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고을에서]


이슬


이재철 목사
 

제가 살고 있는 산중 마을은 행정적으로 거창군 웅양면에 속해 있어, 기상청의 일기예보는 웅양면으로 공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웅양면과 우리 마을 사이에는 직선거리로는 10킬로미터, 해발로는 약 300미터의 차이가 있어, 웅양면의 일기예보가 우리 마을과는 어긋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기온은 예보보다 늘 2-3도가 낮고, 비와 눈 예보도 자주 어긋납니다. 일기예보를 믿고 나갔다가 낭패를 당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낙향하여 여섯 번째 여름을 맞으면서, 기상청의 일기예보와는 상관없이, 그날 비가 올지 여부를 분별하는 제 나름대로의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새벽에 나가 꽃과 풀잎에 이슬이 맺혀 있으면 흐린 날이라도 거의 비가 오지 않고, 맑은 날인 것 같지만 이슬이 없으면 대부분 비가 내린다는 사실입니다. 비가 오지 않는 날에는 이슬이 대신 대지를 적셔 주시만, 비가 내릴 경우에는 구태여 이슬까지 출동해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구글링을 해보니, 이슬의 이런 현상이 과학적으로 설명되어 있었습니다. 
자연은 그 자체가 온통 신비덩어리입니다.

[지금 이 책]



옥토는 어떤 곳입니까? 창세 이래 처음부터 옥토는 없습니다. 자기 부인을 통과한 땅이 옥토입니다. 땅을 뒤집어엎습니다. 거기에 있는 돌을 다 골라냅니다. 나무뿌리가 박혀 있으면 아무리 깊더라도 뽑아냅니다. 이처럼 제할 것을 다 제하고 자기 부인을 거치고 나서 남은 것이 옥토입니다. 옥토만이 자연의 법칙을 따를 수 있습니다. 씨를 뿌리면 옥토가 씨를 먹습니다. 그리고 싹이 나고 열매가 맺는 자연의 법칙을 충실하게 이행합니다. 참된 교인도 자기 부인을 선행하는 사람입니다. 왜입니까? 자기 부인을 행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참된 교회의 크기는? 中) 

한국 교회는 에클레시아를 '교회'가 아니라 '행회'(行會)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행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행함이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 않습니까? 그런데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면, 그 믿음이 진짜라면, 그 구원이 진짜라면 구원받은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행함입니다. (2. 교회인가 행회인가 中)

인간의 역사에는 두 줄기 흐름이 있습니다. 한 줄기 흐름은 소돔의 흐름입니다.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돔의 흐름은 항상 화려해 보입니다. 멋집니다. 그 속에는 환락이 있습니다. 쾌락이 있습니다. 번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흐름을 좇아가다 보면 마지막은 파멸입니다. 또 하나의 흐름은 헤브론의 흐름입니다. 미천해 보입니다. 보잘것없어 보입니다. 별 볼 일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종말에 가면 평화의 터전이 일구어지고 하나님과 영원한 관계가 확립됩니다. (3. 헤브론인가 소돔인가 中)
[오후의 정원]


6년 만에 다시 선 강단

이덕주, 전 감신대 교수


은퇴 후 받은 은혜 가운데 가장 큰 것은 회개와 반성이다. 현역 때 몰랐던 나의 한계와 실수, 설혹 알았다 하더라도 권위와 자존심 때문에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내 오류를 깨닫고 '그때 왜 그랬을까?' 잘못을 시인하고 반성할 때가 많다. '다신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하면서. 말씀을 읽다가도 그런 깨달음이 온다. 말씀이 새롭게 읽혀진다. 은퇴 후 읽으니 그 뜻이 깊고 오묘하다. '아! 이 말씀이 그런 뜻이었구나' 무릎을 치며 감격한다. 그러면서 '왜 이제야 깨우쳐 주시는 거야? 현역 때 알았으면 보다 멋진 설교를 했을 텐데' 아쉬움도 느낀다. 늦게나마 깨우쳐 주심에 감사하며 '새로 읽힌' 말씀을 노트에 적는다. 내가 말씀을 읽는다기보다 말씀이 나를 읽는다. 말씀에 읽혀진 나의 적나라한 모습이 드러나면서 회개의 농도가 짙어졌다.

그렇게 깨달은 '말씀 노트'가 어느 정도 채워지자 불러 주는 전화가 왔다. 주일 설교와 부흥회, 사경회, 어떤 때는 '심령 부흥회'란 현수막을 걸고 강사로 초청한다. 은퇴 후 '피동태'로 살기로 작정한 터라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부르면 간다'. 그러다 보니 현역 때보다 더 자주 설교할 기회가 생겼다. 그랬다. 말씀이 먼저였다. 말씀을 넣어 주시고 나중에 전할 기회를 주셨다. 말씀을 들려주신(깨닫게 하신) 다음 들을 귀를 보내 주신다. 말씀이 사람을 모은다. 공간과 환경을 탓할 일이 아니다. 제대로 된 말씀이면 들을 사람을 보내 주신다.

