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차장에게
답장이 오는 데 세 주가 걸렸네.
두 주쯤 지나자 내가 보낸 편지를 다시 열어보게 되더군. 다시 읽으니 몇 문장은 자네를 돕고 싶은 사람보다 자기가 옳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은 사람이 쓴 것처럼 보였네. 오래 조언하는 일을 하다 보면 그 둘을 구분하기 어려워지는 모양이네.
그래서 이번에는 자네가 보내온 사진과 조사 내용을 더 천천히 살펴보았네. 어디에 다녀왔는지보다 무엇을 보고 돌아왔는지가 궁금했거든.
많이 보고 왔더군. 매장마다 제품을 구분해 놓았고, 가격과 제본 방식도 정리했네. 종이의 질감과 펼쳤을 때의 느낌까지 적어둔 걸 보니 손으로 만져가며 꼼꼼히 살폈더군. 그런데 다 읽고 나서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네. 노트에 대해서는 많이 알게 되었는데, 그 노트를 쓸 사람에 대해서는 별로 알게 된 게 없었거든.
노트를 만드는 사람이 노트만 보고 돌아온 것이지. 자네도 회의를 마치고 보니 첫 출시 때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고 했지. 나는 그 대목에서 오히려 마음이 놓였네.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면, 이번 조사가 헛수고는 아니었을 테니까.
매장에서 제품을 살피는 일은 필요하네. 어떤 가격에 무엇을 제공하는지, 사람들이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형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지. 다만 그것만으로는 다음 제품을 만들어야 할 이유까지 알기 어렵네.
잘 팔리는 노트는 이미 누군가 내놓은 답 아닌가. 그 답을 자세히 살피다 보면 종이와 표지, 크기와 구성은 보이네. 그런데 그 답이 나오기 전에 어떤 질문이 있었는지는 좀처럼 보이지 않지.
누가 어떤 일 때문에 불편했는지. 무엇을 해 보려다가 자꾸 멈추었는지. 그 노트는 그 사람의 하루에서 무엇을 바꾸려 했는지.
나는 자네가 그 질문까지 가지고 돌아왔으면 했네.
박 차장.
자네 브랜드가 내건 말에 대해 한번 이야기해야겠네. 'Thinking for Working'.
일하는 사람이 더 좋은 생각을 하도록 돕겠다는 말이지. 좋은 말이네. 그런데 노트를 만드는 회사라면 거의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네. 지금은 그 말이 자네 브랜드만의 약속이라기보다 노트라는 물건의 일반적인 설명에 가깝네.
자네가 이번 편지에 이렇게 썼지. 생각을 돕겠다고 시작했는데, 마지막에는 다른 노트보다 무엇이 나은지를 설명하고 있었다고. 나는 그 문장이 지난 출시를 돌아보는 중요한 단서라고 생각하네. 제품이 필요한 이유가 비어 있으면, 눈에 보이는 차이가 그 자리를 채우게 되거든. 그러니 먼저 물어야 하네.왜 하필 자네들인가. 어떤 장면을 보았기에, 어떤 일을 겪었기에 일하는 사람의 생각에 마음이 갔는가.
그 이유가 선명해지면 누구를 먼저 도울지도 구체적으로 정할 수 있겠지. 그리고 실제로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었을 때, 'Thinking for Working'은 자네 브랜드의 약속으로 받아들여질 걸세. 그렇다면 시장조사의 출발점도 달라져야 하네. 문구점에 어떤 노트가 있는지를 보기 전에, 사람들이 일하면서 언제 생각이 막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지.
회의에서는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끝나고 나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있네. 자료는 잔뜩 모았는데 첫 문장을 쓰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고 메모해 두었지만 며칠 뒤에는 무슨 뜻인지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
그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모두 같은 노트일까.
어떤 사람에게는 생각을 마음껏 펼칠 여백이, 어떤 사람에게는 흩어진 생각을 다시 살펴볼 순서가 필요하겠지. 또 어떤 사람은 적어둔 생각 하나를 오늘 할 일로 바꾸는 데 도움이 필요할 걸세.
생각을 돕는 도구를 만들고 싶다면, 사람들이 무엇을 적는지만큼 적은 다음에 무엇을 하는지도 보아야 하네. 지난 출시가 기대에 못 미친 이유를 제품에서 찾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네. 제품은 눈앞에 있고, 바꿀 수 있는 부분도 분명하니까. 표지를 바꾸면 새로워지고, 크기를 줄이면 휴대하기 편해지지. 하지만 사람들이 사지 않은 이유가 표지에 있었는지, 크기에 있었는지, 아니면 그 노트가 자신에게 왜 필요한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인지는 따로 물어야 하네.
