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렇게 된 거야
안녕하세요, 풀칠러 님. 아매오입니다.
오늘의 주제는 ‘전형적으로 별로인 사람’입니다.

왜 그런 사람 있잖아요. ‘아니, 이런 말(또는 행동)을 실제로 한다고?’ 싶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별로라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모두가 혀를 차는 말(또는 행동)은 어째서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전해지는지. 대체 그 명맥을 잇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의 정체는 무엇인지. 방심하면 저도 그렇게 되고 마는 걸까요?

아아...그건 정말 싫은데...

오늘도 읽는 마음을 내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별로인 사람들을 마주치지 않는 한 주 보내시길 바랍니다.
P.S.
오늘은 스티비 팀과 진행한 인터뷰 소식도 편지 말미에 같이 실어 보냅니다. 작은 이벤트도 준비되어 있으니 한번 살펴봐 주셔요😁
‘전형적으로 별로인 말과 행동의 명맥을 지키는 비밀결사단체’ 같은 게 존재한다면 어떨까요. 그들은 아마도 이런 미션을 갖고 있을 것 같습니다.

“별로인 말과 행동을 꾸준히 계승하고 보존한다. 무신경·무례·자기중심적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아카이브하고 실천하며 그로부터 비롯되는 미묘한 불쾌함을 후대에 전수한다.”

전형적으로 별로인 말과 행동의 명맥을 지키는 비밀결사단체(별로단)에게 ‘별로인 말과 행동’은 고쳐야 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변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며 옛날식 무신경을 문화유산처럼 보호하죠.

이들은 소셜미디어 댓글이나 회사 메신저 내 대화, 가족 모임에서 나오는 발언 등 보통 사람들이 별로라고 합의한 말과 행동을 수집하고 분류합니다. 이를 통해 불쾌함을 패턴화하고 그것을 실제 대화에서 습관적으로 복원 및 재연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고민을 털어놓으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어땠냐면…”라며 대화를 풀어갑니다. ‘불행 배틀식 잘난 척’ 정도로 명명할 수 있겠네요.

이때 ‘애매하게 불편한 말과 행동’을 넘어 ‘대놓고 폭력적인 말과 행동’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상대가 이유를 설명하기 힘든 불쾌함이야말로 ‘별로’의 진수이기 때문입니다.

별로단의 비전은 아마 이런 게 아닐까요.

“무의식적 민폐의 완전한 자동화. 인류가 반성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구축한다.”

별로단이 추구하는 이상 사회는 자기반성이나 성찰, 배려가 불필요한 사회입니다. 다시 말해 모두가 자신이 별로인 줄 모르고 살 수 있는 세상이죠. 모두가 무례하면 누구도 무례하지 않다고 느끼게 됩니다.

이를 기반으로 한 핵심가치는 5개 정도를 뽑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 핵심가치는 ‘안일’입니다. 불쾌함을 느끼더라도 ‘귀찮음’의 이름으로 무력화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죠. 결과적으로 별로인 말과 행동에 대한 책임 회피와 무관심이 ‘정상’으로 받아들여집니다. 두 번째 핵심가치는 ‘합리적 무례’입니다. 이성적이고 객관적이며 현실적이라는 프레임으로 무례를 포장하는 것이죠. 세 번째 핵심가치는 ‘전통’입니다. 사회생활은 모두가 같이 하므로 변화 이전의 옛것에 대한 존중을 보이라고 강요하는 태도입니다. 네 번째 핵심가치는 ‘무반성의 지속가능성’입니다. 소위 ‘사과하면 더 이상해진다’는 말의 기반에 깔린 생각이죠. 마지막 다섯 번째 핵심가치는 ‘집단의식’입니다. 서로를 불편하게 하면서도 묘하게 편안한 관계를 유대감으로 보는 접근입니다.

다섯 가지 핵심가치는 모두 별로인 말과 행동을 개인의 결함이 아닌 시스템의 규범으로 만들기 위한 장치입니다. 이로써 불쾌함은 ‘필요악’과 같은 지위를 획득하게 됩니다.

별로단에는 나름의 의식 절차가 존재합니다. 입단식은 간단합니다. 무례한 말과 행동으로 면접관의 표정을 굳게 만드는 데 총 3회 성공하면 됩니다. 합격자는 “아, 나는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요.”라고 선언하며 정식 단원이 되죠. 이 짧은 문장은 별로단의 지향을 함축하는 구호입니다. 상처를 주되 책임은 끝까지 회피하는 능력이야말로 별로단이 갖춰야 하는 기술입니다.

