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권 | 비거니즘 | 선택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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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건 식당에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다

위드, 비건 식당에 가본 적 있나요? 지난 주말, 에디터 러련은 비건 식당에 갔다가 문득 궁금해졌어요. ‘왜 비건 식당에는 유독 무지개 깃발이 붙어있고, 책장에 페미니즘 도서가 꽂혀있을까?’ 이번 레터에서는 비거니즘과 동물권, 페미니즘과 인권투쟁이 어떻게 이어지고 연결되는지 이야기해봤어요.

 짱콩   러련, 비건 식당 자주 가나요?

 러련   네, 최대한 비건을 실천하려고 노력 중이라 자주 가요. 지난 주말에도 서울 연희동에 있는 비건 식당에 다녀왔는데, 음식도 맛있고 즐거운 경험이었어요. 식당 곳곳에 붙은 무지개 깃발, ‘차별 없는 가게’ 스티커 덕에 안전하고 편안한 기분이 들었거든요.

 짱콩   저도 그런 사례를 꽤 봤어요. 비건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보통 페미니즘이나 성 소수자 인권에도 관심을 가지고 목소리를 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인권 감수성 자체가 높아서 다양한 영역에서 포용성이 있는 걸까요?

 러련   제가 다녔던 대학교에 비건 동아리가 있었는데, 처음엔 비건-페미니즘 동아리로 출범했다고 해요. 그 이유가 비건 동아리를 만들겠다고 모인 사람들이 전부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고 살아가고 있어서였어요. 지금은 ‘비거니즘 동아리’지만, 여전히 동물권과 페미니즘을 아우르는 활동을 하고 있어요. 확실히 비거니즘과 페미니즘은 연관성이 있는 것 같아요.

 짱콩   비거니즘과 페미니즘은 맞물려있는 톱니바퀴와 같다는 생각을 해요. 가부장제에서 발생하는 여성에 대한 착취와 인간중심 사회에서 발생하는 비인간 동물에 대한 착취는 비슷한 모습을 띨 때가 많잖아요. 캐럴 J. 애덤스는 책 『인간도 짐승도 아닌』에서 그런 착취의 역사를 비교하면서 두 운동의 교차점을 조명하고요.

 러련   맞아요. 그렇다 보니 비거니즘을 단순한 식습관을 넘어 하나의 윤리이자 정치적 가치관으로 확장해서 바라보게 되는 것 같아요. 공장식 축산이나 대량 도살, 집단 폐사 등의 문제들이 육식에 얽힌 윤리적 문제들을 대두시키기도 하고요.
그리고 비거니즘의 문제가 개인적 실천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개인의 비거니즘에 대한 결심은 견고한 육식 사회의 벽에 부딪히기 일쑤예요. 전혀 고기와 상관없는 것 같은 감자칩에 쇠고기 성분이 들어간다거나, 대형 패스트푸드 체인이 내놓은 ‘채식’ 버거에 알고 보면 동물성 성분이 들어있기도 하더라고요. 

 짱콩   공감해요. 비건 식당은 대체로 가격이 비싸고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는 접근성의 문제도 있고요.

 러련   그래서인지 제가 비건을 지향하고 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비건을 선뜻 권하기에는 주저되기도 해요. 답답한 현실이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 비거니즘은 비싸고, 시간이 많이 들고, 불편한 생활방식이니까요. 그렇다고 동물권을 위한 실천을 포기해 버릴 수는 없겠지만, 그 실천이 완벽하고 무결해야 한다는 강박을 갖기 시작하면 지쳐버리기도 쉽잖아요.

 짱콩   한편으로는 비건이 하나의 유행처럼 소비되고 말아버릴지 걱정되기도 해요. 요즘은 편의점에서도 비건 제품이 보이고, ‘트렌디한’ 동네에 비건 식당들이 생겨나고 있어서 기쁘지만, 명확한 사회적 변화는 보이지 않으니까요. 

 러련   사회적 측면에서의 변화가 필요한 이유예요. 수요의 증가로 시장을 바꾸겠다는 논리로 접근하기보다는, 비거니즘을 장려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정책이 먼저 기반이 되어야 해요. 그래야 개인이 비거니즘을 실천하기에 더 용이한 사회가 될 테니까요.

 짱콩   저도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면서 동물권 문제를 자주 접했고, 비거니즘을 지지해요. 그런데 사실 저는 채소를 정말 못 먹거든요. 그래서 동물권을 옹호하지만, 그와 모순되는 제 식습관 때문에 고민이 많아요.

 러련   혼자서 짊어지기에는 분명 무거운 짐이에요. 그러니 좌절하기보다는 함께 할 수 있는 실천의 의미를 되새겼으면 좋겠어요.

 짱콩   좋아요. 우리의 아픔이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서로에게 의지하며 하나씩 배우고 실천해 나가야겠어요.
느낌표

여자라서 불쌍한 건 인간만이 아니었다

-오늘의 콘텐츠 | 다큐멘터리 잡식가족의 딜레마-

우리는 과거에 비해 훨씬 손쉽게 육류를 소비할 수 있어요. 공장식 축산 덕분이죠. 동시에 우리는 불편한 진실을 맞닥뜨리게 돼요. 가축화된 동물들의 죽지 않을 권리, 고통받지 않을 권리, 이른바 동물권이라고 불리는 동물 윤리의 문제예요.


여기, 돈까스를 즐겨 먹던 사람에서 돼지를 보는 사람이 된 여성 인간 동물의 고민이 담긴 영화가 있어요. 황윤 감독은 돼지를 식품이 아니라 아이, 엄마, 생명으로 보게 되고, 비육식을 선택하기로 해요. 육심 중심 한국 사회에서 비거니즘을 실천하는 쉽지만은 않은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아요.

