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흐름대로 떠오른 문장들

당신에게 보내는 반짝거리는 문장들
들어가면서
문장줍기는 "주제에 맞는" 문장을 골라야 한다는 편집 원칙이 있습니다. 즉, 이번주 제 삶의 화두가 주제인 셈이에요. 그런데 이번주는 무슨 화두를 던질 수 있을지 도저히 모르겠더라고요.
이런 주차 마감이 제일 힘들긴 합니다. 주제 없이 문장을 골라야 한다니!
어제 글쓰기를 하다 쓴 문장에서 출발해 꼬리를 물고 떠오른 문장들을 엮어서 보내보려 합니다. 불행, 실패, 슬픔에 대한 여러 생각들을 담아둔 문장입니다.
발행인의 문장
안심할 수 있는 슬픔

이정도면 견딜수 있겠어, 라고 하는 것처럼. 빨리감기를 하듯 결말에 이 모든 고난이 다 끝나리라는 걸 안 뒤에야 본다. 즉, 안심할 수 있는 슬픔이 필요하다.

-소얀, 해피엔딩을 기다리며

이번 주말에 영화를 싫어하는데 영화에 대한 글을 써야 하는 글쓰기 숙제가 있었습니다. 제가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건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고난받는 걸 보고 싶어하지 않아서였습니다. 그래서 항상 리뷰 다 보고 시작하는데, 그 이유를 곱씹어 정리하다 보니 위의 문장이 나왔습니다.
이 모임은 한수희 작가님의 책을 읽고 네 번의 글을 쓰면 답장을 받을 수 있는 모임입니다. 쓰기 힘든 주제들이 많았는데 글쓰기 모임의 묘미는 내가 쓰고 싶지 않은 주제도 쓸 수 있는 훈련을 하는 거더라고요. 마지막 주제가 내일 나오는데, 기대하고 있어요.
첫 번째 문장
소소하고 확실한 불행

오히려 지금의 나를 달래주는건 소소한 불행들이다.(...)  고작 이정도의 불행이지만 확실한 불행(...)쪼그만 불행을 살짝 끼얹는 것으로 내가 가진 행복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어쿠스틱 라이프, 작지만 확실한 불행(223화)

난다 작가님의 어쿠스틱 라이프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한군과 난다님의 관계에서 저와 남편의 일면들을 발견할 때가 있거든요. 폭풍 같은 육아와 창작 시기를 견딘 난다님의 이 구절에 공감이 가서 들고 왔습니다.
안심할 수 있는 슬픔, 이란 구절을 썼을 때 가장 먼저 떠올랐어요.
5년 전 연재분이라 안타깝게 유료분인데요, 아쉬움을 달래고 싶으시다면 난다 작가님이 카카오웹툰에서 선보이는 스토리물, 도토리 문화센터 추천드립니다. 
두 번째 문장
미리 실패해보는 연습

운동이나 놀이를 통해서 경험해 보는 실패는 일종의 가상현실과도 같다. 스트레스 지수는 비슷하지만, 매우 안전하면서도 얼마든지 다시 도전해 볼 가능성이 열려 있다.

-이영미, 마녀체력

쪼그만 불행은 실패와 같은 걸까? 운동과 실패를 엮어서 쓴 문장이 분명 있었는데 - 싶어 28호에 소개한 문장을 다시 가져왔습니다. 이정도는 실패하는 연습을 하고 잃을 것 없는 훈련을 하는 것이란 생각이 드네요.
자주, 자잘하게 실패하다 보면 실패에도 익숙해지게 될까요? 실패에 대한 내성이 생기는 게 맞을까요?
세 번째 문장
그것이 실패였는지 아닌지는

내가 겪은 모든 실패를 아직 이루지 못한 성공과 연결지어본다. 그러다 문득 그것이 실패였는지 아니었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든다. 그때는 실패같기만 했는데 그 후에도 인생은 끝나지 않았고 또다른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실패도 성공도 아닌 일이었다.

-한수희, 조금 긴 추신을 써야겠습니다

이 과제는 그림책방 노른자에서 진행하는 과제인데요, 책에서 발췌한 문장에서 주제를 글을 네 번 쓰면 한수희 작가님에게 답변을 받을 수 있는 과제입니다.
이 책에 분명히 실패에 대해 쓰셨을 것 같아 책을 뒤져봤어요. 포스트잇의 실패, 라는 글에서 만난 이 문장을 소개해 봅니다.
제가 받아들이지 못한 일들, 화해하지 못한 과거도 몇 년 더 묵으면 글로 풀어낼 수 있는 순간이 있을까요. 눈물 닦으면 다 에피소드, 라 했던 영혼의 노숙자 슬로건처럼요.
네 번째 문장
슬퍼하는 것이 첫 시작

제가 한국인에 대해서 사랑하는 점은 한국인들은 멋진 멜랑콜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슬퍼할 줄을 알아요.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슬퍼할 줄 안다는 것은 더 큰 만족으로 나아가는 첫 번째 단계거든요.

- 알랭 드 보통, 비정상회담(1분 48초부터)


슬퍼할 아는 것은 만족으로 나아가는 번째 단계란다. 멋진 멜랑콜리라는 표현에서 끝났다면 '무슨 소리야' 하며 채널을 돌렸겠지만, 슬픔이라는 결핍을 제대로 인지하고 그것을 메꾸려 노력하는 것이 결국 만족과 행복을 만든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 실행하고 있다니, 위로를 받은 같아 감사했고, 한편으론 안도의 마음까지 들었다. 

-오하림, 나를 움직인 문장들

7년 차 카피라이터가 자신이 좋아했던 문장들을 모은 책 중에서 메모해둔 구절입니다. 알랭 드 보통이 비정상 회담에서 진행했던 인터뷰가, 저자에게 와닿았다고 합니다. 작가님이 이야기한 "결핍을 인지하고 그걸 메꾸려는 노력"이란 구절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제가 언젠가 꼭 엮어보고 싶은 책은 제게 감명을 준 문장과 그 이유를 엮은 책입니다. 오하림 작가님 책 외에도 편애하는 문장들(이유미 작가님), 오늘을 버텨내는데 때로 한 문장이면 충분하니까(서메리 작가님)처럼 제게 감명을 준 문장들과 그 이유를 엮은 책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이때부터 비영리로 진행할 수 없어 인용 허락을 구하는 난이도가 상당할 텐데요, 그래도 꿈은 꿈이니까 여기 적어둡니다.
마감 일지
  • 주변에 확진자도 많고, 검사도 자주 받으시니 오미크론이 정말 목 끝까지 온 게 느껴지네요. 확진된 분들 무사히 지나가길 바라봅니다.
  • 요즘 문장술사 사연이 없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방학 같기도 해서 기분이 이상합니다. 진짜 없으신가요? 사연이 모이는데로 찾아올게요. 사연을 보내면 받을 수 있는 내용은 88호를 참고해 주세요.
  • 이런 꼬리를 무는 편집방식, 처음 시도해 봤는데 어떠셨나요? 그동안은 어떻게든 주제에 맞는 문장을 찾아보다 마감하기가 너무 힘들었었는데요. 큰 주제가 없이 골라보는 시도는 블라인드북 이벤트 발표 편수였던 89호 이후 두 번째인데요, 마감이 힘든날 이런 시도도 해보려 합니다.
  • 오늘의 마감 노래는 Young Cocoa-Manila이니다. 데일리 노동요이기도 하고, 글 마감할 때도 자주 듣고, 헬스장 러닝머신에서 빠르게 걸을 때도 듣습니다.
이번 문장줍기는 어떠셨나요?
SENTENCE PICKER
sentencepicker@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