총회가 열릴 때면 단원들은 늘 20분 늦게 등장합니다. 그들에게 시간은 타인의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발언권은 늦게 온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주어집니다. 모든 안건은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요.”라는 한 문장으로 폐기되죠. 합의는 무의미해지고 대화는 단절됩니다. 하지만 별로단에게 있어 그것은 존재의 목적을 달성하는 순간과 같습니다.

별로단에도 바이블이 존재합니다. 구성원들은 매주 그것을 공부하죠. “나는 솔직한 편이야.”, “그냥 내 생각은 그래.”,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말이야.”, “요즘 애들은 말이야.” 이런 문장들은 그야말로 기본 초식입니다. 상대가 반박할 틈을 주지 않는 완성형 문장들. 별로단의 언어는 공격보다는 방어에 능하고 대화보다는 단절에 가까우며 그 안에서만 작동하는 묘한 유대감을 만들어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런 노력을 지속할까요. 별로단의 운영 철학은 명확합니다. 지나친 공감과 이입은 사회를 피곤하게 만든다는 믿음. 그들은 스스로를 ‘정서적 과잉의 시대를 교정하는 사람들’이라 부릅니다. 배려가 피로를 낳고 사과가 위선을 부른다고 믿습니다. 최종 목표는 공감이 사라진 자리에서의 평화입니다. 모두가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불편이 일상이 되도록.

오늘도 별로단은 곳곳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방심하지 마세요. 당신도 그 일원일 수 있으니. 물론 이 편지를 보내는 저 또한 그렇겠지만.
야백: …일단 진정하셔요.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누가 열받게 한 거죠? 지각을 평소에 자주 하는 편이라 혹시 저 때문에 화나셨나 걱정이 되는군요.

별로단의 일원으로서, 어쩌다 이렇게 별로인 인간이 되었는지를 반추해 봅니다.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할 땐 저도 뭐 나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잘못한 게 있으면 잘못했다고 인정하고, 상대방이 놓인 맥락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어른이 되고 싶었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조직이라는 곳에선 별로인 행동에 인센티브를 주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잘못을 인정하면 책임을 져야 하고, 그건 결국 누군가는 인사고과를 잘 받고 못 받고를 결정짓는 근거가 됩니다. 또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요’라는 말 한마디로 아이디어를 무시할 수 있는 위치가 되면, 권력을 휘두르고 싶은 유혹이 생기고요. 그 유혹에 한 번만 굴복하면 퇴근이 빨라지고, 실패할 위험도 줄어드니깐요. 실패를 하지 않았으니 인사고과도 잘 받을 확률은 다시 올라가고, 그렇게 승승장구하다 보면 마침내 반성을 담당하는 뇌의 기능은 퇴화해 버립니다. 회사가 잘하고 있다는 사인을 주는데 뭐 하러 귀찮게 반성을 하겠어요?

우리가 별로인 행동을 권장하지 않는 공동체를 꾸리는 데 성공할 수도 있을까요. 흠.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곳간이 풍족해야 할 텐데, 요즘엔 다들 참 어려워서 참 쉽지 않은 것 같네요. 말을 이어갈 수록 제가 '별로단'이라는게 탄로나는 것 같아서, 유명한 시 한 구절을 놓고 도망가렵니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 남았다./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파주: <해리포터 시리즈> 속 불사조기사단을 가뿐히 뛰어넘을 만한 비밀결사단이군요. 다들 저 몰래 못된 인간들끼리 모여서 자기들끼리만 작당모의를 하고 계셨다니… 괘씸하기 짝이 없네요. 제 경험상 전형적으로 별로인 사람들(=개별로단)의 공통점은 아무래도 내로남불인 것 같습니다. 아, 벌써 몇 사람이 전두엽을 스쳐가는군요.

제가 본 개별로단의 단원은 남들이 하는 실수에는 지나칠 정도로 문제를 삼으면서, 정작 자신이 실수할 땐 '그럴 수도 있죠'라며 인류애를 구걸하곤 했습니다. 가끔은 스스로를 연민하며 각박한 세상으로부터 핍박받는 나 자신에 취하기도 했더랬죠. '젠장! 그럴 시간에 미안하다는 말이나 하시고 수습이나 하시라고요!’ 제가 겪은 몇 명의 개별로단원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리네요. 모니터 앞에서 소리지를 뻔했습니다.

