중 장남이었다. 그가 태어난 북 노르망디의 바다가 인접한 그레빌 아그(Gréville-Hague)에 있는 작은 마을 그뤼시(Gruchy)는 제2차세계대전의 D데이(연합군이 대독일작전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감행)포화에 휩싸여 생가는 전소되었다. 이로 인해 농업을 돕던 소년 밀레는 그림을 배우기 위해 쉐르부르그(Cherbourg)로 갔다. 그곳에서 시의 장학금 혜택으로 파리로 국내유학의 길이 열렸다. 밀레는 파리에서 선생 폴 들라로슈에게 배우는 것 외에도 루브르미술관에 가서 회화의 전통성을 익혔다.


1840년 26세에 살롱(관전)에서 초상화로 입선한 후에 다시 쉐르부르그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듬해 11월 첫 번째 아내인 폴린느 비르지니 오노(Pauline-Virginie Ono)와 결혼하였으나 생활이 어려워 다시 파리에 가서 간판·미인화 등을 그리며 생활해 나갔다. 폴린느는 1821년 영국에서 태어나 부인앙품점의 딸이었다. 이때 밀레는 27세, 폴린느는 20세였다. 폴린느의 초상화는 쉐르부르그에서 결혼한 이듬해에 초상화를 그리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을 때 그려졌다. 그래서 그런지 폴린느의 눈에는 우수(憂愁)가 가득했고, 매우 가녀린 미모의 모습이었다. 빗으로 곱게 빗어 내려트린 것 같은 윤기가 흐르는 머릿결. 넓은 이마, 큰 눈동자, 매끄러운 피부, 검은 머리카락, 검은 의상, 오른손에 쥐고 있는 우유 빛 쇼올, 그리고 젊고 도톰한 이마에 쌕시한 예쁜 미모와 앳된 입술로부터 턱의 선은 아름다운 매혹적인 정감이 흐르고 있다. 아름답고 연약한 목에 걸린 보석을 사용한 목걸이는 이 초상화(모델)의 기품을 유지하는 중요한 소도구로 보인다.


밀레는 폴린느와 함께 파리로 갔으나 지독한 가난을 이겨내지 못하고 폴린느는 결혼 2년 5개월 만에 결핵으로 1844년 4월 21일 사망했다. 자녀는 없었다.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아내의 초상화는 밀레의 마음을 휘저어 어지럽히지 않을 수 없었다. 밀레는 이때가 가장 괴로운 때였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밀레 부인 캐서린·르메르의 초상』은 1844년에 그려진 것으로 보아 폴린느와 사별한 지극히 가까운 시기에 캐서린을 만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캐서린은 브리타니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쉐르부르그에서 가정부로 일하고 있었던 당시 17세소녀였다. 아내와 사별한 밀레는 30세였다. 캐서린은 폴린느처럼 미모를 지니지는 못했지만 가정부로 일하면서 세상풍파에 시달려 온 강인함과 늠름함을 보이고 있었다. 몹시 거칠고 힘찬 여인이었다. 그러나 밀레는 식생활도 궁핍하고 집세조차 조달하기 어려운 힘든 결혼생활이었다. 나이도 어린 캐서린으로서는 성립되지 않는 빈곤과 싸워야 하는 삶이었다. 그러나 폴린느와 짧은 2년 5개월 동안의 결혼생활은 초상화를 그리며 생계를 유지할 때라서 폴린느의 초상화는 몇 점 남기고 있지만, 캐서린의 초상화는 극히 적었다. 반면, 캐서린의 영향 때문인지 일하는 사람들을 많이 묘사했다. 캐서린은 『바느질을 하는 여자』(유채)에서 보이듯이 일하고 있는 인간을 많이 그린 밀레의 작품 중, 이름 없는 한 사람의 여자로서 그려지고 있었다. 남겨진 그림을 볼 때 폴린느와 대척적인 캐서린은 일하는 여인상을 그리는 계기가 되었고, ‘농민화가’라는 세계를 구축하는 밀레는 두 번째 부인인 캐서린으로부터 출발했다고 말할 수 있다.

밀레의 첫번째 부인, 폴린느
Madame J.-F. Millet (Pauline-Virginie Ono) ,   Jean-François_Millet

밀레의 생가는 대가족이었다. 할머니, 어머니, 큰아버지, 형제자매들이 있었고, 아버지는 밀레가 21세 때 병으로 사망했다. 손자 밀레에게 애정을 쏟던 할머니는 캐서린과의 결혼을 신분 차이를 이유로 인정하지 않았다. 밀레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혼인신고도 하지 않고 동거생활을 했다. 밀레는 장남으로서의 책임을 느끼면서도 고향에는 돌아가지 않고 캐서린을 데리고 르아브르(Le Havre)를 거쳐 파리로 가서 살았다. 캐서린은 내연의 아내인 채였다. 파리에서는 살롱에 출품도 하고 그럭저럭 생활이 되었지만 1849년 콜레라가 유행하는 파리를 떠나 바르비종((Barbizon)으로 갔다.


