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가족은 병이라고 우겨도
제가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가족은 병이다.” 너무한가요? <가족이라는 병>이라는 책 제목을 본 뒤로 이 말이 입에 착 붙고 말았습니다. 저 책을 읽지는 않아서 정확한 내용은 모르지만 내가 선택하지 않았다는 점, 그럼에도 나에게 고통을 준다는 점에서 가족은 병이 맞는 것 같아요. 누구나 가족 때문에 크고 작은 고통을 겪을 테니까요. (만약 아직 그런 적이 없으시다면? 축하합니다.) 오늘은 이 거대한 병적 집합 안에서 유일하게 저에게 웃음과 기쁨과 행복만을 주는 존재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저의 외할머니입니다.  
할머니가 20년쯤 더 젊었던 시절엔 좋은 날 한복을 즐겨 입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옥색 한복을 입는 날에는 제가 다 으쓱해지는 기분이었어요. 그건 할머니의 딸인 엄마와 이모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저마다 본인의 행사 때 옥색 한복을 입어달라는 청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고운 백발에 옥색 치마저고리에 옥가락지를 낀 모습이 얼마나 멋스러웠는지 모릅니다. 그 차림을 하고 외출에 나서면 어딜 가든 참 멋지시다, 너무 고우시다는 이야기를 셀 수 없이 듣고는 했어요.
할머니랑 한복 커플룩이던 시절, 빛나는 옥가락지가 포인트입니다.
요즘 할머니는 ‘내 몸 하나 간수하기도 어렵다’며 한복을 입지 않습니다. 자꾸 사촌동생이 안 입는 추리닝이나 패딩 같은 걸 입으시는데요. 저와 제 동생은 이 상황을 이해도 용납도 하지 못하고 자꾸만 새 옷을 배송 시킵니다. 왜냐하면 할머니가 한복집에서 일할 때 얼마나 고운 옷감을 좋아했는지 다 봤기 때문입니다. 또 지금도 꽃을 선물하면 색이 어쩜 이렇게 곱냐면서 열 번이고 백 번이고 감탄하는 모습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할머니가 어쩔 수 없이 못생긴 옷을 입는다? 안 될 말이죠. 철마다 때마다 할머니 집으로 배송되는 각종 꽃과 옷과 과일과 신묘한 물건들에는 이런 사연이 있습니다. 할머니의 멋짐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랄까요.  
아직도 생생한 또 하나의 멋진 할머니 사연이 있습니다. 어쩌다 그랬는지, 한번은 할머니와 함께 인도 음식점에 갔어요. 제법 어쎈틱한 맛으로 유명세를 떨치는 곳이었는데 어쩌자고 그런 도전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음식이 할머니 입맛에 맞았고, 할머니는 음식 하나하나에 도전하며 맛 분석과 평가와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주방에서 자꾸만 홀을 힐끔거리던 인도인 요리사와 눈이 마주쳤고, 할머니가 주방을 향해 박수를 짝짝 보냈고, 결국 요리사는 주방에서 홀로 나와서 머쓱하게 칭찬 세례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그때 ‘하 우리 할머니지만 정말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유튜브를 시작했다면 박막례 할머니 같은 스타가 되었을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할머니는 말이 미친 듯이 빨랐다가 엄청나게 느려지는 특이한 화법을 구사하고, 그 유머를 이해하고 웃으려면 최소 10년의 세월을 함께 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말이 빠르다는 건 거의 랩 수준으로 빠르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할머니가 좋아하는 소재, 그러니까 손주들 칭찬이나 어떤 음식의 요리법 같은 이야기를 시작하면 말이 너무 빨라서 알아듣기가 어렵습니다. 5년 전 외삼촌과 결혼한 외숙모는 아직도 할머니의 랩핑을 잘 못 알아들으시더라고요. 그럴 수 있습니다. 또 말이 느리다는 건 말과 말 사이에 며칠 혹은 몇 달이 지날 만큼 느리다는 뜻입니다. 설날에 물어봤던 이야기를 추석에 대답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기절하게 웃긴데 말로 설명이 안 돼서 슬프네요. 이쯤 되면 ‘혹시 할머니 충청도 분이셔?’ 라는 합리적인 추론에 따른 질문이 나올 수 있겠죠. 하지만 할머니는 강원도 사람…  