자기반성이 취미인 저는, 개별로단 속에서 제 과거의 모습을 발견하고야 말았습니다. 우선 타인의 불편보다 저의 편안함을 우선시하던 애새끼맨 시절을 지나기도 했고요. 죄송하다 말하면 아마추어처럼 보일까 봐 미안함을 입밖으로 내뱉지 않던 때도 있었죠. 어쩌면 저를 스쳐간 개별로단 덕분에 저도 모르게 몸담고 있던 비밀결사단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역시 좋은 것을 보고 배우는 것보다 싫은 것을 보고 하지 말아야지… 쪽이 학습이 빠른 모양이에요.

제가 만난 '개별로단'분들은 모두 잘 살고 계시겠죠? 아주 쬐끔, 고맙긴 하지만 또 보고 싶단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네요.
가을인 줄 알았더니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이미 겨울인 듯합니다.
모쪼록 건강 챙기는 한 주 보내시길 바랍니다.

저희는 다음 주에 <올해도 다 갔네요> 라는 주제로 찾아뵙겠습니다
지난 호 편지에 보내주신 답장에
다시 짧은 답장을 보내드립니다.

풀칠러A
조리원을 퇴소할 때 유독 친절하셨던 선생님께서 '산모님, 누가 뭐라고 해도 산모님 아기를 제일 잘 아는건 산모님이에요. 그것만 기억하심 돼요.' 하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내가 품어 기른 나의 사업도 그렇겠지요. 진심을 믿는다면 어머님 말씀처럼 그마만큼의 크기에 농도를 띤 나의 진심을 택해야겠네요. 그보다는 훨씬 작고 초라한 진심으로, 모쪼록 건승을 기원합니다.
아매오
고맙습니다. 사실 왠지 잘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누군가는 쉽게 보지 말라고 하겠지만,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으로 임하는 사람은 없죠. 요즘 재밌게 보는 예능 프로그램 <신인감독 김연경>에서 “그냥 나올 수 없지. 질 순 없잖아요”라는 김연경 감독에게 양철호 감독은 “경기를 지러 오는 사람이 어디 있냐. 다 이기려고 하지.”라고 대답합니다. 너무 뻔한 말이지만 타이밍이 타이밍인지라 왠지 자신감이 생기더군요. 하하. 잘해보겠습니다.
풀칠러B
저도 그간 퇴사했던 사람들에게 저런 마음으로 가지말라고 했던 것 같아요. 일을 잘해서 가지말라는 것도 맞고, 새 사람이 오면 다시 적응하기 싫은 마음도 맞아요. 그래도 저 말에는 꽤나 많은 사랑과 애정이 담겨있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좋겠네요 ㅎㅎ 밖이 진짜로 추워졌어요. 항상 감기 조심하시고 매주 제 일상 한켠을 채워주셔서 감사해요~
야백
동료를 떠나보낼 땐 항상 '가지 마'와  '잘 가 사이에서 적당한 인사말을 고민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동안 건네왔던 말들이 모두 응원으로 가닿았으면 좋겠네요. 이번주도 일상 한켠을 내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주말까지 화이팅입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신 풀칠러님이 풀칠의 대주주이십니다.
대주주 풀칠러 님께 이번 주의 풀칠 팀 소식을 공유드립니다.
1. 스티비와 <풀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이벤트 有)

연휴 직전에 스티비 팀과 인터뷰 한 내용이 오늘 발행됐습니다. 날고 기는 뉴스레터들에 비해 풀칠이 잘난 건 별로 없지만 어떻게든 꾸준히 이어온 데는 나름대로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나눴어요.


풀칠러스케치 단행본, <풀칠이라는 농담>을 나눠드리는 이벤트도 준비했으니 슬쩍 둘러보셔도 좋겠습니다.


  인터뷰 보러 가기  

2. 풀칠하는 데 쓰겠습니다
아래 계좌로 풀칠팀에게 팁을 보내주실 수 있습니다. 보내주신 팁은 메일 발송 솔루션 비용에 사용됩니다. 풀칠러님의 뜨끈한 마음이 풀칠을 더 차지게 만듭니다.

  카카오뱅크 3333-20-3881365(이*우)  
읽는 마음을 내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번 주도 먹고 사는 것 그 이상의, 충만한 시간을 자주 누리시길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우정을 담아,
풀칠 팀 드림

Published by
풀칠 | 밥벌이 미학 연구회
먹고 사는 게 다는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