마음이 급할수록 손댈 수 있는 것부터 고치게 되네. 나도 그러네. 다만 손댈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가장 먼저 고칠 것은 아닐 수 있지.
박 차장.
이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내 책상에 놓인 노트 한 권을 펼쳐보게 되었네.
처음 몇 장은 제법 단정하네. 날짜도 있고 제목도 있지. 그런데 조금 넘기면 글씨가 커졌다 작아졌다 하고, 문장 옆에 화살표가 붙고, 한가운데 엉뚱한 그림도 있네. 중요한 것에는 별을 그려놓았는데, 별이 너무 많아 무엇이 중요한지 모를 페이지도 있더군. 남에게 보여주기에는 민망한 노트네.
그런데 정리된 문서보다 그 페이지에서 당시의 생각이 더 잘 떠오를 때가 있네. 왜 그 문장을 지웠는지, 어디에서 막혔는지, 어떤 말과 어떤 말을 이어보려 했는지 보이거든.
내게 노트는 완성된 생각을 보관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아직 모양을 갖추지 못한 생각을 잠시 꺼내놓는 곳이기도 하네. 머릿속에서는 그럴듯했던 생각이 적고 나면 빈약해 보이기도 하지. 반대로 별것 아니라고 쓴 말 옆에 다른 말을 붙이다가 생각이 자라기도 하네.
적었기 때문에 비로소 다음 생각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 그렇다고 종이가 디지털보다 낫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닐세. 나도 검색하고 공유해야 할 것은 디지털 도구에 적네. 화면에 그림을 그리며 생각하는 사람도, 소리 내어 말할 때 생각이 풀리는 사람도 있겠지.
어느 도구가 우월한지를 정한다고 자네 브랜드가 선명해지지는 않네. 종이를 고른다면 그 사람에게 종이가 필요한 이유가 있어야 하네. 우리가 종이 노트를 만들고 싶다는 이유만으로는 부족하지. 내 노트를 넘기다 하나 더 알게 된 것이 있네.
생각을 떠올리는 것도 어렵지만, 떠오른 생각을 이어가는 일은 더 어렵더군. 그 생각을 붙잡고, 다른 생각과 엮고, 틀린 데를 고치고, 누군가에게 설명하고, 마침내 작은 시도로 옮기는 일 말일세.
회의에서 모두 고개를 끄덕였던 생각이 다음 회의에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도 하고, 처음에는 시시해 보였던 생각을 누군가 끝까지 붙들어 쓸모 있는 결과로 만들기도 하지.
자네의 노트가 도울 수 있는 곳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한 번 적게 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적은 것을 다시 보게 하는 것. 다시 보면서 다른 가능성을 찾고, 그중 하나를 골라 작게라도 해 보게 하는 것.그렇다면 노트는 기록을 남기는 도구이면서, 생각을 발전시키는 연습을 돕는 도구가 되겠지. 다만 이 말을 그대로 표지에 인쇄하지는 말게.
'창의성을 훈련하는 노트'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어렵지 않네. 어려운 것은 그 노트를 쓰는 사람이 실제로 전과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돕는 것이지.
질문 몇 개를 넣고 칸을 나누었다고 그런 일이 저절로 생기지는 않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질문이 다른 사람에게는 숙제가 될 수도 있지. 생각을 돕겠다며 넣은 설명이 오히려 생각할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네. 그래서 만들어 보고, 쓰는 모습을 보고, 다시 고쳐야 하네.
가령 회의가 끝난 뒤 다음 행동을 정하기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고 해 보세. 처음부터 노트 한 권을 완성할 필요는 없네. 회의에서 남은 질문과 다음에 확인할 일을 적는 종이 몇 장으로 시작할 수 있지.
그것을 실제 회의에서 쓰게 해 보고 살펴보는 것이네. 어느 칸은 자연스럽게 채우고 어느 칸은 비워두는지. 회의가 끝난 뒤 다시 펼치는지. 그 종이 덕분에 다음 행동이 달라졌는지. 그러다 보면 필요하다고 믿었던 것을 빼야 할 수도 있네. 사용자가 여백에 따로 적어놓은 것이 다음 제품의 중심이 될 수도 있지.