제가 태어나기 전 할머니의 인생이 어땠는지는 잘 모릅니다. 이름 마지막 글자를 따서 ‘연이’라고 불렸다는 것, 그런데 출생신고는 ‘OO용’으로 되어서 속상하다는 것, 어릴 때 배운 일본말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스메끼리’나 ‘다마네기’ ‘소제’ 같은 단어는 가끔 쓴다는 것 정도가 띄엄띄엄 들은 할머니의 어린 시절 이야기입니다. 할머니의 남편, 그러니까 외할아버지는 엄마가 중학생일 때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할머니는 혼자 사남매를 키우느라 그야말로 등골 빠지게 일했겠죠. 중학생이었던 엄마가 저를 낳기까지 십 년이 걸렸으니 그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을까요?  
그 뒤로 할머니는 저의 기억 속에서 그냥 할머니입니다. 미취학 아동 시절, 엄마가 회사에 가면 저랑 동생은 초인종이 울리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기다리던 띵동 소리가 나면 인터폰을 통해 활짝 웃는 할머니 얼굴이 보였거든요. 우리가 있는 힘껏 “누구세요~~~!” 하면 꼭 ‘머리 하얀 할무니예요’ 하던 목소리도요. 
할머니가 없는 평일 저녁엔 밥솥에서 밥을 푸고 밑반찬을 꺼내고 달걀 프라이를 해서 세상에서 제일 맛없는 밥을 먹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가 있는 날엔 온갖 맛있는 냄새가 집 전체를 꽉 채웠습니다. 아침에 깨면 생선 굽는 냄새가 났고, 아침 먹기 싫다고 투정을 부리다가도 할머니가 물에 만 밥 위에 조기를 발라 얹어주면 저도 모르게 반 공기를 뚝딱 하게 됐어요.
밀가루 묻혀 지진 조기는 아직도 제가 제일 좋아하는 생선입니다. 이제 온갖 걸 다 먹어본 손녀의 입맛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건방져졌지만, 그래서 어딜 가면 역시 생선은 금태니 병어니 잘난척을 하지만, 어디선가 밀가루 묻혀 지진 조기가 밑반찬으로 나오기라도 하면 눈물을 흘리면서 다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기억에 새겨진 맛이 이렇게나 무섭습니다.  
먹는 얘기를 또 한참 해버렸네요. 할머니는 모든 요리를 맛있게 잘 하는 사람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할머니가 어린 시절의 저를 먹이지 않았다면 지금 키보다 10cm는 더 작았을 겁니다. 또 할머니는 저에게 온갖 놀이를 가르쳐줬어요. 다리를 겹치고 마주 앉아서 “내 다리 네 다리”하던 놀이, “아침바람 찬바람에”로 시작하는 쎄쎄쎄, 실뜨기, 공기놀이, 비석치기, 땅따먹기는 다 할머니한테 배웠고요. 옛날 이야기는 또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조금 커서는 아무리 전래동화 전집을 읽어도 새로운 ‘콘텐쓰’가 없다며 혀를 차는 어린이가 되었습니다. 이거 다 할머니가 해준 얘긴데, 좀 새로운 거 없냐? (아무래도 전래동화라서 새로운 건 없음)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잠이 들다... 할머니는 <해님 달님> 이야기를 할 때 참기름 바른 밧줄이 얼마나 미끄러운지 알려주려고 참기름을 손에 묻혀주는 4DX 이야기꾼이었습니다. 
저한테 외할머니는 너무 소중한 존재입니다. 얼마나 소중하냐면요.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전화 통화를 합니다. 약한가요? 태풍이 오거나 바람이 좀 세게 불 거라는 예보가 있으면 할머니는 바로 저한테 전화해서 “퇴근 길에 날아갈 수도 있으니까 옆구리에 생수병 하나씩 끼고 퇴근해라”라고 합니다. 이것도 약한가요? 그럼 이건 어떨까요. 
저는 아직도 친구들하고 헤테로 결혼 찬반 토론을 할 때가 있습니다. 토론이라기 보다는 초딩 말싸움에 가깝긴 하지만요. 아무튼 그 토론이 막바지로 치달으면 “20억 반포자이 사줘도 결혼 안 함?” 같은 ‘만약에’ 질문이 꼭 나옵니다. “내 단독 명의로 사줘도 안 함!”이라고 소리치고 나면 지겨운 입씨름이 끝나는데요. 사실 제가 진짜로 결혼을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 단 하나의 만약에가 있습니다. “할머니가 죽기 전 소원이 너 결혼하는 거 보는 거라고 해도 안 함?” 진지하게 생각해봐도, 저런 상황이 온다면 바로 집 밖으로 뛰쳐나가 아무나 잡아다가 식을 올릴 거 같아요. 그리고 그 정도쯤은 할머니가 박수 짝짝 치며 기뻐했으니 0원, 으로 만들 수 있는 손해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귀여웠어도 0원이라고 합니다. 

