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안녕하세요, 매서운 추위 속에서 한 주 잘 보내셨나요? 저는 작두콩차와 다크초콜릿으로 에너지를 보충하며 지냈습니다. 설 연휴 전에는 너무 더워서 놀랐는데 어느새 또 너무 춥고, 매 계절이 예외가 된 예측 불가능한 날씨가 얼떨떨하네요(여러분, Hiruko가 기후 난민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어디에 있든 따뜻한 열기를 보태주는 아이템들이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원래 이번 레터에서는 본격 《태양제도》 이야기를 하려 했는데, 3부작이 완간되며 1권 《지구에 아로새겨진》부터 읽기 시작한 분들이 꽤 있는 것 같아 레터 방향을 조금 수정하기로 했어요. 지난 레터 후기에도 다와다 요코를 처음 읽어보려 한다는 분이 있었고요(☺️). 그래서 오늘은 Hiruko 여행 3부작에 대한 전반적 소개와 1·2권 이야기를 풀어보려 합니다. 요즘 세 권을 손 닿는 곳에 두고 거듭 펼쳐보는 중인데 새롭게 발견하는 장면들이 많아요. 그중 한 장면을 소개하며 시작할게요. 눈이 많이 내리는 마을에서 자랐던 Hiruko의 어린 시절 회상입니다. 

Hiruko가 신었던 설피는 길 안내도 하고, 위험한 눈 밑 동굴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대화 기능도 갖추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프로그램이었다.

Hiruko가,

“설피, 눈 토끼는 어디 있니?”

하고 물으면,

“글쎄요, 다른 질문 없습니까?”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설피, 눈은 어째서 내리지?”

하고 물으면,

“답이 기니까 집에 가서 물어보세요. 안 그럼 얼어 죽어요.”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어서, 지구상에서 '스시의 나라'가 사라진 이유가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Hiruko의 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도시가 지방보다 낫다고 믿어서, ‘시골’이라는 단어에 부정적인 울림마저 있었다고 한다. 그런 나라였기에 자기 시골을 시골이 아니도록 하는 데 인생을 걸고,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른 남자가 있었다. 남자가 노력형 인간이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어떤 노력은 모두에게 피해를 준다. 남자는 고향 땅을 수도권의 일부로 만들기 위해 그 사이에 있는 산맥을 불도저로 밀어버리려고 했다. 그렇게 하면 공산권에서 불어오는 습도 높은 겨울바람이 산에 부딪혀 눈이 내리는 일도 없어질 것이라 여겼다. 그리하여 공금으로 대형 불도저를 구입해 산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는데, 무너뜨리는 일에 맛을 들여 멈출 수 없게 되었고, 그러는 사이 산이 계속해서 깎여나갔고, 지구온난화로 해수면이 상승하자 평평해진 섬 전체가 태평양에 잠겨버렸다. Hiruko는 자기 나라가 사라진 이유를 대강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고 했다. 나라가 사라졌다고 하면 뭔가 국가적인 비극처럼 들리지만 그건 아니고, 실은 좋아하는 산이 깎여나간 것이 분하다.

나라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산을 존경하지 않는 정치가는 용서할 수 없다!

⚫︎ 《지구에 아로새겨진》 30-32쪽 

처음 1권 《지구에 아로새겨진》을  펼치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차례였어요. 각 장이 '○○는 말한다'라는 제목으로 구성되어 있거든요. 다양한 인물들이 차례로 등장해 화자가 됩니다. 이 형식부터 벌써 다와다 요코다워요. 매 장마다 목소리를 옮겨 다니며 국적도 성향도 사고방식도 제각각인 이들을 어떻게 전부 감당(?)할 수 있는 것인지, 역시 변신의 귀재입니다.

여러 목소리가 포개지며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이 인물은 이런 성격이구나, 이런 과거도 있네, 이건 좀 의외네 하며 점차 정보가 쌓이지만 인상은 머물지 않고 변해갑니다. 한 장소가 빛과 대기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을 포착한 모네의 그림처럼, 다와다 요코도 인상주의 기법으로 인물을 덧그려가요. 이를 따라 읽다 보면 한 사람의 정체성이란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우연한 인상으로 덧칠된 풍경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작가가 여러 국적의 사람을 그릴 때 전형성을 완전히 배제하기보다 그 틀을 살짝 비트는 방식도 유쾌했어요. 당신은 인도인인데 소가죽 시계를 차냐는 질문에 매번 항변하기가 귀찮아서 그냥 시계를 인조가죽으로 바꾸고 증명서를 들고 다닌다거나. 등장인물들은 어떻게 보면 딱 전형적인 그 나라 사람들 같으면서도 미묘하게 어긋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태어난 땅, 특정 문화권의 영향 속에서 자라나지만 그것만으로 규정될 수는 없음을 보여주는 듯해요. 누구든 전형적인 면과 전형적이지 않은 면이 공존하고, 상황에 따라 그 함유량이 달라지는 게 아닐까요. 

