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1. 그 모든 것이 나의 것임을

안녕 결, 민경이야.


엄마가 아침으로 챙겨준 사과와 호두, 그리고 만두를 게눈 감추듯 먹고선 이 편지를 쓰고 있어. 아침 만두라니. 오늘은 왠지 좋은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아.


결, 너는 주로 어떤 음식으로 하루를 시작하니?


오늘 잠에서 깨어날 때 처음 느꼈던 감각은 '더워!'였어. 이마와 목덜미에서 습기가 느껴졌고, 들이쉬는 공기에 찬기가 전혀 없었어. 방에서 거실로 나올 때면 늘 큰 용기가 필요했는데(춥기 때문에), 오늘은 그 동작에 걸림돌 하나 없었어.


인터넷에서 날씨를 검색해 보고선 깜짝 놀랐어. 10도에 가까워진 최고 기온을 보면서 겨울의 끝자락임을 실감했어. 그리고 묘하게 흐트러진 네이버 로고를 클릭하고서는 더 놀랐어, 오늘이 입춘이더라고. 입춘을 맞이하여 개구리들이 뛰노는 일러스트로 꾸며진 연둣빛 로고를 보면서 당혹감을 느꼈어.


사실 이 봄의 시작이 반갑지 않거든. 


이 겨울이 좋았기 때문에. 겨울의 끝자락을 꽉 붙잡고 싶어져. 


*


지난 1월에는 많은 사람을 만났어. 애쓰지 않아도 그들을 사랑할 수 있고, 그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나의 친밀하고 다정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만을 만났어.


보고 싶고, 이야기 나누고 싶고, 좋아하는 사람들만 만날 수 있는 인생의 얼마 안 되는 시기가 요즘이 아닐까? 생각하며 사람들을 만났어. 그런 순간 안에 있으면서도 그 순간을 그리워했어. 너무 좋았기 때문이야.


한편으로는 슬펐어. 그 사람들과 다음 만남을 기약하기 어려웠거든. 나는 이제 서울로 가니까.


*


어제 만났던 언니는 대학시절 조모임을 하며 친해졌던 언니였어. 5년 정도를 서로 안부도 나누지 않고 지내다가 이번 겨울에 다시 만나 몇 주간 꾸준히 보았는데, 어제 언니와 헤어지면서는 다음에 우리가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물음에 분명한 답을 내기 어려웠어. 


언니를 다시 만나서, 그때 좋아했던 모습을 다시 보고, 또 그때는 몰랐던 모습을 알게 되는 게 나에게 순도 높은 기쁨이었기에 어제 언니랑 안녕하고 돌아서던 순간이 조금 아팠어. 


그 순간은 어떤 대표성을 가지고 있었어. 

대구에서 다시 만나 즐거워했던 사람들과의 모든 안녕을 대표하는.


언니와 헤어지고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데, 하루 종일 꿍했던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어.

입김이 날듯 말듯 하던 거리는 더 차가워졌고, 축축한 버스에는 사람이 많았어.


10분 정도 버스를 타면 집에 도착할 수 있지만, 그게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어.

버스에서 내려 다시 비 오는 거리를 걸어 집까지 갈 엄두가 나지 않았어. 

두 다리 튼튼하고, 옷도 따듯하게 입었고, 장갑과 우산도 있고. 모든 게 괜찮았지만 마음이 괜찮지 않았어. 


이 마음이 뭘까? 집까지 걸으며 생각했어.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일기를 썼어.


*


일기를 쓰며 찾아낸 그 마음의 이름은 '상실감'이었어.


찾아낸 마음에 대해 쓰며, 그 마음을 오래 들여다보았더니. 공허함에 몸부림치던 마음이 점점 평온해지기 시작했어. 일기에 끝에는 이렇게 적었어.



아까 비 오는 거리에서는 상상하지 못했던 평안.

이 평안에 감사한다.


*


상실감, 죄책감, 미움, 질투, 수치심 같은 어렵고 힘든 감정들이 몰려올 때면 나는 그 감정들을 밀어내려고 하는 것 같아. 


그 방식은 '아닌데? 나 지금 그런 거 안 느끼는데?'처럼 시치미를 떼는 것일 수도 있고, '너 지금 그런 거 느낄 때 아니야, 느끼지 마!'처럼 나를 비난하는 방식일 때도 있어. 나는 주로 후자를 많이 쓰고, 매번 실패해.


아마 집에 도착하기 전에는 그런 시도들을 했었던 것 같아. 왜 잘 놀고 와서 울적해 하냐고, 바보 같다고, 그러지 말라고. 이렇게 나약해서는 살 수가 없다고. 나를 회유하고 다그치고 설득하며.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이번에도 역시 실패했어. 마음이 점점 더 괴로워지기만 했거든.


마음이 끝장까지 가고 나서야, 동아줄을 붙잡는 심정으로 일기를 써. 