물론 우리 할머니는 그런 사람이 아니고, 그래서 더 사랑하는 것이긴 하죠. 결혼에 대한 할머니의 생각 변화도 좀 재미있는데, 제가 아나운서를 하다가(?) 영부인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시기를 지나, 대학과 동아리와 입사와 이직을 거칠 때마다 거기엔 괜찮은 놈이 없냐고 묻던 시기도 지나, 재작년쯤부터는 “그래 니가 시르면 나두 시러👍”가 되었습니다. 역시 할머니한테도 제가 최고인 것 같죠? 
세상에 무서운 건 딱히 없지만, 그리고 웬만한 일은 벌어진 뒤 그때 가서 최선을 다해 대처하고 노력해보자고 생각하지만 할머니가 아프면 어쩌지? 심지어 죽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은 저를 미치게 합니다. 그건 너무 두려운 일이에요. 제 안에는 미친 듯이 펄떡이는 불안이가 없는데도 이 생각만 하면 ‘어쩌지’로 마음이 가득 찹니다. 
저도 압니다. 인간은 죽음 앞에 아무런 힘이 없고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해야겠지요. 근데 참 인간은 웃긴 존재이기도 합니다. 왠지 우리 할머니는 안 죽었으면 좋겠고, 그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거든요? 이상한 생각이라는 건 알지만… 유일하게 병이 아닌 가족은 할머니라고 했는데 할머니는 죄가 없지만 할머니 생각을 하는 저 자신이 질병이 되고 있는 것 같네요. 헛소리는 그만 하고 어떻게든 추석 전에 할머니 얼굴 한 번 더 보기 위해 몸을 비틀어보려 합니다. 

명절 전에 만나는 할머니는 명절 때 만나는 할머니보다 더 재밌습니다. 이번 명절에 최선의 퍼포먼스를 뽐내서 이 녀석이 집에 굴러가도록 만들겠다는 결의로 가득하거든요. 그때 할머니는 꼭 ‘이번 명절에 뭐 먹고 싶냐’고 물어보는데요. 그럼 저는 이불 위에 드러누운 채로 “이번엔~ 동그랑땡 작게 부쳐주고, 조기 구워주고, 식혜 꼭 해줘~ 많이 해줘~~~” 라고 말하면 됩니다. 지금까지 관찰한 바, 할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말은 저거거든요. 또 저렇게 콕 집어서 말하지 않으면 할머니 기강이 해이해져서 식혜를 깜빡하고 안 해줄 수도 있기 때문에 꼭 확실하게 말해야 한답니다. 
가족은 질병이다… 라고 하다가 갑자기 ‘너희 집에는 외할머니 식혜 없지?’로 끝나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추석이 코앞이고, 가족은 질병이고,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아무런 질병과 고통 없이 살아갈 수 없잖아요. 이 정도면 길고 긴 할머니 이야기의 좋은 핑계가 되겠지요. 여러분의 할머니들이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바랄게요.  
손녀들의 광기가 만든 색동 옷 & 지지 않는 광기의 타짜 (할머니 짱)

[추천합니다😎]

오늘 보고 온 따끈따끈한 추천입니다. 땐뽀걸즈, 고양이를 부탁해, 빌리 엘리어트, 스윙걸즈, 응답하라 시리즈 중 하나라도 좋아하신다면! 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내셨다면! 듀스와 디바와 NRG와 김원중과 서태지와 아이들 노래를 따라부르실 수 있다면! 요즘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누군가에게 응원 받고 싶고, 힘을 얻고 싶다면! 바로 지금입니다. 절대 놓치지 마시길... 눈으로 마시고 귀로 먹는 홍삼 엑기스가 따로 없습니다. 참고로 저는 <빅토리> 보고 너무 힘이 난 나머지 영화관에서 집까지 40분을 걸어서 귀가했습니다. 

이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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