파리의 남동 퐁텐브로(Fontainbleau) 산림을 거쳐 바르비죵까지 60킬로미터. 숲과 기름진 들판을 스케치하러 많은 화가들이 방문하고 있었다. 밀레가 바르비죵으로 갔을 때 밀레는 35세였고, 캐서린 22세, 장녀 마리 로자리(2세 11개월), 차녀 레온틴느 루이스(1세 11개월), 장남 진 프랑스와(5개월).


바르비죵에 온 밀레는 세 번째 딸 마그리트가 태어나면서 자녀가 4명이 되었다. 가족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던 캐서린은 1851년 결혼을 인정하지 않은 할머니가 타계하고 1853년 어머니도 타계하고 이 해 9월 바르비죵의 시청사에서 결혼식을 했다. 8월 7일의 일요일부터 14일의 일요일까지 시청사의 정문 앞에 결혼하는 두 사람의 공시가 행해졌다. 이의 주장이 없음으로 두 사람의 결혼 신청은 정당한 것으로서 수리되었다. 결혼식 전 동거 중에 태어난 4명의 자녀가 있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데오도르 루소 등 친구 4명이 서명했다. 이때 캐서린은 아버지가 13살에 사별하고 어머니는 쉐르부르그에 살고 있었다. 결혼 승낙서에는 남편이 사별하고 없었기 때문에 과부 64세라고 서명했다.


밀레는 화가로 인정되고 있던 시점이어서 당당하게 가족을 떠맡았다. 그리고 바르비죵의 들일 하는 사람들, 양치기, 뜨개질하는 여인, 버터 만드는 여인 등 손끝으로 하는 일에 부지런히 힘쓰는 여인들을 계속 그렸다. 사람들의 생활에 밀착해서 관찰하고 숙지하여 새로운 인물상이나 배경으로서의 풍경을 그려 냈다. 밀레보다 27년 후에 태어난 르느와르는 바르비죵의 아름다운 자연에 감상적(感傷的)인 농부를 그려 낸 밀레를 평가하지 않았다.

노동은 고역을 모면하지 않는다. 그러나 밀레가 그린 인물들은 괴로움보다 평온함이 느껴진다. 지극히 나이브한 인상의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캐서린과의 결혼, 많은 자녀들, 그리고 바르비죵에 의해 초래된 밀레의 작품들은 빈농들의 표정에서도 평온하게 느껴지게 했던 것이다. 밀레의 만년에 파스텔화로 《마가렛》(오르세미술관장)이 있다. 흰 꽃들을 배경으로 젊은 딸이 그려져 그 얼굴은 들판의 꽃과 같이 사랑스럽다. 모델은 3녀인 마그리트로 보여진다.


죽음 직전인 1875년 1월 3일, 두통으로 고생하던 밀레는 다시 한번 종교상의 결혼 수속을 끝마치고‘평범한 국민으로 태어나 평범한 국민으로 죽는다’라는 말을 푸념처럼 남기고 17일 후인 20일 타계했다. 이미 빈곤에서 벗어난 캐서린은 1894년까지 살았다.

  밀레가 그린 부인 캐서린 초상화
<Portrait of Catherine Lemaire, by Jean-Francois Millet>

흔히 밀레를 바르비종파라고는 하지만 풍경화보다는 농민 생활을 많이 그렸다. 영세한 빈농들의 쓸쓸하고 그늘진 모습에서도 평온함이 느껴지는 것이 밀레 작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종교적 정감이 느껴지는 서정성이 친근감을 자아내고 우수에 찬 분위기를 감도는 화풍을 확립했다. 《이삭 줍기, 1857년 오르세미술관》로 비판적 여론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삭 줍는 극빈층 세 여인 뒤로 말을 탄 보완관이 있고, 농장주의 감시가 있는 내용을 두고 부르주아적인 내용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반면, 19세기 프랑스에서는 이삭줍기가 농촌의 극빈층에게 부농이 베풀어 주는 일종의 특권이라고도 했다. 농장주가 추수를 하고 난 들판에 남은 밀이삭을 주워 가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루 종일 이삭을 주워도 빵 한 덩어리 만들 밀을 얻을까 말까 하는 빈농의 실태를 마치 고발이라도 하듯 또는 대변이라도 하듯 농민들의 실정을 그림으로 많이 그렸다. 그러나 부르주아적 부농들의 비판과는 달리 세밀한 풍경 묘사와 지방색이 완연한 여인들의 의복, 풍요로운 들판과 성실한 농부들이 있는 농촌이 바로 당시의 도시 부르주아가 간절히 원했던 것이었다. 이것은 거대 자본을 소유한 지주들이 저임금 인부들을 고용하여 대규모 경작을 경영하는 산업화의 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밀레(Jean-François Millet) 초상화, Nad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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