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트님은 경쟁을 좋아하는 사람인가요?
우리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남보다 더 잘해야 하고, 더 강해져야 한다고 사회적으로 주입받으며 살아왔어요. 이렇게 경쟁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는 사람들에게 ‘부족함'을 생각하게 만들고 끊임없이 경쟁하게 만들어요. ‘좋은 것'의 수는 정해져 있기 때문에 이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냥 잘하는 것’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남보다 더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게 만드는 거죠. 이런 사람들은 다윈의 진화론을 가져와서 경쟁을 정당화하기도 해요. 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의 방식으로 자연이 발전해 왔기 때문에 경쟁은 불가피한 것이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경쟁에서 최대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죠.
타인에게 좋은 것이 아니라 나에게 좋은 것은 무엇인가요?
모든 것이 충분하다고 믿을 때 우리는 경쟁하지 않아요. 무언가 부족하다고 믿을 때 우리는 더 좋은 것을 얻기 위해 경쟁을 해야 하죠. 실제로 좋은 학교, 좋은 직업, 좋은 집을 얻기는 바늘구멍을 뚫고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어렵게 느껴지기도 해요.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 있어요. 그 ‘좋은'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 걸까요? 사회적으로 혹은 더 많은 사람이, 혹은 유명한 사람들에 의해 ‘좋다'라고 정의되는 것들이 정말 나에게도 ‘좋은 것’일까요? 어쩌면 우리는 ‘좋은 것'에 대한 나만의 기준 없이 남들이 ‘좋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쫓느라 불필요한 경쟁을 하며 자기 자신을 소진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요.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의 개념도 한 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의 저자 버네사 우즈는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더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더 다정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해요. 아주 오래전 지구에는 호모 사피엔스뿐만 아니라 호모 에렉투스나 네안데르탈인이 있었어요. 호모 에렉투스나 네안데르탈인은 막강한 신체적 기량을 가졌지만 서로 협동하지 않고 각개 전투의 길을 걸으며 멸종해갔어요. 호모 사피엔스는 이들에 비해 특별히 지능이 뛰어나지도 않았고, 신체적 능력은 오히려 떨어졌지만, 유일하게 서로 협력하며 무리를 이룰 수 있었어요. 타인에 대한 감수성을 가지고 이해하며 친화력을 가지고 소통할 수 있었던 덕분에 호모 사피엔스는 신체적인 약점을 극복하고 살아남아 문화를 만들 수 있었죠.
실제로 다윈은 ‘적자생존'을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해요. 오히려 다윈은 자연에 있는 모든 종의 고유함과 다양성의 중요성에 관해 이야기했어요. 자연에서 생물의 계층을 매기는 단 하나의 방식이란 절대 존재하지 않으며, 환경에 따라 유리한 개체가 그때그때 선택될 뿐, 선천적인 우열이나 절대적인 좋음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