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월이면 무엇이 변했을까요?

너무 엄청 오랜만이라는 호들갑으로 이번 레터를 시작하려고 했습니다. 체감상 반 년은 지난 줄 알았거든요. 근데 제일 최근 레터의 발신일이 4월 28일이네요. 세 달도 안 됐는데 왜 이렇게 오랜만인 것 같죠? 이유는 하나, 그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막상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하면 말문이 턱 막히네요. 차근히 하나씩 다 이야기하려면 또 세 달은 걸릴 겁니다.

지난 3개월을 요약하자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어요. '진짜 너무 울고 싶은데 눈물이 안 나오는 시간이었다.' 보통 울고 싶은 시즌에는 누군가 조약돌 하나만 퐁 던져도 이때다 싶어서 펑펑 울게 되지 않나요? 이번 시즌에는 누가 바위를 갖다 던져도, ‘쎄멘’을 우르르 쏟아 부어도 눈물이 안 나오더라고요. 치사하지만 <인사이드 아웃2>를 보는 편법까지 썼는데 눈물이 안 났어요. 그럴 거면 기분이 좋아지면 될 텐데 또 목구멍 어디쯤과 귀 뒤까지 울음으로 꽉 막힌, 그 먹먹한 느낌은 계속되더라고요. 그냥 원래 인생은 이렇게 잔잔하게 슬픈 걸까? 내가 지금까지 과분하게 행복했던 걸까? 그럴 수도 있죠. 아무튼 여러 일들로 화도 많이 났고 속상하기도 했고 스트레스도 받고 그랬습니다.

조로의 가오를 이어받자.


하지만? 해냈죠? 이렇게 돌아왔죠?

한바탕 악재와(진심 굿 해야 하나 고민함) 준비 안 된 여행과 수많은 끼니와 그 와중의 지독한 문화생활과 질병이 휩쓸고 간 자리에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서 있습니다. 양 손으로 뿌이…를 날리며. v(^^)v

뒤돌아보면 온통 폐허겠지만, 그러므로, 굳이 돌아볼 필요가 있을까 싶어요. 그래도 삼 개월 동안 무소식이었으니까 중요 사건들만 짚어보자면요. 올해 1월부터 매달렸던 프로젝트를 런칭했습니다. 일단 태어나버렸으니 잘 키워봐야죠. (궁금하신 분은 링크💘) 회사에서 보내주는 여행으로 암스테르담에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고흐, 베르메르, 렘브란트, 그리고 미피의 나라… 일주일 내내 공원에 드러누운 채로 책 읽고 트위터 하고 술 마시고 낮잠 잤더니 기미인지 주근깨인지가 엄청 생겼습니다. 살도 더 빠지고, 대상포진에도 걸렸어요. 가지가지 하죠? 생각보다 안 아팠지만 존나 아프긴 했습니다. 건강이 최고예요. 여기까지가 회사에서, 회사 덕분에, 회사 때문에 생긴 일들이고요.

여기 살면 성격 좋아지겠다 싶죠? (아님)  
너무 귀여운데 너무 비쌈 역시 IP가 중요함

회사 밖에서는 부지런히 문화생활도 하였지요. 아까 말한 <인사이드 아웃2>도 보았고 <파묘>를 보며 파하하학 웃어제꼈고 <로봇드림>을 보며 오열하였고 - 뭐야 오열 있었네요 - <벚꽃동산>을 보며 전도연 웅니의 사랑스러움에 치를 떨었고 손열음의 <고잉홈 프로젝트>에서 베토벤을 들으며 내적 비명과 함께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찾아온 미쳐버린 생리통에 좌로 굴러 우로 굴러 세상을 저주하는 일도 빼놓지 않았네요. 이번 녀석 정말 독하더군요. 사람이 정말 아플 때는 입만 열면 ‘으으으으…’ 이런 신음 소리가 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와! 생리통 대상포진보다 아프다! 쓰고 보니 이것도 회사 때문에 생긴 일. 😡


저에게 무슨 일들이 생겼었는지 빠르게 보고 드렸습니다. 여러분은 이 좋은 계절을 어떻게 보내셨는지 궁금한데, 일방적인 편지는 이 점이 안 좋군요. 계속 일방통행 이어갈게요. 4월부터 지금까지, 봄과 초여름을 지나 장마철 한복판으로 들어오면서 저는 아주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이건 너무 고상한 표현인 것 같고 실은 속으로 매우 많은 욕설을 내뱉었다는 뜻입니다. 아주 크게. 너무 피로해서 그 어떤 소리도 듣고 싶지 않았기에 제 에어팟은 그 동안 긴 휴가 상태였습니다. 집에서 노래도 안 틀고, 출퇴근 시간에도 노래 안 듣고, 운전할 때도 (거의) 음악 안 틀고, 영상을 보고 싶으면 아이패드 소리를 한 칸만 켜놓고 귀 기울여 들었습니다. 스스로의 목소리조차 시끄럽게 느껴져서 최대한 말을 줄였고요.