사내 동료들과 최애 등장인물 뽑기를 했었는데 매 권마다 달라지는 게 재밌었어요. 사랑도 진로로 갈팡질팡하는 나누크에 대한 평이 유독 갈리더라고요ㅎㅎ. 여러분이 가장 끌리는 인물이 누구일지도 궁금합니다. 그럼 이제, 여섯 명의 언어 여행자를 소개합니다. 

"지구에는 문법이 없어. 인칭도 없어.
인간은 그런 지구의 일부."

◦ 출신국:  스시의 나라 

◦ 현 거주지: 덴마크 오덴세 

◦ 직업: 이민자 아이들에게 그림동화 구연

◦ 사용어: 판스카, 영어, 사라진 나라의 언어

◦ 특이사항

· 유럽 유학 도중 고향이 사라져 북유럽 도시를 표류하며 사는 중 

· 영어를 할 줄 아는 난민은 미국으로 추방되기 때문에 영어는 가급적 쓰지 않음 

· 일본 창세신화 《고사기(古事記)》에서 거머리의 형상으로 태어나 바다에 버려진 여자아이 '히루코'에서 온 이름 

 다와다 요코의 코멘트

Hiruko의 판스카를 쓸 때, '판스카를 일본어로 번역한다면 이런 문장이 되겠군' 하고 가늠해보며 썼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언어로부터 번역된 일본어'를 쓰고 싶었어요. 

"언어는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고,
죽음 너머를 보여줘." 


◦ 출신국:  덴마크 

◦ 현 거주지: 덴마크 코펜하겐

◦ 직업: 새싹 언어학자  

◦ 사용어: 덴마크어, 영어, 독일어

◦ 특이사항

· Hiruko의 판스카에 매료되어 여행에 합류

· 별명은 덴마크 왕자 

· 언어 오타쿠 ("나는 예전부터 어떤 음식이 맛있다는 걸, 일인칭 단수를 주어로 한 타동사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게 늘 불만이었어.") 

 다와다 요코의 코멘트

지금까지 여행하는 사람이나 자유롭지 못한 사람을 써왔는데, 그와는 정반대로, 이반 곤차르프의 소설 주인공 오블로모프나 셰익스피어의 햄릿처럼 극도로 나태한 사람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이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 중 하나였습니다. 덴마크 왕자 햄릿은 해야 할 일이 있음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우물쭈물해요. 그 이미지가 크누트와 겹쳐 보였습니다.


북유럽에 가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보며 대단히 풍족한 나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궁극의 사회복지에 도달한 나라, 어디로도 도망칠 필요가 없는 풍족한 나라. 연구비도 잘 나오고, 마음만 먹으면 자아실현이 가능한 젊은이(크누트)가 소파를 뒹굴며 텔레비전을 보는데, 우연히 태어난 고향을 상실한 여성(Hiruko)을 본다면…….  

"지금까지 성()의 페른베를 느끼며 살아왔어."


◦ 출신국: 인도 

◦ 현 거주지: 독일 트리어 

◦ 직업: 비교문화학 전공 대학생

◦ 사용어: 마라티어, 독일어 

◦ 특이사항

· 남성에서 여성으로 이사 중 

· 인도 여성의 전통 의상인 붉은 계통의 사리를 입고 다님 

· 굉장한 수다쟁이 

· 붐비는 열차에서 명상을 위한 '만원 열차 요가'를 발명 

"화장실이 되어보지 않으면 화장실의 기분을 알 수 없다, 라는 글을 읽고, 그렇다면 나는 화장실이나 수위실이나 구내식당과 같이 다양한 장소가 되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떤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며 실제로 사람은 어떤 장소에 놓이는 것이다."

