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였나, 엄마 뻘의 지인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아드님과 외출해서 불가리 향수 시향을 해보셨는데 너무 좋으셨다고. 그래서 어머님께 이를 말씀드렸더니 '넌 참 부르주아 취향이야'라고 답하셨다고. 불가리 브랜드 그 자체는 제품군에 따라 부르주아적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향수는 글쎄다. 아마 그 어머님께서는 '불가리'라는 이름에 초점을 두신 것 같다. 향수의 가격, 니치함과는 별개로 나는 그 때 '부르주아적'이라는 표현이 일상적으로 쓰이는 것을 처음 들었다. 부르주아란 자고로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 그리고 소련의 역사와 관련이 있는 단어이건만 이런 거대한 개념을 일상에 끌고 들어오시다니.
몇 달 전에 이 표현이 머릿 속에 콱 박힌 일이 있었다. 우연히 인스타그램을 넘기다가 어떤 분이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에 대해 쓴 글을 읽었다. 정확히 어떤 내용이었는지, 누가 쓴 글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박찬욱 감독은 부르주아 취향'이라는 표현을 통해 글쓴이를 추정하고 있다. 영화를 보기 전이었지만 '부르주아 취향'이라는 리뷰를 남긴 점이 인상적이었다. 몇 주 뒤 극장에서 오프닝 시퀀스와 동시에 과몰입이 시작되었는데 '박찬욱 감독의 부르주아 취향'이 무엇인지 너무 알게 되어버렸고, 심지어는 이 올드한 부르주아 취향에까지 과몰입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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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김통깨 라면을 먹었다. 일 년 중 라면을 먹는 횟수를 열 손가락으로 충분히 셀 수 있는만큼 새벽에 라면을 먹는 일은 2번 정도 있을까 말까한 연간 행사다. 라면에 생일에 받은 위스키를 온더락으로 마시며 박찬욱 감독의 <박쥐>를 봤다. 하얀 계단과 복도가 얽혀있는 초반부의 미장셴에 감동하고나니 과몰입하게 만드는 부르주아 취향의 이층집이 나왔다. 부산에 위치한 2층짜리 적산가옥 1층에는 '행복 한복'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한국적으로 피곤한) 한복집이 있다. 한복집 2층에서는 수요일 저녁마다 사람들이 모여 중국 게임인 마작을 하고, 보드카를 마시는데, 레코드 플레이어에서는 한국의 가요가 나온다. 눅눅하고 낡았지만 인테리어 시공 당시에는 아주 세련된 집이었음이 분명한 곳에서 다양한 국적의 물건들이 만나는 것은 20세기 중후반 우리나라 중산층 문화를 연상시킨다. 일제, 미제는 좋은 품질의 다른 이름이었다. 남들은 잘 모르는 것을 일상적으로 즐기고(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실상 인류 역사 내내 이랬다), 음악과 음악을 재생하기 위한 기기를 구입한다는 것. 낡고, 현 시대에 그닥 잘 어울리지는 않더라도 이는 부르주아적 일상의 지향점을 보여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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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결심>도 예외는 아니다. 서래의 20세기 아파트는 청록색의 화려한 벽지로 꾸며져 있다. 키친/다이닝룸과 리빙룸이 나누어져 있으며, 기도수는 진공관 스피커로 말러의 음악을 듣는다. 그는 개차반이지만 말러리안이다. 아날로그 기기로 듣는 말러의 음악, (트로트가 아닌) 가요, 낡았지만 장식적인 요소가 곳곳에 보이는 집. 급격한 고도성장기를 살아가는 부르주아의 취향이며, 작품 속에 드러난 박찬욱 감독의 취향이다. 박 감독의 스크린 속에서 이런 오래된 공간들은 '낡음'보다는 '일상성'이 돋보인다. 감독 자신이 애정을 가지고 보낸 시간이 쌓여 있는 곳이기에 그러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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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감독은 지난간 것, 그러니까 자신이 거쳐온 시공간에 대한 애정이 깊은 사람이다. 자신이 거쳐온 일상, 기쁨과 슬픔, 열정적인 밤과, 나태한 아침을 모두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에 이러한 공간을 보여줄 수 있다. 우리 세대는 자신의 기억과 경험에 대해 애정을 가지되 궁상맞지 않은 어른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박찬욱 감독은 우리 시대의 어른이다. 나의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을 자비에 돌란에게 빚 지었다면, 20대는 박찬욱 감독에게 의지하고 싶다.
물론 박찬욱 감독의 타고난 배경이 그가 궁상을 피하게 해주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엔 다양한 종류의 궁상맞음이 있다. 모든 세대가 나름의 어려움을 가지고 있지만 '내가 제일 힘들었어'라며 그 당시에는 나름 잘 먹고 잘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매년 보릿고개를 지나온 듯이 말하는 인간들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마주치게 된다. 자신이 살아온 공간이 지금의 세련됨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무조건 촌스러웠던 곳으로 인식하는 사람들도 있다. 많다. 세련된 것과 애정을 가지는 것은 다르지만 애정은 촌스러운 것으로부터 그 나름의 매력을 뽑아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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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감독의 애정은 그가 과거를 기억하고, 세상을 바라보고, 일상을 즐기는 방식이다. 올드할지언정 늙지 않는다. 모두가 젊음과 새 것만 찾으면 어떡하겠나? 누군가는 자신의 세대가 가진 것을 새로 배운 것과 적절히 섞어서 보여주어야 되고, 그것이 윗 세대가 아래 세대에 보여줄 수 있는 세련됨의 방식이자 선물이다. 이러한 세련됨에서 나오는 여유는 부르주아적이라고 비판 아닌 비판을 받을지언정 윗 세대만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이기에 너무나도 소중하다. 김기영 감독의 <하녀> 속 짓다만 2층집 만큼이나 귀하고, 김기영 감독이 화재로 목숨을 잃은 자택만큼 기묘하다. 내 집 마련은 커녕 당장 취업도 어려운 내게 박 감독의 이런 취향은 지금보다 여유롭던 과거를 조명하며 힘을 쭉 빠지게 한다. 그러나 그가 보여주는 시간의 축적과 애정, 여유는 묘한 위안을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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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영화는 시니컬하고, 잔인하다. 인과응보의 섭리를 순순히 따라간다. 섭리를 따라갈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심리를 개성 있고, 촘촘하게 보여준다. 속고, 속이고, 복수하고, 속죄하고, 후회한다. 러닝타임을 나타내는 숫자가 얼마나 크던간에 그 숫자는 뾰족한 순간들로 기억에 남는다. 그러나 그의 시니컬함의 핵심은 인간과 세상에 대한 애정이다. 그렇기에 그는 '행복'을 남발하지 않는 어른이다. '행복'이라는 단어는 듣기만해도 피곤하고 머리가 아픈데, 그는 애정이 많기에 '행복'의 피곤함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렇기에 함부로 이런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 세대는 더더욱 그가 필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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