© 시네마 달

영감의 실마리


하나, 동물을 먹는 한 동물의 고통은 피할 수 없다!

황윤 감독은 돼지를 볼 수 있는 곳을 찾다가 공장형 축산 대신 친환경 축산 시스템의 돼지 농장을 발견해요. 돼지를 방목해서 키우는 일종의 동물복지 농장인 셈이에요. 그러나 여전히 돼지가 상품이라는 전제는 변하지 않아요. 수퇘지는 고기의 잡내를 없애기 위해 태어난 지 1주일 만에 마취 없이 거세당하고, 암퇘지는 임신사에 갇혀 임신과 출산과 양육을 반복해야 하죠. 돼지들은 결국 생후 1년이 지나기 전에 트럭에 실려 도살장으로 가고요. 동물을 먹는 것은 한 생명을 고통스럽게 착취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 진실을 뼈저리게 체감한 사람에게 고기란 그저 맛있는 음식은 아닐 거예요.


자칭 ‘돈까스 마니아’였던 황윤 감독은 돼지를 처음 보고 온 뒤 고백해요. “돈까스가 돼지로 보이기 시작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돼지를 괜히 보고 왔나?”

둘, “여자라서 불쌍하지” : 임신과 출산의 굴레에 갇힌 여성 동물들

여성 동물들은 좁은 스톨에 갇힌 채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다가 재생산 기능을 잃으면 도축장에 실려가는 일생을 보내요. 영화에서 공장의 한 여성 관리자는 이렇게 말해요. “불쌍하지, 왜 여자로 태어나서... 불쌍하지.” 양계장의 여성 닭들과 젖소도 마찬가지예요. 닭알을 생산하기 위해 갇히고, 젖을 생산하기 위해 강제 임신을 하죠. 우리가 먹는 소젖과 닭알은 여성이라는 성별의 다른 종 생명들을 착취한 결과물이에요.

이 구조에서 우리는 인간 여성이 처한, 고질적인 불평등을 실감하게 돼요. 역사적으로 여성 인간은 임신-출산 기계로 다루어지고 대상화되어 왔으니까요. 같은 여성인 여성 동물의 몸이 나의 몸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일까요? 이들의 삶과 나의 삶을 분리해도 되는 걸까요? 이들의 몸을 착취하며 살아도 되는 걸까요? 영화는 끊임 없이 물음을 던져요.
셋, 한국에서 비육식주의자로 살아가기 : 소외감과 배고픔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

채식을 결심한 뒤의 황윤 감독은 수많은 식당이 육식 중심이라는 걸 깨닫고 도시락을 싸서 다니기 시작해요. 많은 사람이 비육식의 취지에는 공감하면서도 선뜻 발을 들여놓기 힘든 이유는 비건이 되는 게 현실적으로 녹록지 않기 때문도 있어요. 식당과 마트에서 판매되는 절대다수의 음식 및 식품들은 육식을 전제로 하고 있죠. 때문에 비건이 되기 위해 “집밥 해먹기”는 필수적인 실천이기도 해요. 비건으로 사는 일은 곧 “직접 음식을 하고, 냉장고 속 음식을 신선하게 관리하고, 영양 밸런스를 고려”1 하는 자기돌봄이 되는 것이죠.


하지만 현실적으로 자신의 끼니를 직접 차리기 어려운 사람도 있기 마련이에요. 특히, 엄마와 아내로서 가족의 식단을 구성하는 감독은 육식할 권리를 논하는 남편의 불만과도 마주하죠. 우리는 “무엇을 먹을지”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걸까요? 


1. 안담•한유리•곽예인, 『엄살원 : 밥만 먹여 돌려보내는 엉터리 의원』 (위고, 2023) 중에서

  ©시네마 달

☂에디터 산우의 생각 조각


“동물의 죽은 몸이 고기에 관련된 우리의 언어에 부재하듯이, 남성의 문화적 폭력에 관한 묘사에서 여성은 부재하는 지시 대상이다.” 캐럴 J. 아담스는 저서 『육식의 성정치』(이매진, 2018)에서 동물과 여성이 정복과 억압의 측면에서 같은 층위에 놓인다고 얘기했어요.

페미니스트와 채식주의자는 가부장제의 권위를 거스른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가부장제와 긴밀하게 연결된 육식 문화는 여성의 몸과 동물의 몸을 대상화하고 소비할 뿐 아니라 그를 고발하지 못하도록 은폐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채식은 가부장제에 저항하여 여성이 자율성을 획득하는 정치적 선택이 될 수 있어요.

하지만 완전 채식이 이 모든 문제의 정답은 아니에요. 페미니스트라면 응당 비건이 되어야 한다는 식의 단편적인 논리는 경계해야 해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구조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지를 성찰하는 것이에요. 반드시 비건이 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내가 먹는 것이 어디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왔는지를 생각해본다면 우리 삶의 가치관을 만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위드는 비거니즘 실천에
어려움을 느낀 적이 있나요?
지난 ‘여성과 돌봄노동’ 레터에 위드가 보내주신 피드백을 살펴보았어요.
  • 주위에 남편을 따라 타지에 와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글을 읽으면서 그 분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올랐어요. 슬프게도 그들의 일상과 성만의 일상이 너무나도 많이 겹치더군요. '나'를 되찾을 기회를 찾기를 바라며, 그들에게 이 다큐멘터리를 추천하려구요.
오늘 이야기는 어땠나요?
이 레터를 함께 만든 사람들 👪
꾸물🐛 러련🪁 산우☂️ 서머☀️
올린🎻 이끼🌿 장소조🐭 짱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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