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는 뭐 하나 진득하게 한 적도 없었습니다.
JANUARY 23, 2025
원체 생각이 많은 타입이라 평소 머리속은 그야말로 뒤죽박죽입니다. 뭐 하나 시작하려고 하면 우선 첫 번째, 가능성부터 따져봅니다. 두 번째, 기회비용도 고려해야죠. 세 번째, 이유가 합당한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일을 시작해도 고민되는 부분은 끊이지 않습니다. 이걸 계속하는 게 맞는 건지,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달성할 수 있을지, 혹시나 다른 더 좋은 방법이 있었던 건 아닌지…

어렸을 때는 뭐 하나 진득하게 한 적도 없었습니다. 인생 콘셉트가 용두사미인가 싶을 정도였으니까요. 어떻게든 꾸준히 밀고 가지 않으면 죽도 밥도 안 된다는 당연한 사실을 깨닫고 난 후에는 루틴이라는 고마운 장치를 삶에 들일 수 있게 되었지만, 뭔가를 시작하기 전에 더 따져보게 되는 반사작용 또한 얻었습니다. 애초에 박약한 의지로 완벽주의를 꿈꾸다 보니 스스로를 들들 볶다 못해 지쳐버리기 일쑤였습니다. 나서는 성격도 되지 못해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도 유별나게 어색해하곤 합니다. (아무래도 이 성정은 평생 고쳐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사실 이 레터도 그런 성격을 좀 고쳐보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기도 하고요.

그러다 작년 커리어의 대전환을 겪으면서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부탁하거나 요청하지 않는 자유로운 입장은 반대로 이야기하면 아무도 나를 기다리지 않는다는 말이었습니다. 내가 직접 먼저 나서기 전까지는요. 주저하기엔 시간이 없고, 시도할 일은 산더미이고, 가만히 있으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마감인간은 발등이 타오르고 나서야 일을 시작합니다. 이쯤 되니 뭐라도 해야겠더라고요. 그쯤에 유튜버 Jon Youshaei의 TED Talk이 구체적인 시발점이 되어주었습니다. 간단히 정리하면, 결과가 어떨지는 아무도 모르니 일단 세상에 창작물을 내놓아야 한다는 내용이었어요. 당연하게도요.
재밌고 짧아서 가볍게 보기 좋아요. 클릭하면 영상으로 이동합니다.
다독이는 건 이쯤 되었으니 뭔가를 해보기로 합니다. 그러니까, 우선 작은 것부터요. 최근 푸실리 코르티 부가티(Fusilli Corti Bucati) 파스타를 선물 받았는데요. (좋아하는 걸 동네방네 떠들다 보면 이렇게 친구들이 살뜰하게 챙겨주곤 합니다) 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고 돌돌 말린 숏파스타입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뽀글뽀글 파마한 머리가 떠올라요.
파스타 뿐 아니라 에코백+각종 스파이스+초콜릿까지 챙겨준 천사 친구...💘
제일 맛있는 파스타로 해 먹고 싶은데 매번 해 먹는 파스타는 새 파스타 면에 식상해 보이고, 어떻게 요리해야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날까? 또 습관처럼 고민하다 퍼뜩 정신을 차렸습니다. 모르겠지만 일단 면을 삶자.

파스타를 삶으면서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찬찬히 되짚다 보니 시금치가 눈에 띄었습니다. 양이 좀 많아서 나물이나 무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페스토를 만드는 게 낫겠더라고요. 그래서 집에 있는 아무 견과류랑 올리브오일,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를 더해서 시금치 페스토를 만들었습니다. 

마침 파스타가 딱 알맞게 삶아져서 대충 석석 비벼 먹었는데, 오랜만에 페스토 파스타를 먹어서 그런가 맛있더라고요. 대단히 인상 깊었던 건 아니었지만 후딱 한 끼 해먹기 충분히 행복한 맛이었어요. 

그렇게 이래저래 해먹다 보니 지금은 벌써 저 파스타를 다 먹었지 뭐예요. 아껴두지 않고 야무지게 한 봉 다 먹었다는 점에서 조금 뿌듯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니까 일단 주저하지 말고 뭐라도 하는 게 안 하는 것보다 낫다는 말입니다. 아마 올해의 저한테 가장 필요한 말일 것 같아요.
시금치 페스토 파스타
재료 [1인분 기준]

푸실리 코르티 부가티 1인분

-시금치 페스토 (1인분 기준)-
시금치 한 줌 (약 40–50g)
잣 또는 아몬드 1큰술
마늘 반쪽 (생략 가능)
올리브오일 3큰술
레몬즙 반큰술 (또는 화이트와인 비네거)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 1큰술
소금
후추

(기타)
방울토마토
애호박

만드는 법

1. 푸실리 코르티 부가티는 패키지에 적힌 시간만큼 삶아줍니다.
2. 시금치 페스토의 모든 재료를 믹서기에 넣고 갈아줍니다. 뻑뻑하다 싶으면 올리브오일로 농도를 조절합니다.
3. 취향에 맞는 채소를 쫑쫑 썰어 올리브오일 두른 팬에 아작한 식감이 남도록 살짝 볶아줍니다.
4. 시금치 페스토와 채소, 삶은 파스타를 넣고 비벼주거나 팬에서 면수를 넣고 섞일 만큼만 볶습니다.
5. 후추를 뿌린 다음 접시에 담으면 완성! 
이 레터가 도착할 때쯤에 저는 호주에 있을 예정입니다. 올해 첫 여행을 처음 가보는 호주로 시작하게 되었는데요. 계획에는 없던 여행이지만 이왕 가는 거 그래도 최대한으로 재밌게 즐기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일단 따뜻한 나라로의 여행이라 여름인간은 이미 만족스러워요🌞)
님, 오늘의 파스타는 어떠셨나요?
너무 길었나요? 레시피가 부실했나요?
듣고 싶은 내용이 있나요?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다음 레터에 반영해 답장할게요.
제가 궁금하다면 아래에서 더 확인할 수 있어요!
R.DAM
artist.rda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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