◦ 출신국: 독일 

◦ 현 거주지: 독일 트리어 

◦ 직업: 마르크스 박물관 직원  

◦ 사용어: 독일어, 영어 

◦ 특이사항

· 진정한 노동자가 되기 위해 대학 진학을 포기한 후 다양한 직업을 경험함
· 일상 속 차별과 불평등을 예리하게 포착하는 편 ("노라는 말이죠, 보석을 채굴한 노동자의 노동조건이 인간적이었다는 증명서가 붙어 있지 않는 한 보석 같은 건 사지 않습니다.") 
· 나누크의 연인 

"나는 코펜하겐 골목에서 고독하게 핫도그 샌드위치로 배를 채우며 살아남은 인류야." 


◦ 출신국: 그린란드 

◦ 현 거주지: 불명 

◦ 직업: 유학생 

◦ 사용어: 이누이트어, 영어, 독일어, 일본어 

◦ 특이사항 

· 고향 그린란드 어촌의 물고기 멸종으로 덴마크 자선단체 통해 유학 옴

· 늘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며 길을 만드는 중 

· 스시집 아르바이트를 하다 맛국물 연구에 빠짐
· 2권 《별에 어른거리는》에서 독특한 성격 실험을 받음  

덧✱편집자 코멘트

나누크와 크누트는 둘 다 북극곰의 의미를 담고 있는 이름입니다. 나누크는 이누이트어로 북극곰이라는 뜻이고, 크누트는 스칸디나비아어권에서 흔히 쓰는 이름이지만 다와다 요코에게는 《눈 속의 에튀드》의 화자이자 실제 독일 동물원에서 살았던 곰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덴마크와 그란란드의 복잡한 역사적 관계처럼 두 사람은 닮은 듯 안 닮은 듯 깊게 연결되어 있어요. 

"희망 같은 게 무슨 도움이 되나.
운명의 바다에서 허우적댈 뿐이다."

◦ 출신국: 스시의 나라 

◦ 현 거주지: 프랑스 아를 

◦ 직업: 스시집 직원 

◦ 사용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사라진 나라의 언어

◦ 특이사항

· 일본 창세신화 《고사기(古事記)》의 '스사노오'에서 온 이름 

 다와다 요코의 코멘트

Susanoo는 일본에서 전형적인 인물입니다. 어머니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과 사회를 향한 증오와 울분이 쌓여 유럽에 와서도 여전히 억압된 상태죠. 그 감정이 언젠가 폭발하여 독재자로서의 권력을 획득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어요. 이런 면은 일본 신화의 스사노오와 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는 누이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와는 대조적으로 매우 폭력적인 성향을 가졌어요. 특히 여성에 대한 폭력성이 심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마타노 오로치를 퇴치하고 일본이라는 나라를 구한 영웅처럼 여겨지고 있어요. 하지만 본성에는 증오가 숨어 있기에, 그것이 폭발하여 드러났을 때 과연 어떤 통치가가 될 것인가, 그런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덧✱편집자 코멘트

《태양제도》 속의 Hiruko와 Susanoo가 사투리 배틀을 벌이는 장면이 굉장히 재밌습니다. 한국어로 옮겼을 때만 가능한 번역의 묘미를 즐길 수 있어요. Susanoo는 참으로 음침한 인물이지만, 만화에서 튀어나온 캐릭터 같은 면이 있어서 읽다 보면 정이 듭니다. Hiruko 못지않게 다와다 요코의 새로운 해석을 통해 "두 번째 생일"을 맞고 재탄생하는 인물이에요. 

원서 출판사 〈고단샤〉의 하드커버 표지.

참으로 영롱합니다. 

다와다 요코가 그려낸 우연과 상상의 오디세이, 모든 형태의 언어에 보내는 러브 레터··· 'Hiruko 여행 3부작'을 소개하는 말들입니다. 어쩌면 3부작인 게 부담스러워 장벽을 느낄 독자분이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세 권이 별개의 제목을 가지고 있듯, 《지구에 아로새겨진》 《별에 어른거리는》 《태양제도》는 독립적으로 느슨하고 깊게 연결된 이야기들입니다. 끝에서부터 읽든 중간부터 읽든 소화의 방식은 자유롭습니다. 다와다 요코가 말했듯 이 3부작은 여태 발표한 소설 중에서 서사적 성격이 강한 편이지만, 이 작품의 즐거움은 촘촘한 서사 구조라기보다 유쾌한 수다와 말장난, 그리고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신선한 상상력을 들여다보는 것에 있다고 생각해요. 