설교만 그런 것이 아니다. 강의도 그러했다. 은퇴 후 현역 때 강의한 내용을 돌아보니 허점과 오류투성이다. 배우자마자 곧바로 전하다 보니 그랬을 것이다. 내가 깨달은 것보다 '남의 말'을 전하기에 급급했던 현역 시절이었다. 설익은 강의를 들어야 했던 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다. '그때 왜 이 자료가 눈에 띄지 않았을까? 이 사건의 신학적 의미는 그게 아니었는데' 아쉬움과 후회가 밀려온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은퇴하고 학교를 떠난 처지에…

그러던 차에 지난해 새로 총장으로 선출된 후배 교수로부터 전화가 왔다. “축하한다”는 내 말에 그는 다짜고짜로 "형님, 학교에 좀 나오세요" 했다. 강의를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학교를 은퇴하면서 후배와 제자들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서 강의뿐 아니라 학교 행사에도 얼굴을 비치지 않았던 나였다. '산뜻하게' 떠나는 선배의 모습을 보여 주겠다는 결기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총장에게 강의하러 나가기 어렵다고 하자 그는 언성을 높이며 "학생들이 원해요!" 하였다. 총장 말이 정치적인 멘트인지 알 수는 없으나 "학생들이 원한다"는 말에 주춤했다.

총장 전화는 나의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 비록 '은퇴한'이란 수식어가 붙긴 하지만 나는 여전히 목사요 교수로 불린다. 목사와 교수는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가? 양 없은 목자가 없고 학생 없는 교수가 없다. 학생이 교수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교사가 학생을 위해 있는 것이다. 학생이 부르면 가야 하는 것이 교수의 사명 아닌가?

그렇게 해서 금년 봄 학기 학교 강단에 섰다. 현역 때 연구 부족으로 하지 못했던 '한국 역사와 기독교'란 과목으로 강의했다. 그렇게 6년 만에 다시 선 강단에서 첫 시간, 은퇴한 노교수의 강의를 듣겠다고 강의실을 찾아온 학생들을 보는 순간,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지. "거룩한 곳이니 네 발의 신을 벗으라"는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목회환경이 점점 더 어려워 가는 현실에서도 목회자의 꿈을 품고 신학교를 찾아온 학생들의 진지한 눈빛을 보는 순간, 울컥 감동이 밀려왔다. 현역 때 느낄 수 없었던 두려움이자 감동이었다.

강의실의 학생들이 소중했고 그들의 발제 또한 진솔했다. 50년 후배 신세대(MZ) 학생들의 기발하고도 창의적인 질문과 토론에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이란 공자님의 가르침을 몸으로 경험했다. 현역 때 저질렀던 실수와 오류를 깨닫게 해주신 것만도 큰 은혜인데 그것을 만회하고 보완할 기회까지 주시니 실로 "내 잔이 넘치나이다"이다. 

[책 속에 넣어둔 편지]


설명을 해주세요

송민규 주임, 홍성사 마케팅팀


저는 모태신앙입니다. 성경의 언어, 예배 언어 등 기독교 문화는 저에게 당연한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초신자들은 저에게 다른 종족과도 같았습니다. 언제나 초신자들의 질문은 목사님을 당황시켰고 공동체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게 했습니다. 그렇게 적응하지 못하고 떠난 초신자들이 얼마나 될까요? 교회가 초신자를 이상하게 느끼듯 초신자에게도 교회는 이상한 집단일 수 있습니다. 
누가 배려할 것인가? 누가 설명해 줄 것인가? 교회는 많은 경우 초신자들을 교회에 적응하게끔 합니다. 많은 교인들에게 ‘체화’되어 있는 그 문화를 전하지요. 체화되기까지 오랜 시간 걸렸기에 초신자들이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설명을 해야 합니다. 마치 신입사원이 들어왔을 때 선배가 설명해 주듯, 이등병이 선임들에게 군대 생활을 배우듯이.
교회 안에 여전히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이 있습니다. 부모에게 종교생활을 배웠을 뿐 신앙생활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동일하게 설명해야 합니다. 