속으로 욕하고, 속으로 생각했을 때의 좋은 점이 있습니다. 많은 일들에 무뎌진다는 것입니다. 어떤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면 상대방과 대화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저의 감정과 생각이 어떤 영향을 받게 되고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튀고 조금씩 확대됩니다. 하지만 속으로 생각하면 리액션이 없어서 빨리 지치기 때문에(?) ‘이 새끼가? → 왜 저러고 살지? → 에휴 냅두자 저러다 죽겠지 → 소강 상태…’ 이렇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나름의 도를 닦으며 최대한 웃는 얼굴, 최소한 무표정이라도 유지하려고 노력했어요. 노력한 게 그거냐? 라고 하면 할 말 없지만 입 밖으로 쌍욕을 하지 않은 저 자신이 너무나 대견한걸요? 이렇게 살다보면 언젠가는 마음 속의 파도도 조금 낮아질까 기대해봅니다. (초보 특: 쫌만 뭐 되는 것 같으면 설레발 쩔음.) (초보 특2: 그래도 초보니까 괜찮음!)


저는 당연히 부족한 게 아주 많은 인간이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부족한, 도무지 찾아볼래야 한 톨도 찾을 수 없는 미덕이 바로 겸손입니다. 이번에 깨달았습니다. 나는 진짜 존나 오만한 인간이었구나. 세상 일 다 내 뜻대로 된다고 착각하면서 살았구나! 손 쓸 수 없는 바깥에서 몰아치는 파도에 휩쓸리면서 생각했어요. 이래서 하체가 중요하구나… 이래서 코어 운동을 해야 하는 거구나… 자연의 힘은 정말 강력하구나… 그럼에도, 놀랍게도, 저는 아직 겸손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강력한 힘에 당했으면 그저 고개를 숙이고 휩쓸려야 하거늘(굿을 하거나요…) 그냥 다시 더 빡세게 정신을 차리고 살아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제가 언제 눈물을 흘리며 온몸으로 겸손을 배우게 될지 저도 참 궁금해요.


3개월은 확실히 뭔가 바뀌기에는 짧은 시간입니다. 하지만 무언가를, 예를 들면 강산 같은 것을 바꾸기 위한 기반을 다져볼 수는 있는 시간이더군요. 늘 그렇듯 인생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몰라도, 저에게는 이 3개월의 시간이 어떤 시작이 되어줄 것 같아요. 모든 방향으로 모든 것을 발산하던 나를 가지치기 했다고 할까요? 굉장히 평화로운 척 말하고 있죠? 마음 속으로는 많은 눈물을 흘렸읍니다^^… 이제 또 적당히 평화로운 시간을 향해 가야죠. 이 편지를 읽어주시는 여러분에게 안부를 전하고, 또 그보다 자주 잼얘를 공유할 수 있기를! 그게 저의 평화로운 시간이거든요.

그럼 또, 이번엔 곧 만나요. 안녕!

  

[추천합니다😎]

  • <출근길 지하철> 링크

예전에 이야기한 것 같은데요. 언젠가부터 웬만하면 종이책을 안 사거든요. 하지만 이 책은 나오자마자 오프라인 서점에 뚜벅뚜벅 걸어가서 샀다! (인터넷 서점에서 주는 투쟁 키링 굿즈가 갖고 싶어서 뒤늦게 후회 중) 아직 반 밖에 못 읽었는데 벌써 너무 재밌습니다. 무엇보다 바쁘다는 핑계로 지 맘대로 살아온 요즘의 저에게 아주 필요한 책이었어요. 이제 다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네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눈 크게 뜨고 쳐다보라고 말해주는 책입니다. 

책 만드는 일을 할 때 이런 말을 많이 들었어요. 재미, 감동, 쓸모(지식) 중 하나만 잡아도 좋은 책이다. <출근길 지하철>에는 놀랍게도 셋 다 있습니다. 대박이죠. 어서 사보자. 

이민해
allthatliberty@gmail.com
서울 02-6461-4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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