또 순서대로 읽는 경우는 다음 권까지 휴식기가 길어도 괜찮습니다. 저 역시 한 해마다 한 권씩 출간 준비를 했다 보니, 이 3부작의 존재를 깜박 잊고 사는 기간이 늘 있었는데 오히려 일 년에 한 번 만나는 친구들 같고 반갑더라고요-😸 아무튼 각자 나름대로 접근해도 좋게끔 구성된 작품이라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어요.  

다음은 1·2·3권의 주된 배경이 되는 도시와 Hiruko 일행의 이동 경로를 간략히 표시한 지도입니다. 책을 읽고 살펴보시면 좀 더 선명히 다가올 거예요. 

1권은 Hiruko 일행이 하나둘씩 모이며 여정이 시작되고, 2권은 흩어진 일행이 약속 장소인 병원에 모이기까지의 제각각 여행길이 펼쳐집니다. 3권은 다 함께 배 여행입니다. 간단히 1·2권의 관전 포인트를 소개하자면, 


먼저 1권 《지구에 아로새겨진》의 주된 무대는 독일 트리어와 프랑스 아를입니다. Hiruko와 크누트가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출발해 이 두 도시로 향하는 이유는 이야기 전개상 Hiruko의 고향 사람을 찾기 위해서지만, 트리어와 아를을 비밀스럽게 이어주는 키워드는 고대 로마의 유적입니다. 두 곳 모두 로마 시대의 공중목욕탕과 원형 경기장 유적이 있거든요. 일행이 서로를 처음 만나게 되는 곳도 몇 세기 동안의 세월을 머금은 돌로 이루어진 공중목욕탕 안입니다. 심지어 고대 로마 시대의 인물이자 문학의 주인공인 율리우스가 등장해 나누크를 노라가 있는 목욕탕에 데려다주기도 해요! 우연히 함께하게 된 이들은 고대 로마 유적이 숨 쉬는 거리를 산책하며 맛있는 음식도 먹고 수다도 떨면서 점점 친구가 되어갑니다. '옮긴이의 말' 속 표현이 매우 정확해요. "그야말로 노는 중." 


"포르타 니그라는 몇 번을 봐도 늘 압도된다. 싫든 좋든 그곳의 돌은 딱딱하고 무겁다. 물론 못이나 시멘트 같은 것은 일절 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관처럼 생긴 돌들이 몇백 년이 지나도록 흐트러지지 않는 것은 돌 하나하나의 무게 때문이었다. 이곳이 2세기에 시의 북문을 짓는 장소로 선정된 이래 쭉 특별한 장소였음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날 것 같다. 그것은 세상이 아무리 디지털화되어도 디스플레이로 환원되지 않는, 그곳에 오직 한 번밖에 존재하지 않는 무게였다."

⚫︎ 《지구에 아로새겨진》 66쪽

1권 출간 준비 당시 서면 인터뷰를 통해 다와다 요코에게  3부작을 집필하는 동안 가장 인상적으로 남았던 풍경이 무엇인지 물어본 적이 있어요. 그때 이런 답변이 도착했습니다: "마른 돌로 이루어진 고대 로마제국의 유적, 그리고 커다란 파도의 너울이 불안을 자아내는 듯한 해양이었습니다." 이 말을 여러분께도 공유하고 싶어요. '고정된 돌과 흐르는 파도'가 3부작을 아우르는 이미지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 답변을 받고 난 후, 언젠가 독일 트리어에 가서 고대 로마의 돌로 된 유적을 직접 보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Hiruko 일행은 거기서 무려 율리우스도 만나고 '해탈 피자'라는 것도 먹던데······ 과연 실현될 수 있을까요. 

다음으로 2권 《별에 어른거리는》의 테마는 영화입니다. 작가 인터뷰에 따르면 수평적 관계가 두드러졌던 1권과 달리, 2권에서는 Hiruko 일행을 수직의 세계로 보내고 싶었다고 해요. 그래서 보낸 것이 병원입니다. 무대는 덴마크 코펜하겐에 사는 한 괴짜 의사, 베르마의 병원이에요. 병원 지하에는 설거지 노동을 하는 청년 문문과 비타가 살고 있습니다. 이 병원의 비현실적이고 신비로운 기운은 1권에도 여러 번 언급되는,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드라마극 〈킹덤〉(원제: Riget)에서 모티프를 얻은 듯합니다(영화 스틸 컷은 다소 공포스러워서 생략할게요). 

