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참사 | 벌새 | 외상 후 성장
WEW
18호 사회적 참사와 여성. 10.29 참사 희생자를 추모합니다. 물음표: 사람들이 사라진 자리에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다. 느낌표: 이상한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찾아 헤메는.
국화 이미지 ©Freepik/wirestock
10·29 참사 희생자의 명복을 빕니다.
유가족분들께 깊은 애도의 마음을 보냅니다.
다치신 분들의 빠른 회복을 기원합니다.

wew 팀 일동
(?)
사람들이 사라진 자리에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다
10·29 참사로 최근 우리는 곁에 있던 이들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이 아픔을 어떻게 마주봐야 할까요? 다시 고개를 들고서 다음 발걸음을 내딛기 위해 직시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하려 말문을 열었어요.
 라노  마음이 무겁고 슬프지만, 지금 꼭 필요한 얘기를 위드와 함께 나누는 게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애도의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쵸파  네, 침묵하며 감정을 억누르는 게 애도는 아닐 거예요. 앞으로 더 이상 소중한 생명을 잃지 않을 수 있도록 안전한 환경을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고민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라노  맞아요. 쵸파, 10월 29일 밤은 정말 힘들었죠? 저는 친구들의 안부를 여러 차례 묻고, 또 친구들의 연락에 답을 하며 밤을 새웠어요. 피해 상황에 대한 뉴스를 지켜보며 사상자의 숫자가 더 이상 늘지 않기를 기도했고요.

 쵸파  내 친구들이 있으면 어떡하지, 그런 마음에 애타고 걱정되어서 잠이 안 오더라고요.

 라노  맞아요. 맛집과 카페를 찾아 수없이 지나쳤던 거리에서 이렇게 많은 사상자가 나올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어요. 그래서 더 허무하고 무서웠고요.

그러면서 재난 앞의 여성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지난 레터에서도 기후위기로 인한 재해로 여성이 더 큰 피해를 입고 있다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잖아요. 재난 상황에서 무력하고 보호받지 못하는 것이 여성의 현실 같다는 생각에 너무 슬프고 화가 나요.

 쵸파  저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어요. 뉴스를 보면서 내가 그곳에 있었다면 무엇을 해야 했을지에 대해 계속해서 고민해봤는데, 별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더라고요. 그러면서 생각보다 저 자신에게 이런 재난 상황에서 대응하는 방안에 대한 지식이 생각보다 부족하다는 걸 깨닫기도 했어요.

 라노  그래서 저, 이번 기회에 심폐소생술(CPR)을 배워보아야겠다고 다짐했잖아요. 고등학생 시절 학교에서 관련 수업을 들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데,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실습 기회도 적으니 실제로 위험이 닥쳤을 때 대처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찾아보니까 재난 상황에 대응할 능력이 있나요?’라고 물었을 때, ‘그렇다’라고 답한 여성 1인가구의 비율이 남성 1인가구의 비율보다 훨씬 낮았어요.


 쵸파  음, 이유가 뭘까요 ?

 라노  남성의 경우 군대에 가는 경우가 많고, 그곳에서 꾸준히 재난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훈련받잖아요. 그런데 여성의 경우에는 교육 기회가 비교적 적기 때문이라고 해요. 학교나 직장에서 공식적으로 시행하는 재난 예방 교육만이 전부일 때가 많다는 거죠. 게다가 중장년 여성은 직장을 다니지 않는 경우도 많으니 더더욱 교육 기회가 적을 테고요. 여성이 남성보다 위험에 덜 노출되는 것도 아닌데, 대비는 훨씬 덜 되어 있다는 사실이 충격이에요.
 쵸파  여성이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하거나 사회에 진출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게 재난 상황에서의 더 큰 위기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거네요.

저는 지금 우리나라에서 진행되는 재난관리 교육 및 훈련, 대책 등은 모두 비장애인 성인 남성을 기준으로 만들어졌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그래서 재난 구호 물품이나 대피공간을 준비할 때도 여성은 고려하지 않는 경우가 생기고요. 예를 들어 성별을 구분한 탈의실이나 월경용품, 수유 공간 같은 걸 마련해두지 않는 거죠.