《다시 성경을 찾아줘》의 저자 정석원 목사님은 청소년 사역에 많은 시간을 들여 헌신하셨습니다. 청소년 아이들을 만나고 그들과 대화하며 그들의 언어를 이해했습니다. 목사님과 만나서 대화할 때에 목사님이 얼마나 청소년 사역에 진심인지, 그들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신앙이 잡혀 있지 않은 청소년들이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질문을 하는지 배웠고 그들의 질문에 맞게 책을 써 주셨습니다. 현장에서 목사님의 책에 대한 경험을 물을 때마다 “읽기 쉽고 편해요”, “이제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어떤 말씀인지 알 것 같아요” 등 실질적인 고민과 대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다시 성경을 찾아줘》가 현장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이 책은 ‘어떻게 성경이 쓰여졌는지’, ‘왜 성경을 읽어야 하는지’, ‘어떤 내용이 성경에 담겨 있는지’, ‘우리는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명료하게 설명합니다. 성경에 대한 여러 명제들을 다각도로 설명하는 《다시 성경을 찾아줘》를 추천하며,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 당연해지기까지 많은 교회들이 친절하게 설명하기를 바라 봅니다.
[읽기의 순간들]



강규연, 싱어송라이터·EP 앨범 〈이야기〉

지금은 신앙적 방황기이다. 20대 후반에 예수님을 만나 30대는 온전히 교회를 섬기며 보냈고, 아이러니하게도 예배를 더 알고 싶어 들어간 대학원이 오히려 방황으로의 전환점이 되었다. 지금은 예배와 교회로부터 멀어져 있다. '왜지? 어째서?'로 시작된 질문은 '하나님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 걸까?'라는 의문으로 이어져, 아직까지도 해소되지 않은 채 머물러 있다. 
방황을 시작하면서 자주 '그때의 나'에 대해 생각한다. 당시에는 예수님을 향한 열심으로 어떤 일도 견뎌 낼 수 있는 믿음으로 살고 있다 생각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저 단단한 우물에 둘러싸여 있는 개구리에 불과했던 것 같다. 스스로 하나님을 향한 편견, 섬김에 대한 고정관념이라는 우물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생각에 갇힌 채 하늘을 바라보며 발버둥질하였다. 그러다 전혀 가까워지지 않는 하늘에 지쳐 버렸고, 지금은 우물 안에서든 밖에서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 기분이다.
그런데 《너는 주의 완전한 딸이라》 이 책은 '단단한 우물'에 대해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했다. 책의 주된 내용은 가부장적 교회 문화 안에서 어떻게 완전한 '딸'로서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한 이야기지만, 나에게는 완전한 '자녀'로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다가왔다. 이 책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예수님은 '자유'야! 그 어떤 틀도 필요가 없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은 그 우물에서 빠져나오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성격상 어느 정도 정해진 틀 안에 있기를 좋아하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자유에 다다를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은 없다. 다만 은혜란 나의 어떠함과는 상관없이 거저 주어지는 것이라고 하니, 언젠가 그 은혜가 우물에 가득 흘러넘쳐 스스로 발버둥 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우물에서 빠져나와 하늘에 가까워지는 그 날이, 어떤 틀에도 갇히지 않고 ‘자녀’라는 자유를 온전히 누리는 믿음이, 내 안에서 넘쳐나는 날이 하루라도 빨리 왔으면
좋겠다.
[가까이 또 멀리]

자신의 어리석음을 아는 사람들을 지혜자라고 부른다. 주 앞에서 우매함을 깨닫는 자, 자신의 죄가 드러남을 알고 사죄의 은총과 지혜를 구하는 자가 지혜자인 것이다. 바라봄은 기도의 다른 표현이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바라보는 자이다. 
새 책 나옵니다


𝓃𝑒𝓌 파브르의 안경(곤충이라는 작고 오묘한 세계)
곤충들은 언제나 진심을 다한다. 그들은 빛을 사랑하고 고생스러울지라도 소소한 행복을 찾아가며 사랑을 표현할 줄 아는 존재들이다. 인류에게 《곤충기》를 남기며 생명의 경이로움을 선사한 '파브르'의 안경 너머 곤충이 그리는 생의 장면과 노래를 담았다.    
성영은 지음 | 2024년 10월 출간

𝓃𝑒𝓌 말씀을 듣다(개역한글 성경-신약 1)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홍성사 오십 해를 맞이하여 성경을 출간한다. 핸디한 분권 성경이며, 그중 처음 출시되는 신약1은 사복음서로 엮었다. 이재철 목사가 낭독하는 성경말씀을 들으며 함께 읽을 수 있도록 성경 각 권 및 장별로 QR코드를 수록하였다. 
홍성사 펴냄 | 2024년 9월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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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 도서회원
쿰: 이화정

홍성사의 벗이 되어 주신 신규 회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좋은 책으로 보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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