"이 엘리베이터, 고장 난 거 아니야?"
"안에 망령이 타고 있어서 제멋대로 움직여요."
"망령이라니, 호러 영화인가?"
"그렇습니다. 호러 영화입니다."
⚫︎ 《별에 어른거리는》 126-127쪽 

2권의 관전 포인트는 다채로운 여행길입니다. 노라는 (또 도망쳐버린 연인 나누크 대신) 아카슈와 함께 병원으로 가는데, 그 과정에서 배도 타고 기차도 타고 오토바이도 타요. 특히 오토바이족과 함께 아우토반을 달리는 장면은 페이지 너머로 밤바람이 전해지는 듯해, 여러분도 그 기분을 느껴보시면 좋을 것입니다.


또 2권에만 특별 화자들의 등장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가령 1권에서 아들 크누트의 시선에서 밉상 캐릭터로 그려진 닐센 부인에게 항변의 장이 주어집니다. Hiruko 일행의 느긋한 기운이 싹 가시고 다와다 요코의 초기작을 떠올리게 하는 날카롭고 강렬한 장이에요. 사심을 고백하자면 저는 3부작 중 2권을 가장 좋아합니다. 여태 제가 소설에서 만나본 화자 중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가 등장하거든요. 2권 전체가 흑백 만화영화를 보는 기분이에요. 이런 대사도 나오고요. "우리는 모두 영화 속에 살고 있는 거라라." 

2권 출간 기념하여 만들었던 탑승권 굿즈도 소개합니다. 탑승권과 설명서를 편지 봉투에 담아, 지난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책과 함께 진열했었는데요. 국적은 기억나지 않는 한 외국인 독자분이 은행나무출판사 부스를 구경하다 표지 속 '요코 타와다'를 알아보고 잠깐 얘기를 나누었는데, 이 굿즈를 보고는 저에게 'This is a love letter!(러브 레터네요!)' 라고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

다와다 요코가 3부작을 집필한 2016년부터 2022년, 그리고 그 바통을 이어받아 한국어판을 준비한 2022년부터 현재 2025년까지, 지구 곳곳에서 참 여러 일이 있었습니. 요즘도 러시아 정부가 국제 사회의 제재를 피해 비밀리에 운영하는 그림자 선단에 의해 발트해의 해저 케이블이 훼손되었다, 미국이 그린란드 땅을 인수하겠다, 이민자의 이동을 '국경에 대한 침략'으로 간주하고 특정 국가 출신 난민 입국을 제한하겠다, 젠더 개념을 폐기하고 이제부터 성별 이분법을 따르겠다 등등의 눈도 귀도 아픈 소식들이 몰려오는 나날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이런 소식을 접할 때마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이 Hiruko 여행 3부작 속 친구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곤 해요. 텍스트를 통해 하는 여행은 한 대상에 대해 아주 구체적인 기억을 가지게 되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기억에는 분명 어떤 힘이 있을 거라고 믿어요. 그러니, 함께 읽어요! 1권을 다시 읽다 새삼스럽게 다가왔던 Hiruko의 대사를 옮기며 이번 레터를 마칩니다.


나는 일자리를 잡은 덕분에 비자를 받아 덴마크에 체류할 수 있었다. 어릴 때 텔레비전에서 ‘불법 체류자’라는 말을 들으면 먼 나라에서 온 나쁜 사람들 이야기 같았지만, 지금은 운 나쁘면 내가 곧장 ‘불법 체류자’가 되어버린다. 잘 생각해보면 지구인이니까 지상에 위법하게 체류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도 어째서 매년 불법으로 체류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일까. 이대로 가다가는 조만간 인류 전체가 불법 체류자가 되는 날이 오리라.

⚫︎ 《지구에 아로새겨진》 47쪽

편집하는 동안 원고 몰입을 위한 노래를 모아두곤 하는데, 이번 3부작을 완간하며 플레이리스트 콘텐츠로도 제작했어요. 독서에 음악이 필요한 분들이라면 한번 들어보세요. 공간에 틀어두어도 좋습니다. 



✱ 레터 일정

다음 [태양제도 레터] 3호는 2월 13일 (목) 오전 8시에 발송됩니다. 김연덕 시인과 함께하는 스폐셜 레터로, 은행나무출판사의 레터인 '은근한 레터'로 발송될 예정이에요. 마지막 4호는 본격적으로 구체적인 《태양제도》 이야기를 해볼게요. 


온라인 북토크를 합니다!

저와 김연덕 작가가 함께 다와다 요코 책 이야기를 나누는 라이브 북토크를 합니다. 편하게 놀러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