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결, 민경이야.
엄마가 아침으로 챙겨준 사과와 호두, 그리고 만두를 게눈 감추듯 먹고선 이 편지를 쓰고 있어. 아침 만두라니. 오늘은 왠지 좋은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아.
결, 너는 주로 어떤 음식으로 하루를 시작하니?
오늘 잠에서 깨어날 때 처음 느꼈던 감각은 '더워!'였어. 이마와 목덜미에서 습기가 느껴졌고, 들이쉬는 공기에 찬기가 전혀 없었어. 방에서 거실로 나올 때면 늘 큰 용기가 필요했는데(춥기 때문에), 오늘은 그 동작에 걸림돌 하나 없었어.
인터넷에서 날씨를 검색해 보고선 깜짝 놀랐어. 10도에 가까워진 최고 기온을 보면서 겨울의 끝자락임을 실감했어. 그리고 묘하게 흐트러진 네이버 로고를 클릭하고서는 더 놀랐어, 오늘이 입춘이더라고. 입춘을 맞이하여 개구리들이 뛰노는 일러스트로 꾸며진 연둣빛 로고를 보면서 당혹감을 느꼈어.
사실 이 봄의 시작이 반갑지 않거든.
이 겨울이 좋았기 때문에. 겨울의 끝자락을 꽉 붙잡고 싶어져.
*
지난 1월에는 많은 사람을 만났어. 애쓰지 않아도 그들을 사랑할 수 있고, 그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나의 친밀하고 다정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만을 만났어.
보고 싶고, 이야기 나누고 싶고, 좋아하는 사람들만 만날 수 있는 인생의 얼마 안 되는 시기가 요즘이 아닐까? 생각하며 사람들을 만났어. 그런 순간 안에 있으면서도 그 순간을 그리워했어. 너무 좋았기 때문이야.
한편으로는 슬펐어. 그 사람들과 다음 만남을 기약하기 어려웠거든. 나는 이제 서울로 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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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만났던 언니는 대학시절 조모임을 하며 친해졌던 언니였어. 5년 정도를 서로 안부도 나누지 않고 지내다가 이번 겨울에 다시 만나 몇 주간 꾸준히 보았는데, 어제 언니와 헤어지면서는 다음에 우리가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물음에 분명한 답을 내기 어려웠어.
언니를 다시 만나서, 그때 좋아했던 모습을 다시 보고, 또 그때는 몰랐던 모습을 알게 되는 게 나에게 순도 높은 기쁨이었기에 어제 언니랑 안녕하고 돌아서던 순간이 조금 아팠어.
그 순간은 어떤 대표성을 가지고 있었어.
대구에서 다시 만나 즐거워했던 사람들과의 모든 안녕을 대표하는.
언니와 헤어지고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데, 하루 종일 꿍했던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어.
입김이 날듯 말듯 하던 거리는 더 차가워졌고, 축축한 버스에는 사람이 많았어.
10분 정도 버스를 타면 집에 도착할 수 있지만, 그게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어.
버스에서 내려 다시 비 오는 거리를 걸어 집까지 갈 엄두가 나지 않았어.
두 다리 튼튼하고, 옷도 따듯하게 입었고, 장갑과 우산도 있고. 모든 게 괜찮았지만 마음이 괜찮지 않았어.
이 마음이 뭘까? 집까지 걸으며 생각했어.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일기를 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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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쓰며 찾아낸 그 마음의 이름은 '상실감'이었어.
찾아낸 마음에 대해 쓰며, 그 마음을 오래 들여다보았더니. 공허함에 몸부림치던 마음이 점점 평온해지기 시작했어. 일기에 끝에는 이렇게 적었어.
아까 비 오는 거리에서는 상상하지 못했던 평안.
이 평안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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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감, 죄책감, 미움, 질투, 수치심 같은 어렵고 힘든 감정들이 몰려올 때면 나는 그 감정들을 밀어내려고 하는 것 같아.
그 방식은 '아닌데? 나 지금 그런 거 안 느끼는데?'처럼 시치미를 떼는 것일 수도 있고, '너 지금 그런 거 느낄 때 아니야, 느끼지 마!'처럼 나를 비난하는 방식일 때도 있어. 나는 주로 후자를 많이 쓰고, 매번 실패해.
아마 집에 도착하기 전에는 그런 시도들을 했었던 것 같아. 왜 잘 놀고 와서 울적해 하냐고, 바보 같다고, 그러지 말라고. 이렇게 나약해서는 살 수가 없다고. 나를 회유하고 다그치고 설득하며.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이번에도 역시 실패했어. 마음이 점점 더 괴로워지기만 했거든.
마음이 끝장까지 가고 나서야, 동아줄을 붙잡는 심정으로 일기를 써.
피하고 싶은 감정에 대해 쓰는 건 늘 어렵지만, 신기하게도 쓰다 보면 탁, 하고 괜찮아 지는 순간이 있어. 이때까지는 그 순간에 대해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순간은 '내가 내 마음을 인정한' 순간이 아닐까 싶어. 내가 공허함과 상실을 느끼고 있다는 걸 인정한 순간 평안이 찾아왔던 것 같아.
평안은 감정의 무(無) 상태가 아니라는 걸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되었어.
평안을 느끼던 순간에도 여전히 슬펐거든. 다만 내 마음을, 내가 경험한 모든 감정을 모두 내 것으로 품을 수 있어서 평안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아.
결, 너는 어때?
네가 느끼고 경험한 모든 것을 너의 것으로 인정하고 있니?
그 모든 게 나의 것임을.
*
아까 먹었던 만두가 벌써 다 소화되었는지 '점심 뭐먹지?' 하는 생각이 들어.
이번 봄에는 제철 음식들을 챙겨 먹고 싶어. 봄나물이나 도다리 쑥국 같은 음식들을.
편지를 시작할 때만 해도 아무 잘못 없는 봄이 미웠는데, 이제는 봄이 조금 기다려지는 것 같기도 해.
다음에 편지할 때면 봄꽃 이야기를 하게 될지도 모르겠어.
그때까지 잘 지내길, 마음을 담아 바랄게.
2024.02.04. 민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