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냥한 구독자 님께, 안녕하세요. 금요예찬 쓰는 큐레이터Q입니다. 한가위 아침이에요. 오늘 밤 보름달에게 빌 소원은 정하셨나요? 님이 평안하고 복 된 추석 연휴를 보내고 있길 바라며 저의 소소한 글을 보냅니다. 페드로의 붉은 주방 몇 년 전 이사를 앞두고 대대적인 집수리를 할 때였다. 전 주인은
거의 내 나이와 맞먹는 아파트에 입주 때부터 살았다고 했다. 아파트가 처음 지어질 당시의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집은 같은 아파트 단지 안에서도 흔치 않았다. 다시 말해 집의 거의 모든 부분을 손보아야 했다. 하지만 한정된 예산에서 인테리어에 사치를 부리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폴딩 도어와 헤링본 마루는 그 첫 자음을 발화함과 동시에 산화하여 공중으로 사라졌고 편리한 기능과 탄탄한 마감을
자랑으로 하는 실용적인 제품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런저런 타협 끝에 두꺼운 샘플북에서 벽지와 바닥
마감재를 속성으로 고른 후 마지막으로 주방과 현관, 욕실에 사용할 타일을 선택하기 위해 인테리어 사장님의
차를 타고 타일 샘플이 모여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세상에 그렇게 다양한 타일이 존재하는지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형형색색의
타일에 어디에 눈을 두어야 할지 몰라 바쁜 와중에 붉은색 타일 하나에 시선을 고정했다. “예쁘죠? 스페인 수입
제품이에요. 타일은 옛날부터 스페인이 유명하지요.” 가우디가 괜히 깨진 타일을 모아 붙여 구엘 공원을 장식한 게 아니었다. “그럼 이걸로…?” “이걸 주방에 하시겠다고요? 안됩니다. 주방에는 이런 색 하는 거 아니에요.” "정 주방에 빨간색을 두고 싶으시면 스메그 토스터기 같은 걸 빨강으로 사서 두세요." 김장무도 단번에 썰어버릴 것 같은 인테리어 사장님의 단호한 반응에 사뭇 놀라 나는 무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예쁘다면서 왜 안되냐고 소심하게 되물었다. 사장님은 미간을
찡그렸다 눈썹을 팔자로 만들며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인테리어는 캔버스를 만들 듯 깨끗한 배경이
되어야 하는데 이런 강한 색을 쓰면 쉽게 질리고 다른 살림살이와 어울림을 만들기도 어렵다는 이유였다. “정 주방에 빨간색을 두고 싶으시면 스메그 토스터기 같은 걸 빨강으로 사서
두세요.” 우리 집 주방 타일은 그렇게 회색으로 선택되었다. 아쉬움에 입맛만
다시는 나를 긍휼히 여긴 사장님은 회색 타일을 헤링본 패턴으로 마감하는 아량을 베풀었다. 스메그 토스터기는
끝내 사지 못했다. 나는 빨강이 가진 강렬함에 매혹되었다. 존재만으로 주변을 압도하는 힘이 빨강에는 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최근작 “페인 앤 글로리(2019)”에서 붉은색으로 가득한 주방을 보고 지난 인테리어의 기억이 떠올랐다. 감독이 연출한 주방은 빨간 상부장과 하부장 사이로 하늘색 타일이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다. 내가 사지
못한 스메그 토스터기와 에스프레소 머신도 있었다. 물론 빨간색으로.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장면 어디 한구석에 꼭 빨강을 심어 두는 감독의 영화다웠다. 빨간색이 인테리어 하기에 어려운
색이라고 하지만 저런 붉은 주방이라면 평생을 두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영화에
등장한 집이 세트장이 아니라 진짜 감독의 집이고 영화에 등장한 소품도 대부분 감독의 것이라는 걸 알고 무척이나 부러웠다. 좋아함에 이유를 따질 필요가 있겠냐만은 굳이 찾는다면 나는 빨강이 가진 강렬함에 매혹되었다. 존재만으로 주변을 압도하는 힘이 빨강에는 있다. 부드럽게 조화를
이루기보다는 자신이 가진 강한 힘으로 모두를 이끌어가는 카리스마에 가까운데 이는 내가 가지지 못한 능력이라 더욱 갈망하게 되는 것 같다. 붉은 주방도 토스터기도 갖지 못했지만 대신 빨간 립스틱을 샀다. 로드숍에서
재미 삼아 발라보았는데 생각 외로 잘 어울렸고 어딘가 스스로를 단단히 무장하는 기분도 들어 즐겨 바른다. 코로나로
마스크가 일상이 되기 전까지 빨간 립스틱을 바르는 일은 출근 전 빼먹을 수 없는 의식 같은 거였다. 중세
기사가 갑옷을 두르듯 나는 밋밋한 얼굴에 빨간 립스틱을 바르며 외출 전 마음을 가다듬는다. 그리고
나중에 자동차를 사게 되면 감가상각 따위는 저 멀리 치워두고 빨간 자동차를 살거라 다짐해본다. 페인 앤 글로리(2019) 중. 뒷편의 토스터기는 스메그의 돌체 앤 가바나 콜렉션이다. 금요알람은 언제나 당신의 이야기를 환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