 라노  재난을 수습할 때도 성인지적 관점이 필요하군요. 이런 지점이 어서 개선되면 좋겠어요.

방금 좋은 사례가 있는지 검색해보다가, 일본에는 재난 단계별로 여성과 재난취약자의 특성을 고려한 대비와 대응, 복구활동 지침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2005년부터 국가의 방재기본계획에 성인지적 관점을 도입하고 보완해나간 덕분이라고 하네요. 지금은 구체적인 매뉴얼을 만들어서 재난 관련 의사결정 과정에 더 많은 여성이 참여하고, 보건소·양육지원센터·보육시설을 통해 임신부와 영유아 보호자에게 재해를 막는 데 필요한 지식을 보급하게끔 하고 있대요.

 쵸파  와, 구체적이네요. 우리나라도 부족한 부분들을 개선해서 하루빨리 여성들이 재난으로부터 자기 몸을 지킬 수 있고,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라노  맞아요. 다시는 이런 슬프고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계속 이야기해보자고요. 다시 한번 10·29 참사의 희생자분들과 슬픔에 잠겨있는 모두에게 애도를 전하며, 오늘 나눈 것과 같은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확장되기를 바라요.
(!)

이상한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찾아 헤매는 

-오늘의 콘텐츠 | 영화 벌새-

1994년, 알 수 없는 거대한 세계와 마주한 14살 ‘은희’의 아주- 보편적이고 가장- 찬란한 기억의 이야기.
©네이버영화

노란 티를 입고 가방을 멘 은희가 정면을 보고 있어요. 그 뒤로는 무너진 성수대교의 모습이 보여요. 오른쪽 아래
영화 ‘벌새’ 포스터 ©엣나인필름

영감의 실마리


하나, 시작은 폭력을 ‘폭력’이라 부르는 것부터

언뜻 보기에 은희를 둘러싼 세계는 평범해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곳은 폭력으로 가득해요. 다만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도, 당하는 사람도 그게 폭력이라는 걸 모를 뿐이죠.


집안의 기대는 몽땅 장남인 오빠에게 쏠려있습니다. 이런 관심과 기대를 등에 업고 ‘작은 가장’이 된 오빠는 시시때때로 은희를 때리고요. 학교도 폭력적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은희의 담임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나는 노래방 대신 서울대 간다”라는, 지독히 학벌주의적인 구호를 복창하게 하거든요. 영화 초중반 부까지의 은희는 이런 폭력에 저항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 순간이 최대한 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다리죠. 오빠에게 더 맞지 않기를, 선생님이 구호를 그만 외쳐도 좋다고 하기만을 바라면서요.


그러던 어느 날, 은희는 학원 선생님인 영지에게 “너 이제 맞지 마. 누가 널 때리면, 어떻게든 맞서 싸워”라는 말을 듣습니다. 이를 통해 은희는 ‘내가 경험하는 건 폭력이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어요. 그 뒤 집안에서 또 한 번 가부장적 폭력을 마주하는 순간, 은희는 있는 힘껏 몸부림치며 절규에 가까운 저항을 합니다. 가해자가 폭력을 멈춰주기만을 기다리던 ‘대상’에서 폭력의 고리를 끊는 ‘주체’로의 첫발을 내딛은 거예요.

해질녘, 은희가 눈물을 글썽이며 먼 곳을 바라보고 있어요.
영화 ‘벌새’ 스틸컷 ©엣나인필름

둘, 네 안에도 내가 있어

‘나’에게 행해지는 폭력을 직시하고 그에 저항할 줄 알게 된 은희. 그는 다른 사람이 겪는 폭력까지도 감지해낼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납니다. 


은희의 등교길에는 철거민들이 내건 투쟁 현수막이 있는데요. 영화 초반의 은희는 그 현수막에 눈길조차 주지 않아요. 그러다 중반부에 가면 그 현수막을 보고 철거민들이 불쌍하다고 말합니다. 이때 은희와 함께 있던 영지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너무 많지? 그래도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마. 함부로 동정할 수 없어. 알 수 없잖아”라고 얘기해줘요. 그리고 영화 끝에 가면 은희는 찢겨버린 현수막을 보며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주는 서늘한 감각을 있는 그대로 마음에 들일 줄 알게 되지요.