피하고 싶은 감정에 대해 쓰는 건 늘 어렵지만, 신기하게도 쓰다 보면 탁, 하고 괜찮아 지는 순간이 있어. 이때까지는 그 순간에 대해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순간은 '내가 내 마음을 인정한' 순간이 아닐까 싶어. 내가 공허함과 상실을 느끼고 있다는 걸 인정한 순간 평안이 찾아왔던 것 같아. 


평안은 감정의 무(無) 상태가 아니라는 걸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되었어. 

평안을 느끼던 순간에도 여전히 슬펐거든. 다만 내 마음을, 내가 경험한 모든 감정을 모두 내 것으로 품을 수 있어서 평안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아.


결, 너는 어때?

네가 느끼고 경험한 모든 것을 너의 것으로 인정하고 있니?


그 모든 게 나의 것임을.



아까 먹었던 만두가 벌써 다 소화되었는지 '점심 뭐먹지?' 하는 생각이 들어.


이번 봄에는 제철 음식들을 챙겨 먹고 싶어. 봄나물이나 도다리 쑥국 같은 음식들을.

편지를 시작할 때만 해도 아무 잘못 없는 봄이 미웠는데, 이제는 봄이 조금 기다려지는 것 같기도 해.


다음에 편지할 때면 봄꽃 이야기를 하게 될지도 모르겠어.


그때까지 잘 지내길, 마음을 담아 바랄게. 



2024.02.04. 민경

추신. 언젠가 산에서 만난 토끼 사진을 동봉할게. 겨울이라고 촘촘하고 복슬복슬하게 털이 자란 게 귀여웠어. 산에 자주 오시는 할아버지들이 간식을 준다고 토끼를 깨웠을 때 찍은 사진이라 비몽사몽한 것도 귀여워:)
답장은 여기로 보내주면 돼,
보내준 답장은 우리 모두 볼 수 있다는 점 기억해줘.
모두들 너의 마음을 궁금해하고 있으니까.
#77-2. 지난 편지에 받은 답장을 나눌게, 너로 사는 것이 편안한지 물었어.
"너를 쉬게 해줘"

민경의 이야기 매번 들려줘서 고마워.

연말에 정확히 그 생각을 했어. 나는 내가 너무 버겁다. 나를 사랑하는 일이 가장 어렵고 나를 함부로 대하는 일은 가장 쉽다.

내가 참 사랑 받는 사람인 걸 알고 있는데, 나에겐 내가 왜 이리도 모자라고 별로인지 모르겠어. 오랜 기억 속에 그렇게 대해진 적이 있어서 인이 박혀있는 걸라나.

하지만 옷을 벗듯 나를 벗어버릴 수 없으니. 자꾸 작아지는 나를 데리고도 계속 살아가야지.

평생 이렇게 살아와서 당장 바뀌긴 어렵겠지만, 새롭게 인이 박히도록 계속 말해줘야지, 타인에게 정성을 다하기는 나에게 쉬운 일이니까 타인에게 말하듯이.


괜찮아. 정말로 괜찮아.

타고난 죄인처럼 모든 것에서 네 잘못을 찾지 마.

네가 잘못한 게 아니어도 일어나는 일들이 있어.

넌 남탓 좀 해도 돼. 그래도 너는 무례하지 않은 사람이야. 모두를 사랑하고야 말잖아.

너를 쉬게 해줘. 일에서, 생산에서, 죄에서, 타인의 마음에서, 너에게서.

그냥 살아. 가볍고 유쾌하게. 시트콤 캐릭터처럼.

어쩌다 일어나는 일들을 그냥 바라봐.

그냥 살아. 자꾸 죽음을 생각하지 말고.

나는 네가 살았으면 좋겠다. 그냥.

그래도 괜찮으니까.

"온전한 나로 살아보려고 해"

해가 바뀌고 훌쩍 한 달이 지나 달력 한 장을 넘겨버린 즈음에 답장을 쓰고 있어. 민경이는 네가 붙여준 올 해의 이름답게 가차워지고(가까워지고) 있는지?, 발걸음은 떼고 있겠지? 언제나 네 질문을 받으면 그랬듯이 이번에도 나는 가까운가? 세상과 사람과 나의 일과 그리고 나 자신과, 생각해 보았어.