나는 그런 발견이 샘플 한 권을 더 사 오는 것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하네. 다음 제품을 서둘러야 한다는 부담도 알고 있네. 그렇다고 모든 일을 멈추고 조사부터 다시 하라는 뜻은 아닐세. 당장 필요한 제품 개선은 진행하면서, 종이 몇 장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함께 시험해 보게.
회사 안에서 다음 방향을 설명해야 한다면, 그 과정에서 본 장면도 함께 보여주게. 사용자가 어디에서 막혔고, 무엇을 바꾸었을 때 행동이 달라졌는지. 그런 장면은 우리가 왜 이 제품을 만들어야 하는지 설명하는 근거가 되어줄 걸세.
박 차장.
물론 고객에게 “무엇을 만들어 드릴까요” 하고 묻기만 해서는 곤란하네. 사람은 써 본 것에 대해서는 비교적 쉽게 말하지만, 아직 경험하지 못한 도움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
반대로 고객은 원하는 것을 모른다며 우리 상상만 믿어서도 안 되네. 만드는 사람에게 그보다 편리한 핑계도 드물 테니까.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실제로 하는 일을 보고, 자네가 이해한 것이 맞는지 작은 시도로 확인하는 것이네. 말과 행동이 다르다면 어느 쪽이 틀렸다고 서둘러 판단하지 말고, 왜 달라졌는지를 살펴보게.
그때부터 시장조사는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만나는 일이 되네. 우리 생각을 뒷받침할 자료를 모을 때와는 다른 것을 보고 돌아오게 되겠지.
자네가 사 온 노트들도 다시 펼쳐보게. 이번에는 표지와 내지의 차이와 함께, 각각 어떤 행동을 돕도록 만들어졌는지를 보는 걸세. 실제로 쓰는 사람에게도 물어보게. 만든 사람의 의도대로 쓰고 있는지, 전혀 다른 용도를 찾아냈는지. 같은 샘플에서도 전과 다른 것이 보일 걸세.
가방이나 의자, 공간으로 넓히겠다는 계획은 잠시 뒤에 놓아두어도 좋겠네. 확장할 품목이 많다는 것만으로 브랜드의 가능성이 증명되지는 않으니까. 먼저 노트 한 권으로 누구의 어떤 순간을 도울 수 있는지 보여주게. 그 경험이 쌓이면 그 사람이 다음으로 필요로 하는 도움도 보일 것이네. 무엇을 더 만들지는 그때 생각해도 늦지 않겠지.
다음에는 완성된 보고서보다 자네가 만난 사람 이야기를 먼저 들려주었으면 하네.
보고서를 만들지 말라는 뜻은 아니네. 다만 보고서가 매끄러워지는 동안 낯설었던 장면까지 지워져서는 곤란하네. 설명하기 어려웠던 행동도, 예상과 달랐던 반응도 남겨두게. 아직 답하지 못한 질문을 억지로 결론으로 바꾸지는 말게.
누군가 노트 한 페이지를 펼쳐 보였을 때 무엇이 눈에 들어왔는지. 그 사람이 무심코 한 말이 왜 돌아오는 길에도 생각났는지. 그 장면을 보고 자네가 만들려던 것을 어떻게 바꾸고 싶어졌는지.
나는 그런 이야기를 먼저 듣고 싶네.
박 차장.
이번에는 답장이 늦어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 걱정했네. 이제는 조금 기다릴 수 있을 것 같네.
다음 편지에 정답을 적어 보낼 필요는 없네. 대신 한 사람의 하루를 전보다 조금 더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면 하네. 아직 서툴더라도, 그 사람에게 자네 브랜드가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자네의 생각이 담겨 있으면 좋겠네.
노트가 가득 진열된 매장에서 돌아왔으니, 이번에는 누군가 노트를 펼쳐놓고 일하는 자리로 가 보게.
우리 브랜드가 필요한 이유는 그곳에 있을지도 모르네.
그럼, 수고하게.
P.S. 이 편지를 쓰다가 내 노트를 다시 보았네. 생각을 발전시키는 연습에 대해 이렇게 길게 말해 놓고, 정작 나는 적어둔 것을 다시 보지 않은 날이 꽤 많더군. 별표까지 쳐놓고 잊어버린 문장도 있었네. 쓸 당시에는 대단한 발견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지금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것도 있고. 그러니 자네가 시험 삼아 만든 것이 나오면 나에게도 보내주게. 적어놓고도 다시 보지 않는 내가 첫 사용자가 되어 보겠네. 대신 자네가 만든 칸 밖에 내가 무엇을 적는지도 한번 살펴보게. 어쩌면 쓸 만한 이야기는 거기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