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뻥튀기 종류가 이렇게 많아요?”

“이거 언제부터 하셨어요?”

 

오전 필라테스 수업에 가는 길이었어.

나이가 지긋해 보이시는 사장님이 길가에 세운 트럭 위에서 뻥튀기 봉지들을 정리하고 계셨고,

그 옆에서 어떤 아저씨가 이것 저것 물어보며 말을 붙이고 있더라고.

‘역시 동네라 그런지.. 나름 정겹네’ 생각하며 지나가려는 찰나, 뒤 이어 이런 말이 날아와 귓속에 꽂혔어.

“고등학교 때 공부 잘했어요?”

 

아니, 질문의 의도가 뭐야? 의도를 떠나서 이건 너무 무례한 거 아닌가.

마스크 속에서 반사적이고 신경질적인 ‘뭐라는거야’를 내뱉으며 나도 모르게 뒤돌아보니, 트럭 위 사장님은 별 대꾸없이 하던 일을 계속 하고 계시더라.

이래서 내가 넉살이니 한국인의 정이니 동네사람끼리니, 처음 보는 사람과 살갑게 말 섞는 걸 경계했던 거야. 방심하는 새에 여차 하면 깜박이 없이 훅 치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으니까.

얼마나 오래 전인지도 가물 하지만, 예전에는 가게에서 물건을 사거나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이모, 삼촌, 언니’를 붙여가매 조금만 깎아달라느니 음식이 너무 맛있는데 어떻게 만드셨냐는 그런 넉살을 곧잘 부렸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인가 모든 호칭은 ‘사장님’으로 통일하고, 딱 소통에 필요한 말만 하게 되었던 것 같아.

사람 사는 냄새를 풍기겠다고 내 말씨에 ‘정’을 섞었다가는 서로를 침범할 위험이 커지니까.

그럴 바에는 ‘예의’로 거리를 두면서, 차라리 무심으로 미온하게 서로의 영역을 지키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었어.

 

 

“미워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을 귀여워하고 사랑해버려요.”

‘뻥튀기 사건’이 있고 나서 얼마 후, ‘서울체크인’에서 이옥섭 감독이 하던 말을 우연히 보고 그 클립을 여러 번 돌려보았어.

미국 여행 중 만난 한 여자분이 버스 안에서 매니큐어를 막 칠하고 있었나봐. 그게 냄새 나고 너무 싫었는데, 만약 저 캐릭터가 본인 영화의 주인공이었다면 너무 사랑스럽게 그리고 싶었을 것 같았다는 거야. 그런 관점으로 바라보니 무례하고 싫은 사람들도 그냥 귀엽고 사랑스럽더라며.

사실 진짜 '싫고 미운' 사람이라기보다는 조금 더 가벼운 영역에서 무례한 타인이라 가능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요지는 ‘연민’을 가지고 서로를 바라보는 태도인거지.

 

버스 안에서 매니큐어 냄새를 풍기며 손톱을 물들이는 사람이나, 굳이 굳이 장사하는 트럭 옆에서 미주알고주알 자기 할 말을 떠드는 아저씨나. 그냥 보았을 땐 다른 사람의 선은 안중에도 없는 무례한 사람들인거잖아.

그런데 어짜피 이러나 저러나 서로 살 부비며 살아야 할 세상이라면 조금만 더 귀엽게 봐주자는 그런, 품이 큰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니 조금 뭐랄까. 내 한 몸 조금의 생채기도 나기 싫어서 거리 두고 팍팍하게 굴던 스스로가 조금은 재미없게 느껴졌달까.  

 

남에게 피해주기 싫다며 예의를 차렸던 건, 사실 그보다는 내 피해를 조금도 허용하고 싶지 않았던 이기심이었는지 몰라.

누군가 내가 가진 차선을 조금이라도 넘을까 전전긍긍, 살짝이라도 밟을라치면 가시를 바짝 세워서는.

‘고등학교 때 공부 잘했냐’ 라는 질문에 반사적으로 눈을 뾰족하게 세우고 돌아봤던 것은, 아마 결국엔 그냥 내가 듣기 싫고 거슬려서 였을꺼야. 조금 더 들어가보면 ‘뻥튀기 장사’와 ‘학력’ 그 사이, 이미 나 역시 가지고 있는 편견에 의해 무례하다 느낀거였을거고. 어쩌면 사장님은 속으로 ‘으이구 쟤 또 여기 와서 저러네’ 하며 그 분을 (연민 섞인) 귀여움으로 바라봤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무례함이 치고 들어 온 침범의 영역을 ‘으이구’ 하며 받아 넘겨주거나, 아니면 한 걸음 더 나아가 용인된 경계선 사이에서 핑퐁을 해주는 것.

그게 어쩌면 정말 큰 의미에서의 ‘정’일 수 있겠다, 생각했어.

‘내가 피해 입기 싫어요’ 라는 진짜 속내를 ‘예의’라는 허울 뒤에 숨기고 몸을 사리는 것보다야, 그 순간 얄궂은 상대방의 장단에 어느 정도 춤춰줄 수 있는 태도가 '겨우 이거 가지고 생채기 날 일은 없지' 하는 자기선언이 아닐까. 너와 나를 다 품는 섬세하고 배포 있는 ‘정’의 영역. 그리고 그게 결국 서로들의 사이에서 살다 갈 운명이 할 수 있는 가장 ‘사람답게’ 살다 가는 태도일지도.

 

어쨌건,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맛있는 식당에 가도 ‘이모, 언니’ 소리가 도저히 나오기는 힘들겠지만, ‘사장님’은 부르되 ‘음식이 정말 맛있어요’ 아래 ㅇ 받침 하나 정도는 넣어볼 수 있는 정으로 하루를 살아볼래. 그러다가 상대방이 내 영역의 빗금을 살짝 밟더라도 여유있는 너스레를 떨어가며, 조금은 서로의 선을 잘 타는 삶을 살아볼래.  

에게 내가 가진 가장 좋은 정들을 골라서 보내 본 오늘의 마음이 가닿길 바라며, 우리는 다음주 일요일에 또 봐!

남은 오늘도 다정한 하루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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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지난 주에 신청해준 향은 화요일(6/21)에 출발할 예정이야! 보내면서 문자할께!

p.s 2. 근데 이렇게 구구절절 했어도 사실 아직 나 ‘뻥튀기 아저씨’를 귀여워 할 만큼 품이 크진 않다는 걸 에게만 고백해…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