이렇게 은희는 타인이 경험하는 폭력을 아예 보지 못하던 사람에서, 타자화의 렌즈도 벗어 던진 채 폭력의 ‘이상함’ 자체를 또렷이 볼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해갑니다. 나의 고통과 다른 사람의 고통, 그리고 이런 폭력과 저런 폭력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낌으로써 은희의 자아가 확장되는 거예요.

셋, 무너진 다리를 제대로 다시 이으려면

나아가 은희는 폭력 너머의 세계를 상상하기 위해서는 폭력이 남긴 상처를 기억해야 한다는 것도 어렴풋이 깨닫습니다. 은희는 성수대교 붕괴 참사로 그토록 의지하고 따르던 영지 선생님을 잃어요. 무너진 다리와 함께 은희의 세계도 붕괴하는 것이죠. 여기서 인상적인 것은 은희가 자신의 세계를 재건해가는 방식이에요.


은희는 성수대교가 끊어진 자리를 직접 보러 가요. 그리고 눈물로 영지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폭력이 휩쓸고 간 자리를 못 본 체하거나 그 흔적을 말끔히 지워버리는 대신, 폭력의 실체를 직시하는 거예요. 그렇게 은희는 참사 이전의 세계로 돌아가는 대신 그것이 남긴 상처를 품은 채 성장하기를 택합니다. 무너진 성수대교를 이전의 모습 그대로 쌓아 올리는 것만으로는 두 번 다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는 걸 막을 수 없으니까요. 


누군가는 우리 세계의 균열을 얼른 메꿔버려야 할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다른 누군가는 그것을 새로운 세계가 뿌리내릴 틈으로 바라봐요.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일”이 없는 아름다운 세상을 상상하고 만들어 가는 건 언제나 후자의 사람입니다.

캄캄한 새벽, 은희와 그의 언니 수희, 그리고 수희의 남자친구가 성수대교 붕괴 참사 현장을 찾아 끊어진 다리를 바라보고 있어요.
영화 ‘벌새’ 스틸컷 ©엣나인필름

에디터의 생각 조각

위드, 정신건강의학에서 말하는 ‘외상 후 성장’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요? 외상 후 성장은 충격적이고 심각한 사건(=외상 사건)을 경험한 후, 이에 대처하고 적응해가는 과정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겪는 걸 말해요. 개인의 역량, 삶에 대한 만족도,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 등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보다 더 좋아지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해요.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외상 후 성장이 외상 사건으로 인한 고통이 사라진 상태를 뜻하는 건 아니라는 거예요. 외상 사건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바뀌는 것도 아니고요. 다만 외상 후 성장은 아픔의 짝꿍이 절망이나 붕괴가 아닌 성장일 수도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이때 아픔에 따라붙는 짝꿍이 누가 될지를 결정하는 건 ‘외상 사건’이 아니라 ‘그에 대처하고 적응해가는 과정’입니다. 사건이 남기고 간 커다란 상처의 의미는 그 뒤에 오는 경험에 따라 달라진다는 거죠.


그렇기에 2022년 10월 29일 밤, 서울 이태원에서 일어난 “말도 안 되는 일” 앞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은희의 마음이 아닐까 싶어요. 하룻밤 새 158명의 목숨이 스러져간 그 골목길의 모습을 똑똑히 바라보고 가슴에 새기겠다고, 이 일이 얼마나 ‘이상한’ 것이었는지를 기억하겠다고 다짐하는 마음이요. 상처를 끌어안고, 더 아름다운 세계를 빚어내기 위해서요.

(;)
위드,
참사 이후의 세계를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나요?

오늘 레터를 읽으며
'이런 얘기, 나도 직접 나누고 싶어 💭'
라고 생각했다면?
Recruit 2023. (wew)
2023년 상반기, wew 팀과 함께해요! 

  • 모집 부문: 운영팀, 에디터팀
  • 지원 마감: 11월 30일 오후 11시 59분
  • 면접(비대면 화상통화): 12월 3~4일
  • 최종 결과 전달: 12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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