볕바른 읍내 버스 정류장 태양광 벤치에 앉아 있자니 궁뎅이가 뜨끈하여 약간 살살하게 느껴지는 이월 첫날의 바람이 두렵지 않았다. 한 시간은 예사로 여기며 버스를 기다리는 구리빛 팔십 노인네 분들의 두런두런 주고받는 억양 짙은 목소리가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은 낯선 이에게 쉽게 말을 건네지 못하는 도시 풍경과는 사뭇 달랐기 때문이었다. 사람과 가깝게 지내는 저네들은 자기 자신과도 가깝게 지내는가? 궁금해졌다. 어쩌면 해가 뜨면 눈에 뵈는 일을 하고 해가 지면 잠자리에 들어 이런 저런 생각에 휘말리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배짱 편하게 지낼지도 몰라. 하지만 궁극적으로 잘 사는 걸까? ‘삶은 개구리 증후군’! 이런 표현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짜여진 일상을 생각 없이 살다가는 치명적인 일타를 당하게 될 확률이 높아질 것 같다. 읍내 나들이 대부분의 목적은 병원 방문인 것 같다. 일을 안 하면 안 아프다고 하면서도 눈에 보이는 일을 놓지 않기 때문에 결국 약에 의존하여 남은여생을 보내는 것을 당연시 하는 모습을 반박할 논리가 내게는 없지만 어쩐지 질문지를 건네 보고 싶다. 자신과 친하게 지내고 계시는 가 물어보고 싶다.

나를 돌아보면 나는 한 때 세상과 사람에게서 멀어지고 싶어 했었고 실제로 많이 멀어진 상태야. 뉴스와 인터넷 접속을 멀리하고 연락처를 삭제하기도 하고 차단시키기도 했었지. 그 결과 도심 한 가운데 살면서도 무인도에 고립되어 있는 것과 같은 상태를 여러 해 되풀이 하고 있어. 그래서 상대적으로 나 자신과는 가까이 지내는 것 같아. (비록 나로 살고 있지는 않지만,) 요즈음 부쩍 관심이 많이 가는 뜨개질을 하면서 앉아 있자면 나의 내면 속으로 한 코 한 코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아. 거기에서 나와 마주 하는 순간은 적어도 평화로운, 날들을 보내고 있어. 하지만 나로 살아 본 적이 있나 싶은 생각에 한 숨이 나기도 해. 늘 나를 대체해야할 이름( 딸, 아내, 며느리, 엄마, 친구, 회원,..)이 있어서 그에 충실하자면 늘 나를 버려야 했던 것 같아. 물론 자기 자신으로 살면서도 가능한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멀티가 안 되는 것 같아. 하나에 충실하자면 다른 하나는 놓아야 하는 스타일이랄지. 나를 대체하는 이름들 앞에 ‘좋은’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 위해 나로 사는 날들이 불편했었지만 이제는 그 수식어를 떼어버리고 온전한 나로 살아보려고 해.

예전에는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기 위해서 작명소를 찾아가는 풍경이 흔했었는데 그만큼 ‘작명’이 중요한 일인 것 같아. 이름을 붙여 준다는 것은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고 애착을 갖게 하는 행위인 것 같아. 우리 집에는 이름을 붙여준 봉제인형이 몇 개 있는데 이름을 불러줄 때마다 어쩐지 다정한 느낌이 들어. 한 걸음 한 걸음씩 속을 채워 넣고 있는 올 한해에 나도 너처럼 이름을 한 번 붙여보아야겠어. 애착을 가지고 더 열심히 살 수 있게 될 것 같아. 드문 드문 편지가 더더욱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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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하는 말 같기도 하고, 나에게 하는 말 같기도 하고. 시 같기도 하고, 편지 같기도 한 답장 잘 읽었어. 그래도 괜찮다고 힘주어 이야기해 줘서 고마워, 읽는 내내 위안을 받았어:)

나는 도통 나를 쉬게 하지 않는 사람이라서 생산에서, 죄에서, 타인의 마음에서,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서 나를 쉬게 하라는 문장이 가장 무겁고 깊게 다가왔어. 우리가 우리를 편히 쉬게 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그저 살아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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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장을 읽으며, 얼마 전 공부한 '융'이라는 학자의 이론이 떠올랐어. 융은 '자기자신'이 되는 것을 강조한 심리학자야. 하지만 그도 청년기에는 사회에서 주어진 역할을 잘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했어. 즉, 가족 구성원이나 회사 또는 다른 단체에서 요구하는 페르소나를 잘 다루는 것. 너의 표현대로 라면 '나를 대체하는 이름들을 가지는 것, 그리고 그 앞에 좋은 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일이었겠지. 

그리고 융이 유행(?)을 시킨 용어가 하나 있어. 바로 '중년의 위기'라는 단어야. 페르소나가 팽창하여 '자기자신'을 잃어버린 것 같은 위기감을 뜻하는 단어이지. 

너의 편지를 읽으며, 어쩌면 네가 이제 페르소나를 놓고, 자기에 가까워지는 시기에 도착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어. 온전한 나로 살아볼 거라는 너의 다짐에 나도 덩달아 힘이 나는 것 같아. 앞으로 할 너의 선택을 응원할게:)

p.s. 이름 붙이기에 대한 너의 생각에 나도 동의해! 어쩌면 매해에 이름을 붙여준 이유도 그해에 애착을 가지기 위함이었던 걸지도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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